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야! 야!”
“으음. 뭐야.”
“새끼, 아직 정신 못 차렸네? 얼른 안 일어나!”
눈을 뜬 내 앞에 낯설지만 익숙한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뭐, 뭐야?”
내가 왜 여기에?
“뭐긴, 뭐야. 가서 청소해!”
눈앞에 모자를 쓴 교도관이 잔뜩 신경질적인 얼굴을 드러내며 나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잠깐 멍하니 있던 나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서 바닥에 떨어진 빗자루를 손에 쥐고 터덜터덜 앞으로 걸어갔다.
“여기는 내가 회귀 전에 있었던 교도소인데…….”
설마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일이 모두 꿈이었던 건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머릿속이 조금 혼란스러운데, 누군가가 나를 툭 밀쳤다.
“어이, 재벌가 도련님?”
“……너는.”
“뭐야? 그 표정은? 하~ 본인이 아직도 재벌가 도련님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머리를 빡빡 밀은 덩치 큰 이 남자. 뺨에 칼자국까지 있어서 인상은 상당히 험악했다.
“기억났다. 너, 박윤태구나.”
죄수번호 852번, 박윤태.
내가 교도소에 수감된 이후, 지독할 정도로 나를 괴롭혔던 악질.
기억 속에 잊고 지냈던 나는 놈의 얼굴을 보던 순간 그간의 기억이 다시 살아났다.
“눈빛 봐라?”
퍽!
놈이 나를 발로 힘껏 찼다. 순간 휘청거렸지만 버텼다.
그걸 본 놈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어쭈? 감히 버텨?”
“후후.”
나는 작게 웃으면서 빗자루를 쥔 손에 힘을 줬다.
그러고는 곧 빗자루를 휘둘러서 놈의 머리를 가격했다.
빡!
“큭!”
놈이 머리를 감싸 쥔 사이, 정강이를 후려쳐서 넘어뜨렸다.
넘어진 놈의 위에 올라탄 내가 멱살을 잡고 살벌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네놈을 모를 줄 알아? 너 이 새끼, 지태완하고 한배잖아, 어!”
“그, 그걸 어떻게!?”
당황한 놈의 얼굴.
이 녀석이 지태완과 한배라는 걸, 회귀 전에는 뒤늦게 알았다. 하지만 알고도 외면했었다.
믿고 싶지 않았었으니까.
그리고 형이 뭐 때문에 자신을 이렇게 괴롭힐 거냐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지태완은 이런 놈이었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런 식으로 비겁하게 남을 괴롭히고 죽였다.
“당장 너를 이 자리에서 죽일 수도 있어.”
싸늘한 내 말에 그가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켰다.
“하지만 나는 널 죽이지는 않을 거야. 내가 널 죽이면, 나는 그 새끼하고 똑같은 놈이 될 거니까.”
“과연 그럴까?”
“뭐?”
멱살을 잡고 있던 놈의 얼굴이 갑자기 기괴하게 뒤틀렸다.
그러더니 곧 놈은 지태완으로 바뀌어 있었다.
“네놈도, 결국 똑같이 될 거야.”
“개소리 집어치워!”
벌떡!
“헉!”
꿈에서 깼다.
“꿈이었구나.”
주변을 둘러보니 내가 쓰는 침실이었다.
“태훈 씨. 괜찮아요?”
내 옆에서 자고 있던 김 비서가 일어나더니 걱정스러운 얼굴을 드러내며 반응했다.
“괜찮아. 잠깐 좀 이상한 꿈을 꿨을 뿐이야.”
“태훈 씨.”
그녀가 나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자 나는 점점 진정할 수 있었다.
“유리야.”
“네?”
“오늘 형을 만나러 가는 날이지?”
“네. 맞아요.”
젠장. 하필, 이런 날에 거지 같은 꿈을 꾸네.
* * *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서울 구치소.
그곳에서 나는 수감 중이던 지태완을 만났다.
“내가 형을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나를 찾은 이유가 뭐냐?”
“그냥. 어쩌면 오늘이 형을 보는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수감 생활 중임에도 불구하고, 지태완은 여전히 뻔뻔하고 살아있는 눈으로 나를 대하고 있었다.
“형. 어쩌다 우리 사이가 이렇게까지 됐을까?”
“어설픈 우애를 다질 생각으로 온 거라면 돌아가라. 너하고는 할 말 없으니까.”
“오해하지 마. 나도 형하고 애써 형제의 우애를 되찾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충돌하면서 조용히 불꽃이 튀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죄를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해.”
“…….”
“물론 이런다고 해서 형벌이 낮아지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쥐똥만큼 남은 형제의 마음으로 이야기해 주는 거야. 마지막으로 인간의 도리를 지키자. 형.”
그렇게 말하는 나를, 지태완이 가만히 쳐다보더니 이내 실소하며 말했다.
“혼자 깨끗한 척하는 거냐?”
“깨끗한 척하는 거라니. 그런 섭섭한 소리를. 나, 영신그룹 망나니야. 근데 그거 알아?”
“…….”
“나는 망나니인데, 형은 그런 망나니보다 더 심한 쓰레기야.”
쓰레기라는 말에도, 그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나를 내치고 네가 그룹 회장 자리를 차지한다고 한들, 달라질 것은 없을 거다. 오히려 너는 더 큰 위협을 받겠지. 네가 과연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지금 내 걱정해 주는 거야? 거, 참. 고맙네. 근데 말이야. 그건 형이 신경 쓸 부분이 아니야.”
“지금은 잘난 듯이 있겠지.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을 거다.”
“알아서 생각해. 그래도 내가 형보다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형, 죗값은 잘 치러.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볼일은 없을 거야.”
“지태훈.”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지태완이 나를 불렀다.
“너도 결국 영신그룹 사람이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
* * *
아르헨티나 대표팀이 친선경기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여기가 한국이구나.”
“강철인의 나라야.”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일부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한국을 ‘강철인의 나라’로 알고 있었다.
그런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향해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런 기자들을 통제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아르헨티나의 코치 티아고였다.
“자자, 인터뷰는 한 분씩 해주세요. 거리는 좀 벌려 주시고요.”
대한축구협회에서 파견 나온 관계자들과 협조해서 기자들과 간단하게 인터뷰 시간을 가진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이후 지정된 호텔과 훈련장으로 향했다.
“반갑습니다.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최명준입니다.”
“반갑습니다.”
이번에 새롭게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된 최명준이 훈련장에서 아르헨티나 대표팀 관계자들을 맞이했다.
“혹시 부족한 부분들이 있으면 기탄없이 이야기해 주십시오. 하하.”
“알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르헨티나는 리오넬 메시라는 세계적인 선수가 은퇴한 이후 변화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문제는 긍정적인 변화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매번 문제로 삼는 세대교체 실패.
아르헨티나 축구협회의 문제.
그 외에 국가 경제 위기 등이 맞물리면서 현재 자국 대표팀의 상황이 예전만큼 좋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이번 아시아 팀들과 A매치를 치르는 것도 협회 차원에서 돈을 벌기 위해 왔다고 볼 수 있었다.
협회 재정이 심각한 수준이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에서 상당한 수준의 대전료를 지급한다는 말에 뒤도 안 돌아보고 수락한 것이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선수들의 훈련을 지도하던 티아고 코치가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말하고 자리를 이탈했다.
건물 안에 있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온 그는 누군가와 마주쳤다.
훤칠한 키에 상당히 잘생긴 동양 남자였다.
티아고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그 남자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깜짝 놀란 티아고가 반응했다.
“괜찮으십니까?”
“읏.”
남자는 금방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더니 곧 자리를 떠나 버렸다.
“뭐지?”
어리둥절한 티아고였다.
* * *
헉. 헉.
이게 뭐야?
『이태수 감독, 부디 우리나라를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가 월드컵을 우승하다니!』
눈앞에 있는 남자가 영상 속에서 이태수를 끌어안고 눈물을 줄줄 흘리는 모습이 나왔다.
“지난번과 같은 상황인가.”
미래가 보이는 영상.
지난번 이태수를 봤을 때 겪었던 그 영상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퍼즐 맞추기도 아니고.
이번에 2번째로 본 영상인데, 도무지 뭐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다.
나한테 이런 영상이 보여지는 이유도 모르겠고.
“지 대표. 여기 있었구만. 응? 안색이 왜 그런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석정원 회장 옆에는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최명준이 함께 있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 대표님.”
“반갑습니다.”
최명준 부회장이 나를 꼭 만나고 싶다는 요청을 받고 만나게 됐다.
오랜 기간 대한축구협회에서 다양한 행정 업무를 맡아오던 그는 최근 인사 개편을 통해 부회장으로 올라온 인물이었다.
“여기 최 부회장은 상당히 유능한 인물일세. 아마 두 사람이 서로 좋은 관계를 맺는다면 앞으로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게야.”
“아유, 회장님. 저는 아직 많이 모자랍니다. 이렇게 칭찬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석정원 회장의 칭찬에 최명준이 쑥스러워하며 반응했다.
근데 어째서인지 그런 그에게서 나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 위화감을 애써 넘기며, 우리는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지 대표님. 최근에 K리그에 많은 투자를 해주셔서 리그 발전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젊은 나이에 이렇게 할 수 있는 분은 지태훈 대표님이 유일할 겁니다.”
오, 이 사람 참 말 잘한다.
혓바닥에 기름이 발라져 있나 싶을 정도로.
이런 아부성 멘트에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가 금방 흘려넘겼다.
“한국 축구의 힘은 K리그에서도 나오지만, 국가대표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투자를 원하십니까?”
조금 머뭇거리는 그에게 투자 이야기를 꺼냈다. 곧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지더니 이내 손을 내저었다.
“아, 그, 국가대표에도 많은 관심을 달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렇군요.”
아무래도 다짜고짜 돈 달라는 이야기는 하기 어렵겠지.
그때, 석정원 회장이 끼어들었다.
“지 대표. 최근까지 대한축구협회에는 각 연령별 대표팀이 운영 중이네. 성인 대표팀 외에도 U12부터 미래가 유망한 어린 선수들의 성장을 이끌 수 있는 힘이 필요하네.”
“그렇군요.”
“관심이 있다면, 아니, 자네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이들을 이끌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보는데…… 한번 생각을 좀 해주시게.”
결국 이들은 내가 K리그를 넘어 국가대표 영역까지 영역을 넓혀서 활동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승낙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지금 하는 일만 해도 상당히 처리할 게 많았으니까.
그래도 단칼에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조금 생각해 보죠.”
“고맙네.”
* * *
김유리는 사내 여직원들과 함께 티타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애가…….”
“이번에 유치원 보내려는데 어디가 좋을까요?”
“학원은…….”
사내에는 정소영 부장을 포함해 유부녀 여직원들이 몇 명 있었다.
원래 계약직 직원들이었지만, 지태훈 대표의 과감한 결단으로 이들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임신과 출산으로 경력 단절을 우려했던 그들은, 지금 그 누구보다 충성심을 갖고 일하고 있었다.
그런 유부녀 직원들 틈에 껴있던 김 비서는 조용히 차를 홀짝이며 마셨다.
그런 그녀에게 정소영 부장이 씩 웃으며 말을 걸었다.
“김 비서님.”
“네?”
“요즘 좋을 때죠?”
“풉! ……네? 뭐가요?”
“에이, 알면서.”
정소영 부장의 짓궂은 질문에 김유리는 조금 당황했다.
“아~ 나도 결혼 전에 전남자친구하고 정말 뜨겁게 보냈는데~”
“네? 전남친이요?”
“네. 지금은 우리 애아빠가 된 전남친이요. 깔깔깔.”
“…….”
유부녀들만 할 수 있는 농담에 김유리는 무어라 반응할 수 없었다.
“김 비서님은 좋겠네요~ 남자친구가 대표님이라서.”
“뭐, 네. 예. 좋아요.”
이미 언론 발표를 통해 두 사람이 사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사내 직원들은 눈치껏 모르는 척하면서 되도록 두 사람의 일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은 편이었다.
“비서님은 대표님하고 결혼할 생각도 있으신 거죠?”
“그… 렇죠?”
“어? 비서님이나 대표님 나이 정도 되면 결혼 생각하고 만날 텐데. 대표님은 아무 말도 없어요?”
“으음.”
머뭇거리는 김 비서의 반응에 유부녀 직원들이 눈을 빛냈다.
“어머! 어머! 대표님께서 설마 우리 비서님 마음도 몰라주고 그런 건 아니겠죠?”
“그건…….”
“비서님! 비서님이 움직여서 대표님을 잡아야 해요!”
“네?”
“결혼할 땐, 여자의 역할이 제일 중요해요! 아무리 대표님 같은 분이라도, 비서님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어요!”
“아.”
“물론 비서님이 그간 대표님 관리를 잘해 왔으니까 믿어 의심치 않지만, 결혼 선배로서 조언하는 거예요. 비서님이 대표님 꽉 잡아야 해요!”
순간 기세에 눌린 김유리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