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뭐? 기레기? 지금 자네 말 다했나?”
분노한 박동진 회장의 모습에도 김진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경고했다.
“박동진 회장. 당신이 누구 덕분에 그 자리에 올라갔는지 잊었나?”
“……!”
“전대 회장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당신이 형제들을 물리치고 그 자리에 앉았을 것 같나?”
“김진철!”
“지금도 당신한테 이를 갈고 있는 당신 형제들에게 내가 이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될까?”
“지금 협박하는 거냐?”
“그래.”
날아다니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천하의 한보일보 회장을 몰아붙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김진철 이사. 자꾸 이러면 자네만 손해야.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난 일을 가지고 협박하면 내가 무너질 것 같은가?”
“그래?”
김진철이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곧 한 마디 툭 던졌다.
“이지현.”
“……!”
순간적으로 박동진이 얼어붙었다.
“HB미디어, 박휘영. 이지현.”
“너……!”
“이게 무슨 말인지 다 알지?”
지금까지 그 누구도 모르게 비밀로 숨기고 있었던 일을 김진철이 알고 있는 사실에 박동진은 경악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에 죽은 배우 이지현, 그 여자가 사귀었던 아무도 모르게 사귀었던 남자가 소속사 사장이었던 HB미디어 박휘영이었다지?”
“……!”
“근데 이 여자가 죽은 이유가…… 박휘영의 할아버지인 박동진, 당신이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말이야.”
“그, 그만! 감히 그런 억지를……!”
“억지?”
당황하는 박동진과 달리 김진철은 여유로웠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내 알 바 아니야. 다만 이 이야기를 박휘영의 귀에 들어간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이놈!”
“박동진 회장.”
김진철은 차갑게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박동진 회장도 그를 보고 침을 삼켰다.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머릿속이 복잡한 그에게 김진철이 말했다.
“세상의 모든 눈과 귀가 당신만 있는 줄 아나?”
“자네,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뭔가? 자네가 나한테 이렇게 해서 득이 될 게 없지 않나?”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박동진 회장의 모습에 김진철은 며칠 전 일이 떠올랐다.
-김 비서를 잃는 건 한 번이면 족해! 두 번 다시! 다시는 두 번 다시 김유리! 너를 잃지 않을 거야!
마치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경험이 있는 것처럼 말하던 지태훈을 떠올린 그가 으르렁대며 박동진에게 말했다.
“당신이 하나뿐인 소중한 내 딸을 건드렸기 때문이야.”
그 말에 박동진이 당황했다.
“무슨…… 재벌가 사람들이 결혼은 본인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아니. 세상은 변했어.”
단호한 김진철의 말에 박동진은 입을 다물었다.
* * *
“그게 정말입니까?”
얼마 전, 김진철 이사로부터 듣는 이야기는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박동진 회장의 손자이자 전(前) HB미디어 대표였던 박휘영.
그에게는 정말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배우 이지현, 그녀는 어린 나이부터 데뷔해서 다양한 드라마와 CF로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던 여자였다.
당시 엔터계 사업을 준비하던 HB미디어에서 공들여 키웠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랬던 그녀가 소속사 대표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두 사람은 주변 사람들도 모르게 은밀하게 사랑을 키워왔다.
하지만 그런 행복도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1년 만에 비밀연애를 들키게 된 박휘영은 회장으로부터 당장 헤어지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박휘영은 당연히 거절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지현이 갑자기 죽었다.
세간에 알려진 사인은 ‘자살’.
이지현의 죽음으로 박휘영은 큰 충격에 빠졌고, 그날로 대표직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박휘영은 당시 한보일보, 아니, 한보그룹의 차기 총수로까지 거론되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사랑했던 여자가 죽은 뒤에 슬픔과 실의에 빠져 모든 것을 내려놓았지.”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답니까?”
“몰라. 행적 자체가 묘연해.”
나는 이런 이야기를 알고 있는 김진철 이사가 신기했다.
“이사님께서는 어떻게 이 일을 알고 계신 겁니까?”
“죽은 이지현의 가장 큰 후원자가 바로 네 아버지였던 지종윤 회장님이었다.”
“……!”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이지현은 영신그룹의 주요 광고모델이었어. 그녀를 후원해 주는 대가로 광고 촬영을 진행했었지.”
기억났다.
길거리에서 가끔씩 보던 영신그룹 관련 광고모델로 나왔던 여자배우의 모습을.
설마 그 여자가 이지현이었을 줄이야.
“갑작스러운 이지현의 죽음은, 우리 그룹에도 영향을 끼쳤어. 이지현을 통해 거둘 수 있는 수익이 적지 않았거든.”
김진철 이사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그룹 차원에서 이지현의 죽음에 대해 뒷조사를 지시했다고 한다.
그 결과 작금의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이지현의 죽음에는 현 한보일보 회장 박동진이 있었다.”
“……!”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런 나와 달리 김진철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박동진의 그 꼰대 같은 머리에선 이지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을 꼬신 천박한 딴따라에 불과했지.”
“세상이 어느 땐데…… 그리고 HB미디어는 한보그룹 소속 아닙니까? 그럼 회장도 엔터 사업의 중요성을 알고 진행한 것 아닙니까?”
“전혀. HB미디어는 박휘영의 작품이야. 박휘영을 차기 총수로 낙점하고 있던 박동진이 그룹 차원에서 지원을 해준 것뿐이지. 손자의 경영 능력도 키울 겸.”
“허어.”
“둘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러니 박동진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거지. 그래서 결국…….”
이 이상의 뒷이야기는 굳이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당시 그 조사를 담당했던 사람이 설마 이사님이셨습니까?”
“그래.”
김진철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애송아.”
“예?”
“너는 아직 결혼해서 아이를 두지 않아 모르겠지만, 딸을 가진 아버지에게는 그 누구보다 딸이 소중하다.”
“…명심하겠습니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김진철 이사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딸들을 아꼈다.
그는 딸과 관련된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덤볐다.
나도 나중에 딸을 키우면 그렇게 될까?
음, 김 비서 같은 딸이라면 나도 김진철 이사 이상으로 반응할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이걸 가지고 박동진 회장하고 딜을 볼 거다.”
“박동진 회장이 가만히 있을까요?”
“이 이야기가 밖으로 나간다면 천하의 박동진 회장도 위태로울 수밖에 없을 거다.”
“하긴, 인기 여배우의 사망에 차기 총수로 거론되던 유망한 손자까지 모두 잃은 사건이니, 내외적으로 지탄 받을 수밖에 없겠군요.”
“그렇지. 그뿐만이 아니야. 현정부에서 전임 대통령 사건으로 박동진 회장을 좋지 않게 보고 있어. 이 이야기가 청와대로 간다면, 심한 경우 박동진은 회장직에서 내려와야 해.”
불과 얼마 전에 지태완이 국가내란죄로 감옥에 갔는데, 한보일보까지 터진다면 여러모로 소란스럽겠다.
뜻하지 않게 재벌 사냥꾼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인 거고, 그가 우리의 딜을 받아들인다면 조용히 덮고 넘어갈 수 있어.”
“그런데 조금은 마음이 걸리는데요. 이런 사실을 몰랐으면 몰랐을까. 알고 있는데 그냥 넘기기에는…….”
“악인을 처단할 때는 때가 있는 법이야. 박동진 회장은 분명 언젠가 처벌받을 거다.”
“…….”
“그 전에 애송이 너는 네가 얻을 수 있는 걸 먼저 얻어내라. 지금은 그게 먼저다.”
그의 말대로 박동진은 언젠가 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넘어가기에는 찜찜했다.
“이사님 말씀대로 얻을 것을 얻은 후에, 제가 직접 그를 처단할 겁니다.”
“…마음대로 해라.”
우리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김진철이 돌아왔을 땐 사건이 어느 정도 해결된 뒤였다.
“박동진 회장이 우리에게 협력하기로 했다.”
“아!”
“당분간 그 인간이 우리에게 해코지하지 못하게 제약도 걸어놨으니 안심해도 될 거다.”
“고맙습니다. 이사님. 수고 많으셨어요.”
그는 기뻐하는 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애송아.”
“예?”
“강해져라.”
“…….”
“네가 그 누구보다 강해져야 한다.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태산(太山)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강인했다.
“살아생전 네 아버지처럼, 아니, 그 이상 강해져라.”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누구보다 강해집니다.”
“그래. 믿겠다.”
* * *
그렇게 상황이 일단락된 후, 잠시 숨을 돌리나 싶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연락을 받았다.
“지태훈! 잠깐 나하고 이야기 좀 해!”
“뭐야? 갑자기 네가 무슨 일이야?”
여전히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손지영이 갑자기 나를 찾아왔다.
“너 백태현하고 친하다고 했지?”
“백태현이? 갑자기 걔 이름이 너한테서 나오냐?”
“하! 진짜! 나보고 선보래!”
“뭐?”
“백태현! 그 사람하고 선보래!”
너무나도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잠깐만 지영아. 지금 너무 맥락 없이 나한테 이야기하는 거 아니니?”
“그럼 이야기 좀 들어 봐.”
손지영의 말에 따르면, 그녀의 아버지인 벽수그룹 손철 회장은 원래 나를 사위로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김 비서와 열애하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손철 회장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손지영도 30대가 된 만큼 손철 회장은 한시라도 빨리 딸을 시집보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렇게 고르고 고르다가 나온 딸의 시집 후보로 천산그룹의 신임 회장 백태현을 떠올린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젊은 나이에 뚜렷한 두각을 보이며 각자 위치에서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이 결혼으로 연결되면, 벽수그룹과 천산그룹이 혼맥으로도 연결되는 셈이다.
손철 회장에게는 상당히 매리트 있는 선택이었다.
“그래서 백태현에 대해 궁금해서 나한테 왔다?”
“어. 사실 결혼 생각은 별로 없는데, 하도 아빠가 뭐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만나봐야 하거든. 그런데 마침 네가 백태현하고 친구라는 이야기를 저번에 들었어서 정보 좀 얻게.”
“흐음.”
회귀 전에는 백태현도 나처럼 결혼하지 않았다. 연애는 했었던 것으로 안다.
그런데 그 연애가 결코 정상적이지 않았다. 진심으로 좋아서 하는 연애라기보단 그냥 서로의 일탈을 위한 연애였으니까.
회귀 후에는 백태현이 개과천선하면서 천산그룹의 회장까지 올랐다.
인생이 완벽하게 뒤바뀐 지금, 손지영 같은 여자가 백태현과 이어진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태현이 생각보다 좋은 친구야.”
“그래?”
“과거에 나하고 재벌가를 휩쓴 망나니였기는 한데, 나보다 능력 있고 성격도 좋아. 철도 많이 들었고.”
“오, 왠일이야? 네가 누구를 그렇게 칭찬하는 건 처음인데?”
“그런가? 하여튼, 백태현하고 잘 만나봐.”
“흐음.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은 궁금하네. 좋아. 까짓것 한번 만나는 볼게.”
“그래.”
손지영이 돌아가고 김 비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지영 씨는 무슨 일로 왔대요?”
“조만간에 백태현하고 선본대.”
“정말요?”
진심으로 깜짝 놀라는 김 비서의 모습에 나는 가볍게 웃었다.
“과거의 백태현이었다면 손지영하고 만나지 못하지. 그런데 지금은 다르니까.”
“하긴, 그쪽도 많이 바뀌었더라고요.”
“둘이 좋은 인연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
“태훈 씨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게 맞겠죠.”
나를 신뢰하는 그녀의 말에 기분이 살짝 좋았다.
“김 비서. 아니, 유리야. 우리 오늘 저녁에 일 끝나고 맛있는 음식 먹으러 갈까?”
“그럴까요?”
“응.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알았어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