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사무엘이 고양에 합류한 지도 어느덧 4년이나 되었다.
33세에 입단했던 그의 나이도 이제 37세가 되고 있었다.
완전한 노장 선수가 된 그는 이제 점점 출전 경기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예전보다 단단하지 못한 피지컬과 감소한 체력이 문제였다.
본인도 충분히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비록 출전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팀의 고참 선수로서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여기는 버스 정류장.”
“버스 전유자?”
“정·류·장”
“전류자”
“다시, 정·류·장”
“정류장”
“잘했어.”
새로 합류한 외국인 선수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것은 기본이었다.
외국인 선수들도 사무엘을 팀 동료이자 한국어 선생님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사무엘! 밥 먹자!”
사무엘에게 교육받은 라시모프는 어느덧 간단한 한국어 정도는 사용할 줄 아는 경지에 이르렀다.
“좋아. 뭐 먹을래?”
“닭갈비.”
“오, 좋은데.”
“내가 살게. 보너스 받음.”
고양에게 조금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외국인 선수들끼리 상당히 사이가 좋다는 점이다.
이는 사무엘의 영향이 컸다.
상대가 누구든 팀에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무엘을 싫어하는 외국인 선수는 없었다.
이는 이름값 높은 호프만이나 카초도 마찬가지였다.
“같이 가자.”
“그래도 괜찮을까?”
“어. 한국에서는 같이 밥 먹어야 좋은 관계가 만들어져. ‘국룰’이야.”
“구크룰?”
“국·룰.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통상적인 규칙이라고 보면 돼.”
“아하.”
한국 선수들도 사무엘을 단순한 외국인 선수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야, 사무엘! 조만간에 같이 캠핑 가자.”
“캠핑? 좋지.”
동갑내기 김지우와도 친해진 사무엘. 한때 서로가 라이벌 팀에 있을 때는 경기장에서 죽자 살자 달려들었지만, 동료가 된 지금은 누구보다 친했다.
두 사람은 가족끼리도 친해 함께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이런 사무엘의 행동은 고양 유나이티드 전체에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다른 구단이었다면 나이 많다고 방출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고양에서는 계속 사무엘과 함께했다.
잠시나마 진지하게 은퇴를 고려했던 사무엘을 붙잡은 것도 고양이었다.
사무엘은 자신을 존중하는 팀을 위해 감사함을 느끼며 최선을 다했다.
“팀은 정말로 나를 존중해 줘. 그래서 나도 뭔가 해주고 싶어.”
사무엘은 남몰래 큰 결심을 하게 됐다.
그것은 바로…….
[TOPIK 시험장]
“반드시 해낸다!”
TOPIK는 Test of Proficiency in Korean의 약자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한국어 능력 시험이었다.
특별 귀화를 신청할 수도 있었지만, 은퇴 이후에도 한국에서 생활하려면 스스로의 힘으로 귀화를 이루고 싶었다.
그렇게 남몰래 시험을 준비해 왔던 그는 이번 여름 휴식기에 시험을 치르게 됐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해냈다!”
[사무엘 – 1급 합격]
당당하게 1급으로 합격했다.
“이걸로 귀화를 진행할 수 있어!”
합격통지서를 받은 사무엘이 뒤늦게 구단에 이 소식을 전했다.
소식을 전달받은 구단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곧 구단에 있는 모두가 축하해주었다.
“사무엘 축하해!”
“야, 한국인도 어렵다는 그걸 1급을 따네. 대단하다!”
구단 차원에서 기사도 내줬다.
【오피셜】고양 사무엘, TOPIK 1급 합격!…… 귀화 준비한다!
사무엘의 귀화 준비 소식이 발표되면서 K리그가 또 한 번 들썩였다.
-와, 대박이다. 사무엘이 귀화하면 고양은 외국인 선수 또 데려올 수 있네?
-진짜 잘 되는 팀은 뭘 해도 잘 되는구나?
-사무엘이 한국어를 잘하기는 하지. 올라오는 영상이나 인터뷰할 때 유일하게 통역사 안 쓰는 외국이잖아.
-고양 사씨의 시조가 되자!
역대 K리그 외국인 선수 중에서 귀화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과거 소련에서 넘어온 신의손을 시작으로 몇 명의 외국인 선수들이 귀화했다.
사무엘이 귀화에 성공하면 역대 귀화 선수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일각에서 사무엘이 국가대표를 위해 귀화하는 것이냐는 물음이 있었는데, 사무엘은 이 의견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지금 나이에 국가대표를 꿈꾸기는 어렵다. 나는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귀화를 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이 좋았고, 은퇴 이후에도 한국에서 계속 한국인으로 살고 싶기 때문이다. 가족도 모두 동의했다.”
국가대표를 위해 귀화하는 것이 아니라고 명확히 밝힌 그는 덧붙여 이런 말도 꺼냈다.
“지금 내가 속한 고양 유나이티드는 나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팀이다. 이런 팀에서 내가 보답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최대한 빠르게 귀화에 성공해서 외국인 자리를 비워두게 만드는 것이다. 그게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에 고양 유나이티드 팬들은 사무엘은 연호했다.
-갓무엘!
-진심 인성에 지렸다.
-와, 우리에게 이런 선수가 있었다니!
-사무엘 진짜 오래도록 함께하자! 은퇴하면 코치로 계속 가자!
반면 파주FC 팬들은 복장이 뒤집혔다.
-배신자.
-사무엘 이적하게 만든 이재신 ㅅㅂ놈
-진짜 단장 하나 때문에 팀이 이 꼬라지 됐구나.
-아, 진짜 빡친다.
사무엘의 이런 행동에 고양도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그렇게 사무엘은 올해가 끝나기 전에 귀화에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부지런히 준비했다.
* * *
고양 유나이티드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을 때, 영신 그룹에서는 차기 총수 작업이 마무리화되고 있었다.
“사실상 지태훈 대표가 영신을 이끌게 됐군.”
지태훈이 보여주는 성과들은, 아무리 그가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태훈이 서자 출신이라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었다.
다른 형제들도 지태훈을 인정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태종이 형.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차기 총수님 얼굴이나 보러 왔지.”
지태훈을 만나러 온 지태종은 자신이 총수 자리에 미련이 없다는 것을 밝혔다.
“한때 큰형을 제치고 총수 자리에 오르고 싶은 열망이 있었어.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아무런 의미가 없더라고. 이런 재벌가의 삶이 질리기도 했고.”
“…….”
“무엇보다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올라가는 것이 맞아. 그랬을 때, 네가 제일 잘 어울려.”
“고마워. 형. 그런데 형은 앞으로 뭘 하려고?”
“나는 나대로 인생을 살아야지. 아버지가 나에게 남겨준 재산도 아직 남아 있고. 허투루 쓰지 않는다면 평생을 써도 될 정도니까.”
“형, 우리 나중에 또 볼 수 있는 거지?”
“……네가 원한다면.”
이후 지태종은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떠나기 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영신그룹 지분을 지태훈에게 모두 넘겼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영신그룹에서 최종 발표했다.
【속보】영신그룹 차기총수는 TH투자회사 대표 지태훈으로 확정.
* * *
우리 집에 박준후 팀장과 김진철 이사가 찾아왔다.
“끝이군요.”
“그렇네요.”
커피를 마시는 나와 박준후에게 김진철이 한 마디 던졌다.
“끝은 개뿔. 이제 시작이구만.”
박준후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나에게 말했다.
“회장 취임식은 올해 말에 이루어질 겁니다. 대표님의 상황을 고려해서 이사회와 협의를 했습니다.”
“박 팀장! 방금 나 무시했…….”
“영신그룹의 실질적 지배회사였던 영신전자는 앞으로 TH투자회사를 모기업으로 두게 됩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나는 두 사람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도 잘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전혀 다른 미래가 그려질 겁니다. 그 미래가 어떤 결과가 올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최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하게 잘 이끄실 겁니다. 지금보다 더 훌륭하게 말이죠.”
나는 박준후 팀장으로부터 후계자 교육도 거의 마무리했다.
“더 이상 제가 대표님에게 가르쳐 드릴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 훌륭히 잘 해내셨습니다.”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실전으로 채우시게 될 겁니다. 그리고 걱정 마십시오. 대표님이라면 훌륭하게 잘 채울 거니까요.”
우리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진철이 말했다.
“알고 있겠지만, 회장의 자리란 쉽지 않을 거다.”
“네.”
“그 자리는 결코 혼자서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는 자리라는 것만을 잊지 마라. 알겠냐?”
“네. 물론이죠.”
김진철의 단단한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속에서는 전과 달리 나에 대한 신뢰가 느껴졌다.
그걸 본 나는 참았던 이야기를 꺼냈다.
“이사님.”
“음?”
“회장 취임식이 끝나면, 김 비서, 아니, 유리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
갑작스러운 나의 고백에 김진철은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박준후는 조금 놀란 표정을 드러냈다.
“처음부터 유리와 결혼할 생각으로 사귀었습니다. 회장의 자리에 오른 이상 더 미룰 생각도 없습니다.”
김유리는 나에게 있어 영혼의 파트너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녀를 계속 기다리게만 할 수는 없었다.
김진철은 살짝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뭐라 말할 수 있겠냐.”
“……이사님.”
“애초에 너희들 인생이다. 그리고…….”
“……?”
“아니다. 유리도 알고 있나?”
“조만간 이야기할 겁니다.”
그 말에 김진철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흐음. 만약에 유리가 거절하면 어쩌려고?”
“네? 그건…….”
“결혼이라는 건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는 거다. 만약에 유리가 싫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건…….”
애초에 떠올리기 싫은 상황은 오지 않을 거다.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막상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뭐라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나를 본 김진철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회사를 이끌 때는 카리스마가 넘치더니, 이럴 때는 전혀 다르구만!”
“…….”
“농담이다. 지금 유리의 눈에는 너 외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다. 옛날에도 지금도 그래왔으니까.”
“…….”
지켜보던 박준후가 한마디 했다.
“농담치고 지나치셨습니다.”
“흥.”
나는 말 없이 웃었다.
* * *
짧은 휴식기가 끝나고 마침내 후반기 일정이 시작됐다.
후반기 첫 경기를 홈 경기로 치르게 된 고양은, 이날 뜻밖의 손님을 초청했다.
바로 양하린이었다.
『팬 여러분들, 모두 양하린 어린이에게 힘찬 박수 부탁드립니다!』
짝짝짝-.
일전에 양하린과 있었던 일을 영상으로 편집해서 구단 공식 SNS에 업로드됐었다.
반응은 상당히 좋았고, 팬들은 댓글로 홈경기에 초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팬들의 의견을 적극 수용한 우리는, 양하린과 그 부모를 홈 경기에 초대했다.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양하린은 꿈에 그리던 순간을 맞이했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박형우와 김지우의 도움을 받아 시축을 진행했다.
툭.
그저 발을 살짝 갖다 대는 수준이었지만, 공이 움직이는 순간 서포터스들이 힘찬 박수와 함성을 쏟아냈다.
양하린! 양하린! 양하린!
평생 못 잊을 경험을 하게 된 양하린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부모도 우리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린이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될 거에요.”
“하린이가 부디 병에서 이겨내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시축을 마친 고양 유나이티드는 주심의 휘슬과 함께 후반기 경기를 치르게 됐다.
삐이이익!
우와아아아!
선수들이 뛰기 시작하자 경기장은 팬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