216화
“자네가 온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다들 저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네요.”
“그럴 수밖에.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사람이 바로 자네 아닌가.”
석정원 회장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여기 옆에 알고 있지? 김오성 한국은행총재.”
“알고 있습니다. 또 뵙네요.”
“반가워요.”
일전에 칼리드 왕자가 주최했던 파티에서 만났던 김오성 한국은행총재를 다시 만나게 됐다.
“허허. 굉장히 잘나가고 있던데, 아주 훌륭해.”
“감사합니다. 총재님.”
“앞으로도 잘할 거야. 아버지의 빈 자리를 잘 채우겠어.”
김오성의 덕담에 나는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주변을 슬쩍 둘러본 다음 말했다.
“제가 살면서 동문회는 처음 참여해 보는데요. 여기,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자리였군요?”
“허허. 보통 자리가 아니지. 서연대학교를 졸업했다고 해도 이 자리는 성공했거나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사람들만 참여할 수 있는 자리니까.”
김오성의 말에 나는 살짝 놀란 표정을 드러냈다.
“그러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성공했다고 보면 되는군요?”
“거의 그런 셈이지. 아까 자네가 박정석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 같던데, 서로 아는 사이인가?”
“아! 학교 동기였습니다. 썩 좋은 사이는 아니지만요.”
“그랬군. 저 박정석은 검찰에서 활약 중이야. 꽤 이름 좀 날리는 것 같더군.”
“호오.”
처음 듣는 말에 나는 살짝 놀라웠다.
“박정석의 아버지는 꽤 잘나가던 검찰이었지. 차기 검찰총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었는데, 아쉽게도 총장까지는 되지 못했지만 말이야.”
아버지의 뒤를 따라 검찰에 들어간 건가?
“아무튼, 이것도 인연인데 한잔할까?”
“좋습니다.”
우리는 와인 잔을 하나씩 쥐고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가볍게 와인 한 모금을 마시는 사이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있었군.”
“음?”
고개를 돌리자 지태선이 있었다.
지태선은 석정원과 김오성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어르신.”
“오, 자네도 왔구만.”
두 사람 모두 지태선을 보고 반가워했다.
“요즘 많이 바쁘지? 대통령님 모시느라 고생이겠어.”
“나랏일 하는데 고생이랄 것이 있겠습니까?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고 있죠.”
“허허. 나는 자네의 그런 면이 참 마음에 들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태선이 나에게 말했다.
“잠깐 이야기 좀 나눌까?”
“아, 그러시죠.”
나는 석정원과 김오성을 보고 말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아. 신경 쓰지 말고 다녀오게.”
그렇게 나는 지태선을 따라 약간 구석진 자리로 이동했다.
“대한당에서 접촉했다며?”
“음, 어떻게 아셨어요?”
“모를 리가 있나. 청와대 정보력을 쉽게 생각하면 안 돼.”
“이크. 무섭네요.”
익살스럽게 반응하자 지태선이 가볍게 웃었다.
“뭐, 국회의원도 아니고 시의원이긴 해도, 박정민 그 사람 대한당 내에서 꽤 주목 받는 인물이야.”
“그렇습니까?”
“어. 야망이 있는데 수완까지 좋아. 최근에 대곡 쪽에 대학교 하나 유치 성공한 일 알고 있나?”
“아, 그거 플래카드 걸린 건 봤습니다.”
“그거 박정민 의원이 한 일이야.”
“어? 그런가요?”
최근에 꽤 유명한 대학교 하나를 대곡역 주변으로 유치한 일이 있었다.
많은 지자체에서 경쟁했었는데 최종적으로 고양이 확정됐다.
나는 그 일이 시장이 한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한 내막을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대학교 총장과의 친분을 활용해서 적극적으로 유치했더군. 꽤 유능한 인물이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이 그 박정민 의원과 관련된 건가요?”
“음. 네가 누구와 접촉하든 내가 뭐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민당 쪽에서 너를 경계할 수도 있어.”
“그거야 뭐.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정치에 별로 관심 없지만, 그룹을 이끄는 수장이 된 이상 정치와 계속 연결이 될 수밖에 없다.
“TH와 영신은 정치에 흔들릴 정도로 약하지 않습니다.”
“……그렇군.”
그의 눈이 살짝 크게 떠졌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자네가 회장이 되어 다행이야. 뭐,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야.”
“음?”
지태선은 주변을 슬쩍 둘러본 다음, 나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VIP가 만남을 요청하셨어.”
“……!”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VIP?
그럼 대통령?
“사실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온 것도 너를 보기 위해 온 거야. 원래 따로 초청장을 보낼 예정이었는데, 네가 여기에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왔지.”
“……저, 혹시 제가 뭐 잘못해서 부르는 건 아니죠?”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나!”
지태선은 호탕하게 웃다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앞으로 대한민국 경제를 움직일 새로운 회장의 등장인데, 청와대도 모른 척할 수 없지 않겠나.”
“그렇군요.”
“하여튼, 시간을 좀 내줘. 부탁하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없던 시간도 만들어서 가야죠.”
“하하. 고맙네.”
뜻밖의 초대에 조금 놀라긴 했어도,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부분이다.
영신그룹은 대한민국을 넘어선 다국적 기업이다. 이런 기업을 본토에 두고 있는 대통령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김진철 이사나 박준후 팀장도 나에게 미리 언질을 주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김 비서는 안 보이는군?”
“아, 제가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음? 아아. 그렇군.”
“저, 그럼 자리 좀 즐기고 있겠습니다.”
“그래, 좋은 시간 보내게.”
* * *
내가 서연대학교 동문회에 등장한 소식은 기사를 타고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회장으로 확정된 이후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혹시나 내 행보에 문제가 되지 않게 비서실에서 미디어 관리를 했다.
“예전에는 도보로 출퇴근도 가능했는데…….”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이전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었다.
이제 내 주변에 경호원들이 숨 쉬듯 붙어 다녔다.
“태훈 씨.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고마워.”
그래도 김 비서가 함께 있어서 다행이다.
“회장 인수인계 관련해서 처리할 것도 많네.”
“아무래도 몇 달간 공석이었으니까요.”
12월에 있을 회장 이취임식 이전까지 나는 영신그룹 회장 인수위를 만들어 업무를 하나씩 인계받고 있었다.
“그래도 김 이사님이나 박 팀장님 도움이 있어서 다행이야. 혼자 했으면 죽었을 거야. 진심으로.”
글로벌 기업을 이끄는 회장의 업무량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이걸 모두 소화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오신 겁니까. 아버지.”
절로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지이잉.
“음?”
그때 갑자기 문자가 왔다.
[대표님. 잘 계시죠?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조만간에 경기도 뛸 것 같아요. 감독님께서 조만간 기회를 주겠다고 이야기했거든요. 제대로 감사 인사 한번 못 한 것 같아서 이렇게 문자로 연락드립니다.]
“누구예요?”
“박요한. 문자 보냈네.”
박요한은 예의를 아는 인물이다.
나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어렵게 간 유럽이니 부디 기회 잘 살려서 훌륭한 선수가 되세요.]
답장을 보내고 나는 흐뭇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내려놨다.
* * *
시간이 흘러 9월이 되었다.
고양 선수들의 분위기는 여전히 최고조를 달리고 있었다.
“할 수 있다!”
“아자!”
박요한이 이탈했음에도, 고양의 전력은 여전히 매섭고 강렬했다.
박요한의 빠진 자리에는 그간 많은 기회를 받지 못했던 한석원이 차지했다.
“제대로 보여 주겠어!”
조용히 칼을 갈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왔던 한석원은, 그간의 한을 풀 듯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였다.
『한석원이 해트트릭을 기록합니다! 프로 통산 첫 번째 해트트릭입니다!』
『고양 정말 대단하네요! 박요한 선수의 빈 자리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한석원의 대활약으로 고양은 흔들리지 않고 계속 1위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중요한 일전을 벌이게 됐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고양더블은행파크입니다!』
리그 2위 서울 드래곤즈와 맞붙게 된 고양 유나이티드.
리그 1위와 2위의 대결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번 시즌 고양 유나이티드도 대단하지만, 서울 드래곤즈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현재 고양이 무패로 선두를 질주하고 있는데요. 리그 2위 서울도 연승을 거두면서 바짝 따라붙고 있습니다.』
리그 1위 고양 유나이티드와 리그 2위 서울 드래곤즈의 승점 차이는 불과 5점 차이였다.
오늘 경기 결과에 따라서 그 차이가 확 줄거나 늘어날 수 있었다.
순위의 향방을 걸고 시작된 두 팀의 경기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석원아!”
밑으로 내려온 박형우가 측면 쪽으로 뛰어가는 한석원에게 패스했다.
가벼운 트래핑으로 공을 받은 한석원이 서울의 측면을 돌파했다.
완벽하게 열려버린 서울의 수비.
한석원은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곧 라인을 따라 쇄도해 들어가는 동료를 봤다.
툭.
직접 슈팅하는 대신 동료에게 기회를 준 한석원.
그렇게 기회를 받은 동료는 바로,
“호프만!”
발밑으로 정확히 받아낸 호프만은 침착하게 슈팅을 때렸다.
팡!
낮고 빠른 미사일 같은 슈팅이 서울의 골망마저 흔들었다.
우와아아아아!
『호프마아아안! 골입니다! 고양이 먼저 앞서 나갑니다! 스코어는 1:0입니다!』
호프만의 선제골로 고양이 한 점 앞서나가게 됐다.
경기 주도권이 고양에게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서울도 반격했다.
『강유찬! 득점합니다! 빠르게 동점골을 만들어내는 서울입니다!』
빠른 역습 플레이로 바로 반격에 성공한 서울.
스코어는 단숨에 1:1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경기 분위기에 불이 붙었다.
『고양이 코너킥을 얻습니다! 호프만이 차는데요!』
코너킥 기회를 얻은 상황에서 호프만이 공을 차올렸다. 빠르게 포물선을 그리며 올라간 공이 골문 앞쪽으로 뚝 떨어졌다.
떨어지는 공을 향해 정성진이 발을 댔다.
정성진의 발에 맞고 방향을 튼 공이 그대로 서울의 골망을 흔들었다.
『골! 골입니다! 고양이 또 한 번 앞서갑니다! 정성진의 골입니다!』
스코어는 2:1이 되었다.
그런데…….
삑!
킥오프 이후 서울의 빠른 플레이에 고양 수비수들이 반칙을 범하고 말았다.
『서울이 프리킥 기회를 얻는데요. 상당히 좋은 위치입니다. 페리시치가 찰 준비를 하는데요!』
올 시즌 리그에서 13골을 넣으며, 14골을 넣은 박형우의 뒤를 이어 득점랭킹 3위에 오른 페리시치가 프리킥 키커로 나섰다.
팡!
깔끔하게 감아 들어간 프리킥이 수비벽을 뚫고 그대로 골망까지 흔들었다.
베테랑 박지원도 막기 어려운 완벽한 프리킥이었다.
『서울이 또 순식간에 득점에 성공하며 따라붙습니다! 스코어는 2:2가 됩니다!』
『와, 서울 정말 대단하네요. 지난번 맞대결에서도 다득점 경기가 펼쳐졌는데, 이번에도 두 팀의 화력쇼가 대단하네요!』
양 팀 감독들의 지략 대결도 흥미진진했다.
“지우야! 스즈키하고 거리 좁혀! 석원아! 너는 왼쪽만 가지 말고 오른쪽 스위칭도 함께 해!”
“헤이! 페리시치! 유찬! 스위칭!”
양 팀 감독들이 터치라인에 서서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선수들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조정하면서 대응했다.
이 후로도 경기는 상당히 다이나믹하고 빠르게 진행됐다.
『마치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보는 것 같은 두 팀의 대결이네요!』
하지만 더 이상의 골은 터지지 않은 채 전반전을 2:2로 마쳤다.
그리고 이어지는 후반전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