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이걸로 오늘 일도 마무리됐네.”
또 하루가 끝났다.
일과를 마치고 슬슬 퇴근하려는데, 김 비서가 나에게 다가왔다.
“퇴근하시게요?”
“응. 김 비서는 퇴근 안 해?”
“해야죠.”
“그럼 같이 나가자.”
“네.”
내 말에 김 비서도 퇴근 준비를 했다.
“모두들 수고하세요.”
“네. 들어가세요, 대표님.”
직원들과 인사하고 퇴근한 우리는 길거리를 걸었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손을 맞잡고 걷기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김 비서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태훈 씨.”
“응?”
그녀의 부름에 다정하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태훈 씨는 혹시 저하고 결혼 생각이 있어요?”
“응?”
갑자기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그녀에게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나는 곧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응. 당신 같은 여자와 결혼할 생각이 없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당연하지.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
“그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쩐지 그녀가 즐거워 보였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다음 날, 3월 A매치 2번째 경기가 있었다.
『대한민국이 몰아붙이는데요. 아무리 상대가 예전과 다른 상황이라고 해도, 그 대단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이렇게 좋은 모습을 보이는 일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과 아르헨티나의 경기는, 홈팀 대한민국의 우세 속에서 진행됐다.
몇 번이나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며 아르헨티나를 위협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수비력에 골까지 만들지는 못했다.
『경기 끝났습니다! 대한민국과 아르헨티나의 경기는 득점 없이 0:0 무승부로 마무리됩니다!』
결국 두 팀의 경기는 무승부로 마무리되었다. 우세한 경기력을 보였던 대한민국은 아쉬움이 남은 경기였다.
그래도 이 경기에서 고양 유나이티드 소속 선수들의 활약은 눈에 띄었다.
오세진은 55분에 교체로 출전해서 약 40분 정도를 활약했고, 박요한과 정성진도 이날은 교체로 출전해서 약 30분 정도 활약했다.
그렇게 A매치를 마무리 지은 선수들은 기분 좋게 소속팀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자신의 국가대표팀에 간 외국인 선수들의 활약도 뛰어났다.
라시모프는 2경기 모두 선발로 뛰며 풀타임 활약했고, 필립 호프만도 선발로 출전했다가 80분쯤에 교체아웃 됐다.
“선수들의 활약이 좋네요. 이 기세로 리그와 아챔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네요.”
내 말에 곽찬구 감독이 가볍게 웃었다가 대답했다.
“A매치에 참여한 선수들의 체력 안배 차원에서 이번 주말 리그에서는 로테이션을 가동할 예정입니다. 바로 다음 주에 AFC챔피언스리그도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래도 이번 주말 리그와 아챔 모두 홈경기라서 다행입니다. 만약 원정이었다면 골치가 아팠을 겁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A매치 이후 우리는 리그와 아챔 포함해서 3연전이 예정되어 있었다.
조금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희 FA컵은 5월에 예정되어 있더군요.”
“네. 저희는 지난 시즌 챔피언 자격으로, 4라운드부터 참여하니까요.”
K리그의 FA컵은 1라운드 아마추어 클럽과 K3,4 리그 클럽들 중 32개 팀이 맞붙고, 승리한 팀들이 2라운드에서도 32강전을 벌인다. 2라운드부터 K리그2 소속 하위권팀이 참여하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K리그1 팀들은 3라운드 16강전부터 참여하는데, 지난 시즌 K리그1 상위권 팀과 챔피언 팀은 4라운드 8강전부터 참여한다.
그래서 우리는 디펜딩챔피언 자격으로 4라운드부터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 FA컵은 시작부터 격변이더군요.”
“동의합니다.”
곽찬구 감독이 ‘격변’이란 단어를 사용할 정도로, 올해 FA컵은 예상치 못한 결과들이 나왔다.
“설마 2라운드에서 K리그2 팀들이 우르르 떨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이변의 시작은 K4 소속 경주FC였다.
경주FC는 1라운드에서 지난 시즌 K3 우승팀인 화성 유나이티드를 3:1로 격파하고, 2라운드에서 마주친 K리그2 부천을 2:1로 꺾고 3라운드로 올라갔다.
이어 K3소속 전북시민축구단은 2라운드에서 K리그2 경남축구단을 승부차기로 누르고 3라운드로 올라갔다.
이 외에도 K3, 4팀이 K리그2 팀들을 떨어뜨리면서, 2라운드에서 무려 5개의 K리그2 팀이 탈락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역대 최고로 많은 K리그2 팀들이 떨어진 셈이다.
“그런데 이게 의도적인 결과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의도적이라뇨?”
곽찬구 감독의 말에 내가 의아함을 드러냈다.
“올해 K리그2는 최대 4개 팀까지 승격할 수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1부에 올라오면 받을 수 있는 상금도 크다 보니, 실질적으로 FA컵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일부 K리그2 팀들이 경기를 던진 거죠.”
“그거 그럼 거의 조작이나 다름없지 않나요?”
“조작…… 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건 예의가 없는 거죠.”
“그렇죠.”
의도적으로 경기를 던져서 진거라면 문제가 있다.
“실제로 이번에 탈락한 팀들은 모두 비주전 선수들이거나 어린 선수들 위주로 출전했습니다.”
“흐음.”
“원래 FA컵에서 초반에는 비주전 선수들을 내보내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번에는 일부러 경기를 던진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달갑지 않은 시선들이 생겨 버렸죠.”
어떻게 보면, 메인스폰서가 바뀌면서 벌어진 악영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금 규모가 커지면서 좋은 효과도 있지만, 이번 일처럼 나쁜 효과도 만들어버린 셈이다.
“저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디펜딩챔피언 자존심도 있고, 대충하는 건 제 스타일이 아닙니다. 대표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죠. 그래서 감독님을 믿는 거고요.”
곽찬구 감독 같은 사람이 우리 팀 감독으로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최근 엄청나게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박요한.
그는 A매치를 끝내고 잠깐의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야~ 박요한이~ 엄청 잘 나가더라~”
“야, 오늘 한턱 쏴라~”
모처럼 만난 친구들이 박요한에게 한 마디씩 던졌다. 그런 친구들에게 그는 웃으며 반응했다.
“짜식들아. 오늘 이 형님이 쏜다!”
“오! 나이스! 형님만 믿습니다!”
박요한의 친한 친구들은 축구 선수가 아닌 일반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틈틈이 경기장을 찾아와서 박요한을 응원했다.
이번 A매치 경기도, 박요한이 국가대표에 뽑혔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부러 경기장까지 찾아와서 응원해줬다.
“야, 야, 너 이렇게만 활약하면 조만간에 너도 유럽 가는 거 아니냐?”
“유럽은 무슨. 이제 시작이야.”
“야, 내가 괜히 하는 말이 아니야. 지금 네 경기력 보면 가능성 있다니까!”
함께 밥을 먹던 친구들이 박요한의 유럽 진출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했다.
박요한은 그 말을 듣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유럽을?’
축구 선수라면 유럽에 있는 빅리그에서 뛰는 것을 원한다. 박요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주변에 워낙 잘하는 선수들이 많아서 그냥 마음속에 묻어둔 꿈이었다.
“야, 요한아. 너 유럽 가면 우리 잊으면 안 된다.”
“야, 나를 쓰레기로 만들지마라.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잊겠냐. 내가 진짜 유럽가면 너희들 오게 경기장 티켓 줄게!”
“오~ 야! 약속 잊으면 안 된다!”
“안 잊어! 내가 너처럼 막 까먹는 사람은 아니거든?”
“뭐? 하하하하! 새끼!”
그렇게 친구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낸 그는 해가 저물어질 때쯤 헤어졌다.
“벌써 들어가냐?”
“어쩔 수 없다. 다음에 보자.”
“그래. 그럼 조심히 들어가라.”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때, 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야! 김현지!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뭐래! 자꾸 이런 식으로 불러내지 말라고! 우리 사이 끝났어!”
카페 앞에서 어떤 남녀가 다투고 있었다. 박요한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려고 했는데, 슬쩍 본 여자의 모습이 낯익었다.
‘현지 씨잖아?’
고양 유나이티드와 계약한 치어리더로 경기장에서 종종 본 적 있는 김현지였다.
‘뭐지? 남자친구인가?’
SNS 100만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는 김현지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는 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고성이 오가는 말다툼 속에서 남자가 힘껏 손을 올렸다.
“꺅!”
김현지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비명을 질렀다.
그때, 박요한이 그런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
남자는 눈을 부릅뜨며 박요한을 쳐다봤다.
김현지도 눈을 감았다 떴다가 앞에 있는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바, 박요한 선수님?”
박요한은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세상이 어느 땐데 길거리에서 남자가 여자한테 폭력을 씁니까?”
“이, 이 새끼! 이거 안 놔?”
박요한은 선수다.
신체적인 면에서 적어도 눈앞에 있는 남자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박요한이 잡고 있던 팔을 밀치자 남자가 휘청이다가 넘어졌다.
“아이쿠!”
박요한이 고개를 돌려 김현지에게 말했다.
“현지 씨, 괜찮으세요?”
“네. 괘,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에 박요한이 다시 남자를 노려봤다.
“여기서 크게 일을 벌리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꺼지시죠.”
“젠장!”
남자는 욕설을 내뱉더니 곧 자리를 떠났다.
“현지 씨.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게…….”
김현지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도망간 남자는 그녀가 지금처럼 뜨기 전에 잠깐 만나서 사귀었던 남자친구라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오더니, 저한테 돈을 빌려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거절했는데도 계속 연락이 와서 더는 안 된다고 하니까 저렇게 반응하네요.”
“고생하셨네요.”
“아니에요. 제 업보죠. 오늘 도움 주셔서 감사해요.”
“뭘요. 그건 그렇고, 댁이 어디세요?”
“네?”
“혹시 모르니까 제가 동네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저 이 동네 살아요.”
“어? 저하고 같은 동네분이셨네요. 저는 00아파트인데.”
“어? 저도요. 00아파트 102동.”
“정말요? 저는 104동이요.”
“와!”
알고 보니 박요한과 그녀가 같은 동네 아파트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두 사람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래서 치어리더를 하게 되셨군요.”
“네. 요한 선수님은요?”
“선수님이라고 하니까 기분이 이상하네요.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마침 박요한과 김현지 모두 동갑이었다.
“그럼 우리 친구 할까요?”
“그럴까요?”
“그러자.”
“좋아.”
아파트에 도착할 때쯤엔 두 사람은 서로 친구가 되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 혹시 그 나쁜 놈 또 보게 되면 나한테 바로 연락해.”
“응. 오늘 너무 고마웠어.”
밝은 얼굴로 인사하고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박요한은 살짝 웃었다.
그리고 곧 박요한도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런 두 사람의 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다.
찰칵.
“오케이. 건수 챙겼고.”
사진기를 들고 두 사람을 찍던 남자가 씩 웃었다.
그리고 이틀 후, 기사 하나가 떴다.
【단독】국가대표 출신 A선수, 소속팀 치어리더와 열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