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늘 그래왔듯, 이번에도 2028 K리그1 개막전에서 이변이 발생했다.
『‘2:0 승리’ 고양 유나이티드, 개막전에서 울산 모터스 격파!』
고양 유나이티드가 개막전에서 지난 시즌 디펜딩챔피언 울산을 격파한 이후, 전주에서도 이변이 벌어졌다.
『‘대역전 승’ 서울, 전주 원정에서 3:2 대역전!』
지난 시즌에 이어 올해도 강력한 우승 경쟁 후보로 꼽히던 울산과 전북이 나란히 개막전에서 패했다.
지난 시즌 후반기에 무섭도록 치고 올라오던 서울 드래곤즈의 화력은 이번 개막전에서도 선보였다.
전반전 0:2로 끌려가며 어렵게 경기를 풀어나가던 서울은, 후반전에 3골을 몰아치며 대역전을 만들어 냈다.
이어서 승격팀의 반란도 있었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 K리그2 우승하며 승격에 성공한 부산이 홈에서 수원을 1:0으로 꺾었다.
이렇게 1라운드부터 이변이 속출한 가운데, 새로운 시즌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 *
마케팅팀의 신진호 과장.
그는 지금 어떤 사람과 만나고 있었다.
“부탁드립니다. 이번 저희 홈 경기 행사에 꼭 참여해 주세요.”
“저 같은 늙은 사람이 그곳에 나와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죠! 그리고 늙었다뇨. 여전히 음악에 대한 열정과 패기는, 젊으십니다! JK라이언 님.”
“아하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3라운드에 치러질 홈 개막전 행사에 초대할 가수들을 섭외하기 위해, 신진호 과장이 직접 움직였다.
개막전 섭외 가수 후보에 오른 인물에는, 신진호 과장이 오랜 기간 팬으로 좋아했던 라이언JK도 있었다.
00년대부터 대한민국 힙합계에 파란을 일으켰던 레전드였다.
신진호는 이 사람을 영입하기 위해 직접 움직였다.
그리고 그를 처음 만난 순간, 자신은 성공한 덕후라는 것을 실감했다.
“라이언JK 님. 저는 오랜 기간 당신의 팬이었습니다. 이걸 보세요.”
“어?”
가방에서 잔뜩 꺼낸 앨범CD들.
“이건 나도 없는 앨범인데? 와우, 이걸 가지고 있다고요?”
“네! 제 인생 명곡들이 가득 담긴 앨범입니다.”
“그래요?”
“이것 말고도, 1집, 2집, 그리고 3.5집. 아, 여기 또…….”
라이언JK는 진심으로 감동한 얼굴을 드러냈다.
‘처음에 연락이 왔을 땐, 그냥 적당히 둘러대고 거절하려고 했는데…….’
이미 잡혀 있는 일정들이 있었다.
그 일정들을 취소하는 것보다 고양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맞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찐팬이 이렇게 찾아와서 간곡히 부탁하니, 라이언JK도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좋습니다. 그쪽 제안을 받아들이죠.”
“엇. 정말입니까?”
“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제 친구들도 같이 무대에 오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 말에 신진호가 기대가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JK패밀리인가요?”
“네, 맞아요. 잘 아시네요.”
“당연히 알죠. 찐팬인데!”
JK패밀리는 라이언JK를 중심으로 뭉친 힙합 크루로, 한 시대를 풍미한 래퍼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저희 친구들이 요즘 일감이 많이 떨어져서요. 이 친구들도 함께 무대에 오를 수 있으면, 저도 흔쾌히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걱정 마세요! 이미 대표님께서도 OK해 주셨거든요!”
“……네?”
어리둥절한 라이언JK에게 신진호가 빠르게 말했다.
“대표님께서 이왕이면 JK 님 포함해서 JK패밀리를 모두 데리고 오라고 하셨거든요! 안 그래도 그 부분도 여쭤보려고 했었는데, 잘됐네요!”
“…….”
“그럼 모두 함께하는 걸로 알고 진행하겠습니다! 페이는 모두 넉넉하게 지급될 거고요!”
그렇게 라이언JK와 그 패밀리들의 홈개막전 무대 섭외가 완료되었다.
“아~ 해냈다!”
섭외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신진호. 기분 좋은 얼굴로 다시 구단 사무실로 돌아가려는데,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네, 부장님. 네. 네? 아, 넵. 알겠습니다.”
천지원 부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은 그가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대표님께서 갑자기 나하고 식사하자는 이유가 뭐지?”
* * *
“아, 부담 갖지 말고 먹어요.”
“아, 넵.”
“한잔 받으세요.”
“네.”
나는 신진호 과장과 단둘이서 식사하며 술을 마셨다.
그는 조금은 어색한 모습으로 나에게서 술을 받고 마셨다.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죠?”
“아, 넵.”
“혹시 불편하세요?”
“아, 아닙니다. 불편하다뇨. 그저, 음, 이렇게 대표님하고 단둘이서 밥하고 술 먹는 일은 처음이다 보니, 조금은 어색하네요. 하, 하하.”
“그렇군요.”
어색할 만하지.
나 같아도, 한 회사의 대표하고 갑자기 뜬금없이 둘이서 밥 먹자고 하면 많이 어색할 것 같았다.
“회사 업무는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괜찮다라…… 혹시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신진호는 젓가락을 놀리며 음식을 먹으려다가 멈추고 대답했다.
“으음. 예전보다 다양한 기획을 해볼 수 있어서 업무 경험치가 한층 더 높아질 수 있고, 팀원들도 대부분 긍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함께 협의해서 진행하고 있고요.”
“그렇군요.”
“이번에 홈개막전에 있을 공연 기획도 팀원들이 모두 기대와 열의를 안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좋네요.”
“모두 대표님 덕분이죠. 다른 구단들 상황을 들어보면, 늘 정해진 패턴 속에서 기획하고 마케팅을 진행해야 하는데, 저희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워낙 자유로우니까요.”
나는 마케팅팀에게 최대한 높은 자유권을 보장했다.
자고로 마케팅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기획이 이루어져야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케팅은 흡족할 만한 결과물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합당한 기획이라고 판단되면, 요즘은 예산도 넉넉히 주고 있었다.
“마케팅팀에서 잘하고 있으니까 저도 잘해 드리는 거죠.”
“하하, 그런가요?”
나는 씩 웃으며 그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오늘 이렇게 신 과장님하고 만나자고 한 건, 제가 좀 더 신 과장님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아서요.”
“네? 저에 대해서요?”
“네. 고양 유나이티드가 이렇게 커질 수 있었던 이유에는 우리 신 과장님의 노력과 헌신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생각보다 너무 과장님께 소홀히 대접한 게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들어서요. 늦게나마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대표니임!”
내 말에 신진호가 감동한 얼굴을 드러냈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가볍게 미소를 드러냈다.
‘박준후 팀장이 아니었다면 신진호 과장하고 이렇게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을 거야.’
박준후 팀장은 지난번 부장단과의 회식에 이어, 이번에는 신진호 과장과 단둘이 식사 시간을 가져보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그러면서 그가 이렇게 말했다.
“신진호 과장은 겉으로는 사람이 가벼워 보여도, 분명 능력은 있는 사람입니다. 천지원 부장이 괜히 마케팅팀 2인자로 생각하는 게 아니죠. 그 사람도 대표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할까요?”
이미 신진호 과장도 내 사람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되묻자, 박준후 팀장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릅니다. 확실하게 마음을 잡을 수 있을 때 잡아야지만 대표님의 사람이 됩니다.”
이런 박준후 팀장의 조언이 있었기에 나는 이렇게 신진호와 만나서 식사하게 된 것이다.
나와 신진호 과장은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눴다.
술도 어느 정도 들어가니, 이전보다 어색한 분위기도 많이 없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신진호가 말했다.
“대표님이 정말 부러워요.”
“네?”
“대표님은 다 가지셨잖아요. 재벌가 사람인데다, 젊은 나이에 능력 있는 회사 대표에, 거기다 김 비서님 같은 멋진 여자분을 여자친구로 두고, 얼굴도 잘생겨, 하~ 정말 이건 소설 속에서 있을 법한 주인공이잖아요.”
“…….”
“저희 남자 직원들끼리 있을 때 대표님을 얼마나 많이 부러워하는지 몰라요. 뭐, 그래도, 서로 주제파악은 하고 있지만요. 흐흐.”
나는 조금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어렸을 때부터 익숙하게 겪어왔던 일이었다.
사람들은 나의 보여지는 모습만 볼뿐, 그 안에 내가 어떤 생각 하며 사는지 관심 없었다.
혹자는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하지만, 그런 일을 겪는 당사자인 나는 썩 유쾌하지 않다.
“신 과장님도 재벌이 되고 싶으십니까?”
“재벌…… 음, 아니요.”
“……?”
“저는 돈 많은 백수가 되고 싶네요. 아, 건물주! 그래, 건물주가 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술에 취한 그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말했다.
“건물주라…….”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이게 그들에게는 현실이고 삶이다.
나하고 다른 부분들이지만, 결코 꿈꿀 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한잔하시죠.”
“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술이 쓰면서도 묘하게 달다.
* * *
다음 날.
“대표님, 팝업스토어도 모두 준비됐습니다.”
“오!”
“가 보시겠습니까?”
“당연히 가야죠.”
유지원 부장의 말에 나는 반색했다.
팝업스토어는 구단이 만든 상품들을 판매하는 구단 공식 상점이다.
이미 해외 유수의 구단들은 이 팝업스토어를 적절히 활용해서 상당한 매출을 내고 있었다.
우리도 팝업스토어가 존재하기는 했었는데, 거의 간이매대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경기장을 새롭게 리모델링하면서, 팝업스토어도 새롭게 오픈했다.
원래 경기장 오픈 때 함께 오픈하려고 했지만, 팝업스토어 내부 인테리어 작업과 물품 수급 등을 이유로 오픈이 조금 늦어졌다.
“오오!”
팝업스토어 앞에 도착한 나는 눈을 반짝였다.
팀 컬러를 상징하는 노란색의 외부 벽에는 우리 팀의 주요 선수들의 사진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종류별로 정돈된 상품들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유니폼, 굿즈 외에도 구단 엠블럼이 박힌 생활용품들도 준비 완료했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스토어 오픈은 언제부터 진행할 예정이죠?”
“예정대로 구단 홈 개막전에 맞춰 진행할 예정입니다.”
오픈을 앞둔 팝업스토어와 관련해서 광고도 진행했다.
“구단 공식SNS는 물론이고, 기자들을 섭외해서 기사까지 모두 업로드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팀은 하나씩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흡족한 미소가 절로 나온다.
“태훈 씨.”
팝업스토어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김 비서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환한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피로가 확 풀렸다.
“왔어?”
그녀의 손을 자연스럽게 맞잡으며 말을 걸었다.
“팝업스토어 보고 오신 거예요?”
“응. 잘 만들어졌더라고.”
“다행이네요.”
그녀와 손을 맞잡고 길을 걷던 나는 잠깐 발걸음을 멈췄다.
한줄기의 바람이 불어와 내 머릿결은 가볍게 흔들고 지나갔다.
“김 비서?”
“네? 아, 네.”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김 비서에게 씩 웃어 보였다.
“설마 지금 반했던 거야?”
“……네. 반했어요.”
“…….”
솔직한 그녀의 말에 이번에는 내가 괜히 부끄러워졌다.
“김 비서. 괜찮으면 우리 저녁 먹으러 갈까?”
“좋아요.”
“지금 퇴근할까?”
“아직 시간 많이 남았는걸요?”
“왜, 대표가 조금 일찍 퇴근하겠다고 하는데, 누가 말리겠어?”
당장이라도 김 비서와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김 비서는 단호했다.
“안 돼요. 저도 태훈 씨하고 있고 싶지만, 먼저 할 일은 하고 해야죠.”
“끄응.”
“대신 오늘 일 잘 끝내면…….”
“잘 끝내면?”
쪽.
“……!”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가 내게 입맞춤을 했다.
“이것보다 좋은 선물 줄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나는 멍한 얼굴로 한동안 손으로 입을 매만졌다가 화들짝 놀랐다.
“이, 이것보다 더 좋은 게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