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막내 구단주-195화 (195/272)

195화

한보일보.

1960년대 서울 종로에서 시작한 이 언론사는 정치부 기자 출신인 박건영이 세웠다.

자신과 뜻을 함께한 4명의 기자들과 힘을 합쳐 대한민국 역사의 한 획을 긋는 굵직한 기사들을 만들면서 명성을 높였다.

현재는 대한민국 최고의 언론사로 군림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미디어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한 상태다.

현 회장인 박동진은 박건영의 손자면서 한보일보 3대 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회장 취임 후, 종편 방송인 HTV와 미디어교육 사업인 한보교육 그리고 미디어 매니지먼트 HB미디어를 창설하여 성공적으로 사세 확장에 성공한 인물이기도 했다.

사업을 상당히 공격적으로 하는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와 더불어 성격은 꼰대 같다는 평가가 있었다.

그래서 만나기 전에 조금 걱정이 됐다.

대통령도 한 수 접을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그가 대화마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꼰대라면 곤란했다.

그런데 막상 만나본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지태훈이. 나를 기억하나?”

“아, 넵. 어렸을 때 행사에서 보던 기억이 흐릿하지만 남아 있습니다.”

“하하하! 나를 기억하고 있다니. 그거 다행이구만. 반갑네, 반가워.”

여전히 종로에 있는 한보일보 본사에서 만나게 된 박동진 회장.

그는 나를 보고 호탕하게 웃으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버지 제사에는 필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가지 못했네. 미안하네.”

“아, 괜찮습니다. 이렇게 신경 써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아! 일단 앉게.”

회장실 소파에 앉은 우리를 향해 곧 비서가 다가와 마실 것들을 두고 사라졌다.

“들게.”

“아, 넵.”

마침 목이 마르던 찰나여서 나는 음료수 하나를 마시려고 했다.

그런 나에게 박동진 회장이 말했다.

“차기 영신그룹의 총수가 될 귀한 분께서 바쁘신데 아주 먼 길을 하셨어. 그래.”

순간 마시려던 걸 뿜을 뻔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음료수를 내려놓고 차분하게 말했다.

“저를 좋게 봐주시는군요.”

“그저 대세가 보일 뿐일세. 이 정도 살면, 하나만 봐도 열 가지 이상이 보이거든.”

박동진 회장은 올해 75세였다.

돌아가신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그는 아직도 젊은 사람처럼 눈에 힘이 넘쳐났다.

“김진철하고 박준후가 나한테 연락을 해왔더군. 나보고 자네를 꼭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

“마침 나도 자네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던 참이어서 흔쾌히 수락했지.”

김진철 이사의 말대로 박동진은 나에 대해 궁금해했다.

“무엇이 그렇게 궁금하신지요?”

“한보일보 회장을 하다 보면 매일 실시간으로 정보가 들어와. 어쩔 땐 국정원보다 더 빠르게 정보를 접할 때도 있고 말이야.”

“…….”

“그 많은 정보 중에서 자네에 대한 정보가 없을 것 같았나?”

너무나 오만한 이야기처럼 들렸다.

말도 안 된다.

아무리 한보일보가 대단하다고 해도 어떻게 국정원보다 더 빠르게 정보를 접한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박동진의 눈과 마주한 나는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깊은 심연을 보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몸이 굳어진 상황에서 그가 말했다.

“자네가 무슨 배짱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몰라도, 자네가 하려는 짓은 너무나 위험한 짓이야.”

“그 말씀은 제가 무엇을 할지도 다 알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영신그룹을 TH그룹으로 바꿀 생각이 아닌가.”

“……!”

순간 내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관계자들만 아는 비밀을, 그는 다 알고 있었다.

“세상 어디에도 자네의 행동을 보고할 눈과 귀가 존재하네.”

조금은 무섭다.

이래서 대통령도 함부로 하지 못했던 것일까?

“자네가 나를 보는 이유도 알고 있어. 혼맥으로 이어진 우리를 이용해서 언론의 힘을 쥐려는 속셈을 말이야.”

“혹시 불쾌하셨다면 사죄드립니다.”

나는 빠르게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 여기서 괜한 짓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빠르게 인정해 버리는 게 나았다.

이런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자네 판단력이 상당히 빠르군.”

다행히 그가 불쾌해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들 영신그룹의 미래는 자네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야.”

“정말 그렇게 보고 계십니까?”

“눈과 귀 그리고 생각이 있다면 그 정도 판단은 해야 정상이지.”

“그, 그렇군요.”

“그래서 말인데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네.”

갑작스러운 박동진의 제안에 나는 의아해했다가 곧 뒤이어 들려오는 말에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내 손녀와 결혼하게.”

“예?”

“한보일보와 영신그룹은 애초에 혼맥으로 이어진 사이. 최근 그사이가 멀어졌지만 자네가 내 손녀와 결혼한다면 적어도 자네가 살아있는 동안 한보일보는 자네의 편이 될 게야.”

“저, 회장님.”

내가 뭐라 말하기 전에 그가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면서 제지했다.

“알고 있네, 자네가 지금 사귀고 있는 애인이 있다는 것을. 헌데, 그 애인이 비서라며? 그것도 김진철의 딸.”

“…그렇습니다.”

“연애는 누구와도 할 수 있다고 보네. 하지만 결혼은 달라. 심지어 자네는 영신그룹의 차기 총수가 될 사람이네. 자네 몸은 온전히 자네의 것이 아니야.”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다.

내가 가만히 있자 그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김진철의 딸보다 한보일보의 손녀가 사업적으로서 더 괜찮은 파트너가 될게야. 무엇보다 자네가 추진하려는 그 계획을 우리가 돕는다면 더 쉽고 빠르게 진행되겠지.”

가슴이 식는다.

더불어 머릿속도 빠르게 차가워졌다.

처음에 어떻게든 박동진과 한보일보를 우리 편으로 만들 생각으로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회장님.”

나는 박동진 회장을 또렷하게 쳐다보면서 말했다.

“회장님께서 저를 모욕 주신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건드리지는 마십시오.”

“나는 자네가 생각이 깊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아니었나?”

“아무래도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늘 일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뵙죠.”

그러고는 밖으로 나가려는데 뒤에서 박동진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 나가면 평생 후회할 일이 생길 수도 있을게야.”

협박.

여기서 흔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 2회차를 사는 나에게 이 정도 협박은 아무것도 아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나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 몸을 돌려 회장실을 나갔다.

그렇게 회장실은 고요함만이 감돌았다.

* * *

“그래서 한보일보 회장하고 척을 지고 온 거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이런 멍청한 놈!”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김진철 이시가 화를 벌컥냈다.

그런 그의 반응에 순간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이사님! 이럴 때는 이사님이 좋아해야 하시는 거 아닙니까?”

내가 뭘 잘못했나?

남자친구로서 김 비서를 지켰는데!

그런데 김진철은 달랐다.

“그래서 네가 멍청한 거다. 내가 말했지? 한보일보 회장이 꼰대 같다고. 그런 상황일 때는 일단 듣는 시늉이라도 했어야지!”

“하지만 이사님!”

나와 김진철 이사 사이에서 언성이 높아지려는 찰나,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두 분 다 그만들 하시죠.”

“박 팀장님.”

박준후 팀장이 나와 김진철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견원지간이 따로 없군요.”

“…….”

“두 분 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어느 한쪽도 정답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박준후 팀장은 현실을 직시했다.

“혼맥을 제안한 일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박동진 회장이 우리와 척지고, 앞으로 우리의 일에 훼방을 놓는다면 굉장히 골치 아플 겁니다.”

“젠장.”

머리가 아프다.

그저 나는 내가 지켜야 할 걸 지켰을 뿐인데 다가올 후폭풍이 거셌다.

“이번 일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합니다. 대표님께서 박동진 회장과 다시 한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보십시오.”

“그 사람이 다시 만나 줄까요?”

“안 만난다고 하면 어떻게든 만나게 해야죠.”

우리는 한동안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머리가 아파진 나는 잠깐 대화를 중단하고 밖으로 나왔다.

회사 옥상 휴게실로 올라온 나는 난간에 서서 바람을 쐤다.

멍한 얼굴로 눈앞에 전망을 바라보던 나는 곧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그렇게 잘못했나?”

이 상황이 조금 답답하다.

그래도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만약 그때로 또 돌아간다 해도 내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을 거야.”

“정말인가요?”

“응. 당연한 말을…… 헉! 김 비서?”

어느샌가 나타난 김 비서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달라진 분위기로 내 앞으로 걸어온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정말 그때로 돌아가도 변함없이 행동할 건가요?”

“어. 나한테는 김 비서밖에 없어.”

“고마워요.”

그녀가 내 품에 안겼다. 잠깐 내 품에 안겨 있던 그녀가 다시 품에서 벗어나며 말했다.

“미안해요.”

“뭐가 미안해. 김 비서가 미안할 것은 하나도 없어.”

“태훈씨. 아니, 지태훈 대표님.”

“음?”

또렷하게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태도에 순간 움찔했다.

“괜히 저 때문에, 발목 잡히지 마세요. 저는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어요.”

“뭐라고?”

마치 떠나려고 하는 사람처럼 이야기하는 김 비서의 태도에 순간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그런 말 하지 마.”

“대표님. 저도 대표님 좋아하고 사랑해요. 하지만 대표님의 앞날에 방해가 되는 건 싫어요.”

“그래서 나를 떠나겠다는 거야?”

“네.”

김 비서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나는 이제 화가 나려고 했다.

“김유리!”

“제 할 말은 여기까지예요.”

떠나려는 그녀를 다급하게 붙잡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몸을 돌리고 키스했다.

“……!”

퍽!

그녀가 나를 강하게 밀쳤다.

놀란 눈으로 나를 보는 그녀를 향해 내가 외쳤다.

“김 비서를 잃는 건 한 번이면 족해! 두 번 다시! 다시는 두 번 다시 김유리! 너를 잃지 않을 거야!”

“……!”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절대로 안 놔!”

“……태, 태훈씨.”

* * *

옥상 휴게실에서 두 사람의 상황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

바로 김진철이었다.

벽에 기댄 그는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한보일보 회장실이 발칵 뒤집혔다.

“박 회장님.”

“자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김진철 때문에 박동진 회장이 크게 놀랐다.

김진철은 박동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인 상태에서 말했다.

“회장님. 지태훈 대표와 저희 딸 사이를 가로막으셨다지요?”

“그저 현실을 말했을 뿐일세.”

“현실. 그래, 현실이라. 회장님께서는 이게 현실이었군요.”

고개를 들어 올린 김진철.

움찔.

그와 눈이 마주친 박동진이 기겁했다. 마치 포식자 같은 눈동자.

언제라도 눈앞에 있는 자신을 물어뜯을 것 같은 그 살벌한 기세에 천하의 박동진도 긴장했다.

“회장님. 아무래도 회장님께서는 후회할 짓을 저지르신 것 같습니다.”

“뭐, 뭣?”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상당한 거구의 그가 내려다보자 박동진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올려다봤다.

“우리 대표가 아직 모자란 부분들이 있지만, 제가 모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제 딸입니다.”

“그, 그게 뭐가 어쨌다는 겐가!”

“뭐긴 뭐야. 선 넘었다는 거지. 이 기레기 새끼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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