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경기 시작 전,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강철인은 한 인물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형우 형, 선발로 나올 줄 알았는데.’
강철인은 벤치에서 시작하는 박형우를 보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철인아. 오랜만이다?”
강철인과 시선을 마주친 박형우가 다가와 반갑게 말을 걸었다.
“잘 지내셨어요?”
“그래. 너도 여전히 잘하는 것 같더라. 오늘 살살해줘.”
“해보고요.”
“짜식.”
박형우는 강철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강철인.
“뭐야? 저 사람이 네 애인이야?”
“뭐래.”
“그럼 뭔데 그렇게 뜨거운 시선으로 쳐다보냐?”
튀랑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강철인은 어이없어 했다.
“그냥 예전에 대표팀 막내였을 때, 형우 형이 많이 챙겨 줬거든.”
“그래?”
“어. 형우 형 덕분에 대표팀에서도 무사히 적응할 수 있었어.”
어린 시절부터 주변에서 상당한 기대를 한 몸에 받아왔던 강철인.
마침내 입성한 A대표팀에서, 그를 향한 시선은 기대와 질투로 가득 차 있었다.
불과 19살의 나이였던 그는 그런 시선들이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런 그에게 제일 먼저 다가왔던 사람이 바로 박형우였다.
“대표팀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형이 도와줄게. 네가 제대로 된 실력만 보여준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네 편이 되어줄 거야.”
이후 강철인은 박형우를 따르며 대표팀에 적응해 나갔다.
대표팀에 호출될 때면, 박형우와 함께 움직였다.
오죽하면 대표팀 코칭스태프도 강철인의 룸메이트로 박형우를 붙여 줄 정도였다.
박형우는 싫은 기색 없이 그를 챙겨주었다.
그러다가 강철인이 포지션 경쟁에서 이기면서 박형우를 밀어내고 주전을 차지했다.
이후 둘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실력에서 밀린 박형우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늘어났고, 어느 순간 대표팀 발탁도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 탓에 둘은 한동안 대표팀에서 만나지 못했다.
대신 강철인은 꾸준히 박형우에게 개인적인 연락을 하며 안부를 물었다.
박형우도 그런 강철인에게 고마워했다.
‘형이 잘 풀려서 다행이야.’
어느 날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박형우의 말에 놀랐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온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결국 월드컵에서 정점을 찍으며, 박형우는 대한민국 월드컵 스타 반열에 올랐다.
강철인은 그런 그를 향해 진심으로 응원하고 기뻐했다.
[선수단 이이이입 자아아아앙!]
“철인. 가자.”
“그래.”
선수단 입장 외침을 들은 강철인이 경기장으로 향했다.
* * *
삑!
『주심의 휘슬과 함께 경기 시작합니다! 화면 기준으로 왼쪽이 홈팀 고양 유나이티드, 오른쪽이 맨체스터시티입니다!』
고양의 선축으로 시작된 전반전.
고양 선수들은 안정적으로 볼을 돌리기 위해 패스를 주고받았다.
『경기 시작부터 고양이 조금은 신중한 움직임을 보입니다!』
고양의 의도를 파악한 맨시티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압박해!”
맨시티 엠블럼이 박힌 정장을 입은 콘라드 감독이 터치 라인 앞에 서서 선수들에게 외쳤다.
『발베르데 선수가 압박하는데요! 박요한, 뒤로 살짝 내주는데요! 오세진이 받습니다. 이번에는 쉬레입니다! 쉬레, 압박! 공을 빼앗습니다!』
쉬레의 압박에 공을 빼앗긴 오세진.
오세진의 뒤로 흐른 공을 호드리고가 잡고 측면에서 질주하며 빠르게 고양 진영 안으로 침투했다.
『맨시티 선수들 상당히 빠른데요!』
코너플래그 근처까지 온 호드리고 앞을 이진수가 막아섰다.
『이진수와 대치하는 호드리고! 이번 시즌 맨시티에서 리그 38경기에 모두 출전한 강철 같은 체력을 보유한 선수입니다!』
『자, 올리나요!』
호드리고는 크로스와 돌파를 생각하다가 가까이 다가온 강철인을 보고 패스를 선택했다.
『강철인이 공을 잡습니다!』
우와아아!
강철인이 터치하자 지켜보던 관중들이 환호성을 내지르기도 했다.
『강철인, 올려줍니다!』
『자~ 들어가나요!』
페널티박스 모서리 근처에서 강철인의 짧은 크로스에 맞춰 맨시티의 라비, 오데사, 데이비스 3명의 선수가 동시에 쇄도했다.
그런 맨시티 선수들을 막기 위해, 라시모프, 스즈키, 백종수가 경로를 방해하듯 움직였다.
하지만 강철인의 크로스가 너무나도 정확했다.
『데이비스……!』
팡!
쇄도하던 데이비스의 이마에 정확히 닿은 공이 방향을 꺾고 골문으로 향했다.
위기의 순간, 고양에게는 박지원이 있었다.
팡!
『골키퍼 선방! 박지원이 선방합니다!』
『이야~ 강철인 선수의 정확한 크로스에 데이비스의 헤딩까지 완벽했는데요! 이걸 박지원 골키퍼가 막았네요!』
노련하게 위치를 잡고 침착하게 공을 잡아낸 박지원이 동료 선수들에게 외쳤다.
“움직여! 빨리!”
박지원은 빠르게 공을 차서 전방으로 길게 보냈다.
팡!
포물선을 길게 그리며 올라간 공이 센터서클 바로 밑에 있던 호프만이 뛰어갔다.
그리고 가벼운 트래핑과 함께 공을 잡는 호프만.
그런 그를 향해 쉬레가 붙었다.
등 뒤에서 강하게 달라붙으며 압박하는 쉬레의 플레이에 호프만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쉬레의 압박이 상당히 좋습니다!』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정상급 수비형 미드필더로 평가받는 쉬레인데요!』
하지만 호프만은 쉬레를 따돌리며 한순간의 틈을 만들어 냈다.
『역시 도르트문트에서 활약했던 호프만 선수답게 쉬레의 압박도 이겨내는군요!』
타이밍 좋게 앞으로 뛰어들어가는 정성진.
호프만은 곧장 그곳으로 공을 패스했다.
『윙백으로 출전한 정성진인데요! 빠르게 맨시티 진영으로 침투합니다!』
빠르게 침투하는 정성진을 향해 카마도가 슬라이딩 태클을 시도했다.
하지만 정성진은 공을 앞으로 살짝 건드린 다음 가볍게 점프해서 피했다.
『카마도를 뚫는 정성진!』
와아아아!
순간적이나마 세계적인 수비수를 제친 정성진의 플레이에 지켜보던 고양의 홈관중들이 모두 일어났다.
『4명의 선수들이 쇄도합니다! 맨시티는 3명의 선수들이 함께 뛰고 있는데요!』
맨티시가 예상했던 것보다 고양의 역습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놀란 맨시티 선수들이 부랴부랴 막으러 뛰어왔지만, 고양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정성진이 짧게 내줍니다! 박요한이 받는데요! 박요한 슈우우웃!』
팡!
페널티박스 정면에서 힘차게 슈팅을 때린 박요한.
발끝을 벗어난 공이 힘차게 날아갔지만, 이미 슈팅 궤적을 예측한 튀랑이 몸으로 막아냈다.
『수비에 걸리는 슈팅! 공은 아직 살아있는데요! 한석원이 잡습니다!』
굴절된 공을 한석원이 잡고, 재차 슈팅을 때렸다.
팡!
하지만 공은 골문 위로 가더니 이내 관중석으로 향했다.
『아쉬워하는 한석원!』
마무리 슈팅 이후 한석원이 아쉬운 표정을 드러냈다가 곧 박요한과 정성진에게 미안하다는 사인을 보냈다.
* * *
VIP 스카이박스 안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라시드 기술이사와 토레스 단장이 짧게 탄성을 질렀다.
“호오.”
“제법이네요.”
아직 경기 초반이기는 해도, 두 팀의 경기가 예상보다 박진감 넘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반응을 본 나는 작게 웃었다.
“기대 이상이야.”
파격적인 전술을 들고나온 곽찬구 감독의 행동에 조금은 우려가 됐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제법 잘하고 있었다.
‘설마 이태수가 도와줬나?’
곽찬구 감독의 스타일과 전혀 다른 경기 운영 방식이다.
‘뭐가 됐든, 우리에게 득이 되면 좋은 일이지.’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다.
과연 이 경기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 * *
경기장은 함성으로 가득 찼다.
한쪽이 우세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박빙의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던 콘라드 감독의 표정은 조금 굳어져 있었다.
‘평소와 다른 전술을 들고나오는 것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는데…….’
상대는 자신들이 어떻게 플레이할지 알고 있었다.
선수 개인의 기량은 맨시티 선수들이 한 수 위였다. 하지만 팀과 전술로 대응하는 상대에게 막혀 조금은 고전하고 있었다.
‘상대도 이 상황을 계속 유지하기는 어려울 거야. 두드리면 열리게 되어 있지만…… 저 감독이 그냥 가만히 있을 것 같지는 않아.’
슬쩍 상대편 벤치 쪽을 바라본 콘라드 감독.
그러자 터치 라인 앞에서 팔짱을 낀 채 경기장을 바라보고 있는 곽찬구 감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을 보고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상대가 저 정도로 고수였을 줄이야. 한 방 먹었어.’
콘라드 감독은 속으로 곽찬구 감독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있었다.
반면, 곽찬구 감독의 속마음은 달랐다.
‘이게 먹히네?’
내심 우려했던 것과 달리 생각보다 선수들이 잘해주고 있었다.
‘맨시티의 장점은 강철인은 축으로 한 전술. 반대로 이야기하면, 강철인을 틀어막으면 약점이 된다.’
월드클래스로 인정받은 강철인을 과연 누가 상대할 것인가?
이 부분에 있어 곽찬구 감독의 선택은 스즈키와 오세진이었다.
둘 다 피지컬이 좋았다.
강철인은 기술적으로 세계적인 실력을 갖추었지만, 상대적으로 체격이 작다는 평가가 있었다.
그런 강철인을 스즈키와 오세진이 함께 전담했다.
쿵.
“읏!”
『이번에는 스즈키에게 막히는 강철인인데요!』
『오늘 스즈키와 오세진 선수가 정말 지독할 정도로 강철인 선수를 괴롭히네요.』
친선경기치고 상당히 과격한 플레이에 강철인도 조금씩 화가 나고 있었다.
“너무 거친 거 아냐?”
같은 대표팀 동료였던 오세진에게 살짝 뾰족한 말투로 한 마디 건네는 강철인이었다.
그러자 오세진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형, 승부잖아요. 이런 게임 한두 번 해요?”
“…….”
오세진이 속을 긁었다.
어지간하면 휩쓸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오세진과 스즈키의 플레이가 거칠어도 너무 거칠었다.
지켜보던 콘라드 감독도 심판에게 거칠게 항의할 정도였다.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조용히 하세요.”
하지만 주심은 정당한 몸싸움으로 봤다.
그렇게 경기는 어느덧 전반 중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다시 기회를 잡는 고양인데요! 이번에도 호프만입니다! 호프만, 전방으로 패스합니다!』
발밑으로 향하는 호프만의 정확한 킬패스.
맨시티 수비수들 뒷공간으로 절묘하게 빠진 공을 이진수가 잡았다.
평소 풀백으로 출전했던 이진수는 오늘 스리백 중앙 수비수로 출전했었다.
그런 그가 어느샌가 최전방까지 치고 올라오더니, 호프만의 패스를 받고 그대로 슈팅을 때렸다.
팡!
발끝을 벗어난 공이 직선으로 시원하게 뻗어 나갔다.
하지만 맨시티 골키퍼 조인스가 골문으로 날아오는 공을 향해 정확히 쳐냈다.
팡!
손끝을 벗어난 공이 그대로 골라인 뒤쪽으로 넘어갔다.
『고양의 코너킥입니다.』
『이진수 선수 슈팅은 정말 아깝네요!』
『맨시티 선수들이 조금은 당황한 것 같습니다.』
『맨시티 선수들이 시즌이 끝나고 휴식기를 가지다가 왔는데, 아직 몸이 좀 덜 올라온 것 같네요. 반면, 고양은 한창 시즌 중이다 보니 전체적으로 팀 컨디션이 좋아 보이고요.』
코너킥을 차기 위해 코너플래그에 선 필립 호프만.
그사이 맨시티 골문 앞에선 양 팀 선수들이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다.
호프만이 왼손을 올리고 사인을 보냈다. 그러고는 바로 공을 찼다.
팡!
포물선을 그리며 길게 올라간 공이 그대로 맨시티 골문 앞으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공을 두고 선수들이 몸싸움을 벌이는 가운데, 페널티박스 바깥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라시모프가 빠르게 안쪽으로 쇄도했다.
그러고는 떨어지는 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정확히 이마에 닿은 공이 궤적을 바꾸고 그대로 골문 안으로 향했다.
출렁-
우와아아아!
흔들리는 골망.
그리고 환호하는 홈팬들.
득점에 성공한 라시모프가 카메라 앞으로 뛰어갔다.
맨시티 선수들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