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경기장 한쪽에 위치한 치어리더석.
그곳에 고양 유나이티드 치어리더들이 응원하다가 앉아서 쉬는 곳이었다.
“요즘 언니가 이상해.”
“맞아. 자꾸 멍해 있어.”
허공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는 김현지를 함께 있던 다른 치어리더들이 숙덕거렸다.
“혹시 저 언니 연애하나?”
“에이, 설마.”
“우리 모르게 연애할 수도 있지. 알고 보니 박요한이 아니고 다른 사람 아니야?”
그때 숙덕거리는 치어리더들을 향해 어떤 인물이 끼어들었다.
“이상한 소리들 그만해.”
“앗, 지수 언니!”
최지수.
고양 유나이티드 치어리더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팀 내에서 맏언니로서 어린 치어리더들을 이끌었다.
“자꾸 딴소리하면 언니한테 혼난다?”
“앗. 미, 미안해요.”
“안 그래도 현지가 최근에 열애설 기사 때문에 고생한 거 알지?”
“……네.”
최지수는 팀 분위기를 바로 잡고, 김현지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현지야.”
“…….”
“현지야!”
“네,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아, 죄송해요.”
김현지가 얼굴을 붉히며 당황해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최지수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열심히 경기를 뛰는 박요한의 모습이 보였다.
‘헤~?’
최지수가 무언가를 눈치채고 씨익 웃었다.
“현지야.”
“네?”
“너 혹시 좋아하는 사람 생겼니?”
“예!? 에, 에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세요. 제가 무슨…….”
정곡을 찔린 듯 크게 당황하며 반응하는 김현지의 모습에 최지수는 작게 웃었다.
“누가 우리 도도하고 프라이드 높은 현지의 마음을 흔든 남자가 누구일까~?”
“어, 언니, 자꾸 이상한 말하지 마세요.”
“으이구~ 장난이야~”
사실 최지수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열애설 기사가 뜬 이후로 김현지가 자꾸 박요한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이 기지배! 그냥 얼빠인 줄 알았는데, 역시 너도 어쩔 수 없구나!’
순수한 사랑 앞에서는 외모고 뭐고 없었다. 그냥 내 마음이 끌리는 대로 갈 뿐이었다.
김현지도 그랬다.
“현지야. 언니가 충고 하나만 할게.”
“네?”
“사랑은 불 같은 거야. 언니 봐서 알지? 예전에 선수하고 사귀었다가 무참히 깨진 거.”
“…….”
“한순간의 불장난인지, 진심인지 잘 생각하고 결정하렴.”
“어, 언니도 참! 자꾸 뭐래요! 누가 보면 내가 언니처럼 선수 좋아하는 줄!?”
“어머, 애는. 그냥 내 경험담 얘기하는 거야. 혹시 찔리니?”
“아니거든요!”
화를 내면서도 은근슬쩍 박요한 쪽을 쳐다보는 김현지였다.
그런 그녀를 보는 최지수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 * *
한국 프로축구의 최상위 리그는 ‘K리그1’이다. 이 최상위 리그에 속한 12개 팀에서 뛰는 선수들은 그야말로 한국에서 축구 잘하는 선수들이 모두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지켜보는 입장에서 그렇지 않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야---! 이 쉐키들아---! 밥 먹고 공만 차는데 고거밖에 몬하나---!”
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어느 한 팬의 외침.
K리그에는 인기 있는 팀도 있지만, 반대로 인기가 없는 팀도 있었다.
그래서 팬이 별로 없는 경기장에서 조금만 목소리를 키워도 경기장을 뛰는 선수들에게 ‘매우’ 잘 들렸다.
‘아, XX. 답답하면 네가 뛰던가.’
경기에 집중해야 할 선수가 관중석에 있는 팬으로부터 직설적인 비난을 듣게 되면 힘이 빠지게 된다.
“왜 이렇게 골을 못 넣냐!”
“와~ 진짜 너는 원톱 공격수가 아니고 원톱 수비수다! 이 개발아!”
공격수의 경우, 조금만이라도 기회를 놓치면 엄청난 욕을 먹게 된다.
선수들에게 이러한 부분은 상당한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하지만 지켜보는 팬들도 스트레스 받는 건 당연했다.
팬들도 당연히 자기가 응원하는 팀과 선수가 잘 되기를 바랐다. 잘될수록 팬들도 스트레스가 풀리면서 동시에 자부심까지 얻는다.
물론 욕만 하는 경우는 없다.
“힘내라!”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응원한다!”
“잘했어! 잘했다고!”
팀이 패배했을 때, 선수들에게 응원하는 것도 팬들의 몫이다.
너무나 뼈아픈 패배에 고개를 숙인 그들을 향해 밝고 환한 얼굴로 뜨겁게 박수를 쳐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물론 한국 축구에는 K리그1만 있는 건 아니었다.
K리그1, 2까지 프로리그로 분류되며, K3, 4는 세미프로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K5, 6, 7은 아마추어 축구 리그로, 권역별로 리그를 치른다.
여기서 한국프로축구연맹이 K리그1, 2를 주관하고, 이 외의 다른 리그는 대한축구협회가 주관한다.
이것만 봐도 전국에 상당히 많은 축구클럽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장 아마추어 리그 최하위인 K7만 해도 정식 등록된 클럽만 해도 1,200개가 넘는다.
이 수많은 클럽에 ‘우리 팀’을 응원하는 팬들도 제각각이다.
고양 유나이티드처럼 많은 팬을 보유한 팀도 있지만, 반대로 팬의 거의 없는 팀도 있었다.
나의 사랑---! 천안---!
승리하자---! 천안---!
경기장을 울리는 목소리에 맞은편에서 지켜보던 상대 서포터스들이 웅성거렸다.
“저 사람 대단하다. 혼자서 쉬지 않고 계속 응원가를 부르네.”
가장 열렬한 팬들을 보유한 수원 블루의 서포터스들은, FA컵에서 만난 ‘천안 유나이티드’의 서포터스를 보고 가슴 뜨거움을 느꼈다.
조금은 급조한 티가 느껴지는 갈색 바탕에 호두과자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는 천안 유나이티드 유니폼을 입고 있는 이 서포터스는 혼자서 박수치고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백전노장처럼 팀을 응원했다.
그의 맞은편에는 최소 수천 명의 서포터스가 있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팀을 위해 일당백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팬의 의지를 느꼈던 것일까?
K4 소속인 천안 유나이티드는 오늘 분명한 열세였다. 경기장 내 스코어보드만 보더라도 충분히 드러나 있었다.
[수원 블루 4:0 천안 유나이티드]
전반에만 4골을 실점한 천안 유나이티드는 사실상 패색이 짙은 상황이었다.
충분히 힘이 빠질 만도 하건만, 그들은 단 한 명뿐인 팬의 응원을 들으며 이를 악물고 뛰었다.
그리고 그런 노력과 집념이 결국 결과물로 이어졌다.
출렁-.
수원 블루의 골망이 흔들렸다.
후반 30분.
천안 유나이티드의 공격수 이호재가 득점한 것이다.
득점한 이호재를 포함해서 선수들이 모두 한 곳으로 뛰어갔다.
단 한 명뿐인 서포터스가 있는 곳으로.
선수들은 그 팬을 향해 모두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런 선수들의 모습에 감격한 팬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는 더욱 뜨겁게 응원했다.
이런 천안 유나이티드의 모습은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고, 많은 이들이 보게 되었다.
경기가 끝나고 팀은 6:1로 대패했지만, 패배한 팀 선수들의 입가에는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상대 서포터스들도 그런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리스펙했다.
그걸 본 중계위원이 이렇게 코맨트를 남겼다.
『축구라는 스포츠 안에는 정말로 다양한 역사가 만들어졌는데요. 저는 이런 장면 또한 정말 축구가 보여줄 수 있는, 그리고 축구이기에 가능한 감동적인 역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상 오늘 중계 마칩니다. 위 아 더 K리그. 감사합니다.』
* * *
TH미디어의 플랫폼 사업은 활발하게 진행됐다.
이번 사업에서 강시윤PD는 핵심 인물이었다. 작정하고 준비한 이번 사업을 누구보다 가장 잘 이해하고 진행할 줄 알았다.
그런 그에게 힘이 되어주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뭐가 있을까 싶었다.
그렇게 떠올랐던 것은 인맥이었다.
마침 우리의 사업에 상당히 관심을 보이는 인물이 있었다.
강남의 어느 고급 일식집에서 그 인물을 만났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잘 지내셨죠?”
“물론이죠. 지 대표님께서도 잘 지내신 모양입니다. 얼굴색이 좋습니다!”
“하하하! 대표님도요!”
박종찬 코리아네트워크 대표.
이제 불혹의 나이를 넘긴 그가 이번 플랫폼 사업에 가장 큰 흥미를 보이는 인물이었다.
“이번에 재미난 일을 벌이신다고 들었습니다.”
싱글싱글한 얼굴로 말하는 그를 보며 나도 작게 웃어 보였다.
“재미난 일이죠.”
“미디어 플랫폼 사업이라니. 설마 대표님께서 OTT 쪽으로 관심을 둘지는 몰랐습니다.”
“조금 생뚱맞나요?”
“음, 언뜻 보면 그렇죠.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쪽으로 가는 것도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그런가요?”
“네. TH미디어를 설립하고 이후 K리그 미디어 중계권을 확보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걸 가지고 단순히 중계 용도로만 활용하기에는 너무 아깝죠.”
박종찬은 한 가지 상황만 보고도 다양하게 추리해서 말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제대로 보셨네요. 그래서 OTT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한국프로축구연맹과 대한축구협회 등과 현재 관련 사업을 협의해서 진행하고 있고, 거의 완료된 상황입니다.”
“오, 상당히 빠르군요.”
“이 사업을 추진하는 책임자가 상당히 역량이 좋더라고요.”
“아아. 혹시 강시윤PD?”
“아십니까?”
“알죠. 미디어 쪽에서 그분 모르면 미디어 사업한다고 말하면 안 되죠.”
“그 정도입니까?”
강시윤PD의 과거가 상당히 화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새삼 이렇게 이야기를 들으니 느낌이 새롭다.
박종찬도 상당히 본인 프라이드가 높은 편이다. 이런 사람이 누군가를 이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참 흥미로운 일이다.
“강시윤, 그 사람이 손을 댄 프로젝트는 거의 100%에 가까울 정도로 성공했죠. 하지만 상당히 또라, 아니 4차원 기질이 다분해서 본인에게 관심 있는 일이 아니면 아예 건드리지도 않는다더군요. 그래서 방송국 사장하고도 많이 싸웠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그랬군요.”
“그런 사람을 대표님께서 데려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가도 곧 이해를 했습니다.”
“네?”
“어쩌면 그 사람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대표님뿐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
“어쨌든 이번 OTT 사업도 상당히 기대됩니다. 두 분이 함께 만들어서 나온 결과물이 무엇이 나오든, 그건 상당한 이슈가 될 테니까요.”
“말씀 고맙습니다.”
박종찬이 운영하는 코리아네트워크가 진행하는 사업에는 정보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OTT에 사업에 필요한 각종 정보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플랫폼 지분 일부를 요구했다.
“이 사업의 핵심은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한 정보가 공유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저희가 도움을 드린다면 이 사업은 더욱 크게 성공할 겁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들이 요구한 지분은 딱 3%.
앞으로 제공하는 정보의 질과 양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면 적당한 거래라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함께하시죠.”
내가 손을 내밀자 박종찬이 웃으면서 내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코리아네트워크가 TH미디어의 핵심 협력사로 등장했다.
* * *
고양 유나이티드의 AFC챔피언스리그는 순항을 거듭하고 있었다.
치열한 접전을 예고하며 죽음의 조로 평가받던 G조는 예상과 달리 고양 유나이티드의 무지막지한 선전 속에서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었다.
『경기 끝났습니다! 고양이 조1위로 16강행을 확정 짓습니다!』
조별리그 5라운드, 우라와를 홈으로 불러들인 고양은 막강한 화력쇼를 선보이며 4:1 대승을 거두었다.
박형우와 호프만이 각각 득점과 도움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대승에 일조했다.
그리고 이 결과로 고양은 남은 경기 결과 상관없이 조 1위로 16강행을 조기에 확정지었다.
구단 역사상 첫 ACL 진출에 16강 진출까지 달성한 고양은 이렇게 또 새로운 기록을 작성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