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천 부장님, 나는…….”
“맥주 나왔습니다.”
말을 하려다가 직원이 맥주를 가져다주는 바람에 말이 끊겼다.
잠깐이지만 어색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걸 정소영 부장이 맥주잔을 들어올리며 전환시켰다.
“대표님! 우리 맥주부터 마셔요~”
“그러죠.”
우리는 각자 앞에 놓인 맥주를 손에 쥐고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그러고는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크으.”
시원하다.
잠깐이지만 갈증마저 해결되는 것 같다.
“천 부장님.”
“예.”
“제가 영신그룹 회장으로 간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건…….”
천 부장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정소영 부장이 화들짝 놀라면서 끼어들었다.
“대표님! 진짜 영신그룹으로 가시는 거예요!?”
“…….”
“대표님 가면 우리 팀은 어떻게 해요!”
진짜로 떠나면 붙잡을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정소영 부장이다.
“정 부장님. 대표님은 어디 안 가실 겁니다.”
“정말요?”
“네. 대표님이 여기를 두고 어떻게 가십니까.”
천지원 부장의 말에 그녀가 안도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피식 웃었다.
“맞습니다. 제가 어디 가지는 않을 겁니다.”
“……!”
“대신 영신그룹이 저한테 오겠지만요.”
“예?”
두 사람이 어리둥절해했다. 그때, 주문했던 마른안주가 나왔다.
먹태 하나를 손으로 집어서 입에 넣고 씹으면서 말했다.
“영신그룹을 TH투자회사에 편입할 겁니다.”
“예!?”
내 말에 두 사람이 경악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네. 제가 뭐, 여러분들에게 이런 걸로 거짓말해서 뭐 하겠습니까?”
“허.”
천지원 부장은 입을 벌렸고, 정소영 부장은 눈만 끔뻑거렸다.
“이미 관련해서 작업은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TH투자회사는 영신그룹의 중심 계열사로 활약하게 될 겁니다.”
물론 계획대로 된다면 말이다.
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김진철 이사나 박준후 팀장이 외부에서 힘을 쓰고 있고, 강민수 사장처럼 내부에서 힘을 쓰는 이들이 있었다.
지금 다른 형제들도 나처럼 후보에 오른 상태지만, 영신그룹 내에서 나에 대한 지지가 상당하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최선을 다해 현재 맡은 임무를 수행해주시면 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굳건해야 앞으로 더 많은 결과물을 만들어 내거나 가져올 수 있고요.”
내가 믿고 일을 맡길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 나와 함께 하는 눈앞에 있는 이 사람들이 중요했다.
“지금처럼 저를 믿고 함께 가주시면 됩니다.”
내 말에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희는 계속 대표님을 믿고 갈 겁니다.”
“맞아요! 저희가 아니면 누가 대표님을 위해 일하겠어요!”
“비록 먼저 집에 돌아갔지만, 유지원 부장님도 저희와 같은 생각일 겁니다. 그분도 늘 대표님에 대한 신뢰로 가득했으니까요.”
조금 감동했다.
나를 향한 그들의 신뢰가 진심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나는 잔을 쥐고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들도 잔을 쥐고 들어올렸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려요!”
그날, 나는 신나게 달렸다.
* * *
경기도 수원에 있는 영신전자 본사.
본사 1층 로비에서 두 명의 직원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거 들었어?”
“뭘?”
“오늘 지태훈 대표가 여기로 온데!”
“뭐? 진짜야?”
“어! 내가 방금 이야기 듣고 왔다니까!”
그때였다.
로비 1층 전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지태훈이다!”
누군가의 외침.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지태훈과 그 일행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 엄청 잘생겼어.”
“저 기럭지 봐.”
“포스가 장난 아니야.”
가장 맨 앞에 선 지태훈과 그 뒤에 김유리 비서와 김진철 이사 그리고 용준형 사장과 박준후 팀장에 천지원 부장까지 있었다.
그들 모두 고양 유나이티드 엠블럼이 가슴에 붙어 있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로비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강렬한 햇빛이 그런 그들을 내리쬐면서 자연스러운 후광이 그들을 감쌌다. 그 모습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사로잡혔다.
그런 그들 앞으로 강민수 사장을 비롯한 영신그룹 관계자들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십시오, 지태훈 대표님.”
“반갑습니다, 강민수 사장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이쪽으로.”
강민수 사장에게 직접 안내받아서 들어가는 지태훈 일행이었다.
그런 그들을, 아까 대화를 나눴던 직원들도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에서 한 직원이 말했다.
“나, 방금 본 거 같아.”
“뭐를? 뭘 봤는데?”
“전대 회장님. 아니, 전전대 회장님이지.”
“지종윤 회장님?”
“어. 와, 지태완 회장에게도 못 느껴본 저 회장님 포스, 진짜 지렸다. 지렸어.”
비단 이 직원만 느낀 게 아니었다.
로비에서 상황을 지켜본 모든 이들이 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회장님의 재림.’
단순히 생김새가 닮아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대기업의 총수라면, 그 특유의 포스가 존재했다.
그 포스는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포스를, 지태훈에게서 느낀 직원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고 있었다.
* * *
강민수 사장을 비롯한 영신그룹 주요 관계자들이, 영신전자 본사에 모두 모였다.
그 모습을 본 김진철 이사가 한마디 툭 던졌다.
“사장단이 이렇게 모인 경우는 드문데 말이야. 전대 회장님이 있을 때도 이렇게 모였던 적이 있었나.”
“전대 회장? 지종윤 회장님은 전전대 회장이다만?”
영신전자 사장 민제국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하자, 김진철이 코웃음을 쳤다.
“흥, 그 범죄자가 무슨 회장이라고. 나는 회장으로 인정한 적이 없어서 말이다.”
“김진철!”
“왜, 한 대 치겠다? 아니면 나하고 지금 나가서 스파링 한판 할까? 네가 날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이런 개……!”
“조용히 하시죠.”
폭탄이 터질 것 같은 상황 속에서, 나의 한 마디에 일순간 모두가 조용해졌다.
“오늘 우리는 싸우러 온 게 아니지 않습니까. 민 사장님, 김 이사님. 진정하시지요.”
“…….”
두 사람이 움찔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정리가 된 것 같군.
“자, 서로 갈 길 바쁜 사람들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나는 그렇게 말하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강민수 사장에게 신호를 줬다.
“흠흠. 네. 오늘 이렇게 지태훈 대표님을 모시게 된 건, 향후 영신그룹 차기 총수 후보로서 면접을 보기 위해 모셨습니다.”
무슨 대기업 회장 뽑는데 면접이냐고 묻겠지만, 이미 나 말고 다른 형제들도 모두 이 면접을 봤다고 한다.
전대미문의 초유의 상황을 겪게 된 영신그룹 이사회에서 최대한 공평하게 진행하기 위해 채택된 방향이었다.
“대표님은 현재 ㈜TH투자회사의 법인 대표이며, 휘하 계열사로 고양 유나이티드, TH건설, TH미디어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대표님께서 영신그룹의 회장직에 오른다면 이 기업들을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흐음.”
나는 손으로 턱을 가볍게 매만졌다.
“지금 그게 저한테 어울릴 질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예?”
“반대로 제가 묻죠. 제가 회장직에 오르면 영신그룹의 기업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
사장들이 눈을 크게 떴다.
그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역질문이었다. 충분히 당혹스럽겠지.
그중에서 민제국 사장이 가장 격렬하게 반응했다.
“지태훈 대표! 지금 이 자리가 장난이라고 생각합니까?”
“장난? 저는 진지합니다.”
“뭐, 뭐요?”
“영신그룹. 저는 ㈜TH투자회사의 대표로서, 영신그룹을 인수합병할 생각이니까요.”
“……!”
사장들의 반응이 참으로 격렬하다.
그중에서 몇몇은 당장이라도 뒷목잡고 쓰러질 것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속에서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사장단 인원들 중에서 유일하게 강민수 사장만 멀쩡했다.
이미 그는 사전에 이야기를 마쳤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 그도 이 이야기를 듣고 놀라자빠졌다.
대기업을 인수합병한다는 발상 자체가 그들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이 방법은 최적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었다.
현재 영신전자는 영신그룹 재벌가 인원들이 장악하고 있고, 다른 계열사들은 이 영신전자가 지주회사로 일정부분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겉으로 보면 크게 문제없어 보이나, 자세히 속을 뜯어보면 상황이 미묘하게 달랐다.
영신전자가 각 계열사에 보유한 지분률은 최소 3% 최대 22%까지 큰 차이를 보였다.
여기에 아버지가 보유한 개인 지분까지 더해 그룹이 움직였다.
박준후 팀장의 말에 의하면, 지금까지 아버지가 최대한 중심을 잘 잡으며 운영했기에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태완이 회장이 되면서, 무리하게 지주회사로서 지분률이 높고 본인에게 충성하는 주력 회사 위주로 개편을 시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회귀 전에 내가 없는 상태에서 지태완은 아버지로부터 온전히 회장직을 넘겨받아서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회귀 후에, 아버지가 보유한 개인 지분을 지태완이 상속받지 못했다.
이러다 보니, 지태완 개인 지분과 지주회사의 지분으로만 회사를 운영해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지태완이 반쪽짜리 회장이라는 말이 나왔다.
자신을 지지해준 사장단들이 있었지만, 그들 또한 자신들이 가진 이권을 위해 움직였을 뿐 진정으로 지태완에게 충성을 다한 것은 아니었다.
막상 그가 회장이 된 이후, 잦은 이권 다툼으로 그룹은 더욱 혼란해졌다.
결국 이런 모든 상황이 중첩되어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영신그룹은 고이고 썩었습니다. 회장이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간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썩을대로 썩은 그룹의 현 상황을 고스란히 드러냈다고 봅니다.”
“…….”
“그룹이 당장 망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이대로 둔다면 천천히 썩어서 없어지겠죠.”
사장들이 웅성거렸다.
“지 대표!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심한 말이 아닙니까!”
“이 정도로 심하게 느껴지시면 곤란합니다.”
아직 그들은 정신 차리지 못했다.
누군가 이런 우둔한 이들을 깨워줄 사람이 필요했다.
“저는 기업을 이끄는 경영인이기 전에, 돌아가신 지종윤 회장님의 막내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유산이 망가지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에게 부탁했다.
회사가 망하지 않게 해달라고.
아버지의 유언을 무시할 정도로 나는 썩은 아들이 아니었다.
“현재 영신그룹에게 가장 필요한 건, 이 모든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혁신적인 개혁입니다! 이 개혁을 주도하려면, TH투자회사를 중심으로 모든 시스템을 개편해야 합니다!”
어차피 큰형에 대한 복수는 끝났다.
이제 아버지가 남기신 유산을 지키고, 더 나아가 기업을 경영하는 경영인으로서 나는 더욱 크게 나아가야 한다.
“제가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사장들을 쭉 훑어보았다.
사장들이 긴장한 얼굴로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분은 저와 함께 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이미 이곳에는 거대한 파도가 휩쓸고 있었다.
* * *
고양 유나이티드는 그 어느 때보다 상당히 좋은 분위기를 타고 있었다.
“이제 이 라커룸을 나가면 새로운 시즌이 시작하는 거야.”
주장 김지우가 라커룸에 모인 선수들에게 힘주어 말했다.
선수들도 주장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재작년보다 작년이 더 좋았어.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작년보다 더 좋은 올해야.”
주장의 말에 선수들의 심장이 점차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토록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단연코 우리가 원팀이기 가능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올해도 우리는 원팀으로, 우리 앞에 장애물들을 하나씩 이겨내고 나아간다. 알겠지?”
“오!”
“자, 그럼 우리 다 같이 힘내보자! 오!”
“오오오오오!”
주장의 일장연설에 선수들이 격하게 반응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곽찬구 감독이 지난 일을 떠올렸다.
“감독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데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냐.”
“저, 올해가 마지막일 것 같습니다.”
“……뭐? 정말이냐?”
“네. 그래서 올해 제가 가진 모든 걸 걸고 뛰어볼 겁니다.”
태훈컵이 끝나고 선수단이 잠깐 휴식을 취하는 동안, 김지우가 곽찬구 감독에게 은퇴 의사를 내비쳤다.
곽찬구 감독은 김지우가 이미 은퇴와 관련된 부분을 재계약 전에 구단과 나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에게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었다.
“구단과 우선 내년까지 뛰는 걸로 이야기된 걸로 아는데.”
“고민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자꾸 드네요.”
“팀 동료들에게는 어떻게 말할 거냐.”
“때가 되면 말하겠습니다. 그때까지 감독님과 저만의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후우. 그래, 알겠다.”
파주FC 감독 시절 때부터 지켜봐왔던 김지우가 그라운드를 떠날 준비를 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감독으로서, 스승으로서, 그의 각오를 어지럽힐 생각은 없었다.
“마지막까지 부탁한다.”
“네. 인생 걸고 끝까지 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