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제가 위협을 받는다고요?”
강민수가 코웃음을 쳤다.
이 사람, 아직 현실 파악을 못 한다.
“사장님께서 이미 저와 접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블랙리스트에 올라갔을 겁니다.”
“블랙리스트라니. 시대가 어느 때인데 그런 저급한 짓거리를 하겠습니까?”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가 당했죠.”
“…….”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지태완으로 인해 모두 피해를 봤습니다. 최근에 태조건설의 이진호 회장 아들 이태수도 선수에서 은퇴할 정도로 사고를 당했죠.”
“그게 정말입니까?”
이태수 사건은 대기업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일이었다.
강민수는 그저 이 사건이 불행한 사고 정도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 사고를 일으킨 주범을 저희가 데리고 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군요. 만약 대표님이 주장하시는 부분이 사실이라면, 그 사람을 바로 경찰에 신고했어야죠.”
“세상이 녹록지 않습니다. 어설프게 경찰에 넘겼다가 살해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
이미 앞선 과정에서 증인들이 죽어 나가는 경험도 했다. 일부러 이명훈을 베트남까지 보낸 것도, 애써 확보한 증거를 잃지 않기 위함도 있었다.
“강민수 사장님.”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두 눈을 바라봤다.
“이건 결코 장난이 아닙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제 손을 잡으세요.”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아니오. 경고이자 유일한 선택지를 제공해 드리는 겁니다.”
“…….”
“이제 1년도 안 남으셨죠?”
강민수가 사장 자리에서 내려올 시간은 고작 1년도 남지 않았다.
올해 10월이면 옷을 벗고 내려와야 한다.
어차피 강민수는 지태완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와 있을 것이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순간, 그는 지태완에게 제거될 확률이 높았다.
“한 가지 물어보죠.”
“네. 말씀하십시오.”
그가 굳은 얼굴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저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태완을 처단해야 하니까요.”
“…….”
“내부적으로 지태완을 흔들어줄 세력이 필요합니다. 영신 그룹의 덩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하고, 그 거대 기업을 이끄는 지태완의 위치는 대통령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한 위치를 자랑합니다.”
지태완이라는 괴물을 상대하려면 결코 혼자서 상대할 수 없다.
회귀했다고 만능은 아니다.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 다양한 분야에 속한 사람들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내 간절한 부탁에 강민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가 눈을 뜨고 닫았던 말문을 열었다.
“대표님께서는 지태완을 밀어내면 스스로 회장이 되실 생각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당신은 지태완과 똑같은 사람이지 않습니까?”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똑같은 사람이라.
이토록 신념이 강한 사람에게는 나도 지태완과 똑같이 보일 수도 있겠구나.
허나, 여기서 인정해 버릴 수는 없다.
내가 인정하는 순간, 그는 나를 지태완과 똑같은 놈으로 인정할 거니까.
“저도 한 기업의 수장입니다. 계열사가 무려 3개나 있죠.”
고양 유나이티드, 영신건설, TH미디어.
내가 보유한 기업들.
이 기업들을 이끌면서 스스로 많은 성장을 이루었다.
“지태완이 연못에서 용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 저는 강제로 바다로 나가서 다양한 세상을 경험하고 왔습니다. 이 차이가 저와 지태완의 차이겠죠.”
“…….”
강민수가 입을 다물었다.
대(大)영신 그룹을 연못이라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지태완은 영신 그룹 바깥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연못에서 뛰어노는 잉어 정도 수준인 셈이다.
반면, 나는 바다에서 다양한 적들과 마주하며 성장했다.
영신 그룹이 가진 연못의 크기가 다른 연못에 비해 크더라도, 결국엔 연못에 불과했다.
바다를 경험한 나와 같을 수는 없다.
“연못과 바다라. 거 참.”
강민수가 허허 웃었다.
“정말 먼 옛날 초대 회장님을 보는 것 같군요.”
“…….”
“좋습니다. 협력하죠.”
강민수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순간 긴가민가했다. 뭔가 좀 더 그와 신경전을 벌일까, 조금은 조마조마했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마무리된다고?
“사실 진철이, 아니, 김 이사와 마지막으로 만나던 날, 대표님과 협력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
“그런데 김 이사가 그러더군요. 마지막에는 대표님을 만나보라고. 그렇게 말하고 헤어졌는데,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럼 박준후 팀장은…….”
“아마 김 이사에게 사전에 연락받았겠죠.”
그렇구나.
모든 게 이미 짜여진 상태로 움직였었구나.
“불쾌하셨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다만… 김 이사님이 왜 저를 만나보라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단순히 앞으로 함께 할 사이라서 만나보라고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칭찬을 많이 하더군요. 예비 사위가 능력이 있으니 잘 부탁 한다고 했고요.”
“뭐라고요!? 그 말씀 진짜인가요?”
순간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왜 그러시죠?”
“그, 김 이사님이 저한테 예비 사위라고 했나요?”
“아, 예. 그랬습니다만…….”
갑자기 가슴이 벅차올랐다.
김 이사님…… 저 무진장 싫어하시는 줄 알았어요.
“아, 아무튼! 예비 사위로서 열심히 해야죠!”
“하하. 김 이사가 저에게 그랬습니다. 대표님께서 능력이 있으니, 향후 미래가 기대될 거라고.”
“…….”
“김 이사의 안목은 회장님 못지 않게 좋습니다. 김 이사가 지태완을 그토록 반대했던 것도, 어쩌면 그 안목에 영향을 받았던 거겠죠.”
“그렇군요.”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순간 병실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던 김 비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영상을 통해서 본, 그녀가 처했던 암울한 상황이 겹쳐졌다.
최악의 상황을 막고자 여기까지 왔었는데, 그게 모두 도루묵이 될 수는 없다.
“강 사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죠.”
그렇게 강민수 사장이 우리 세력으로 합류했다.
* * *
태훈컵이 끝났다.
초대 태훈컵의 주인은 고양 유나이티드가 차지했다.
마지막 경기에서 전북을 4:2로 꺾은 고양 유나이티드가 승점 9점 전승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태훈컵이 끝나고 다양한 뒷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고양 이번에도 ㅈㄴ 잘할 거 같은데? 이 정도면 리그 우승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호프만 ㄹㅇ 잘하더라.
-아직 시즌 제대로 시작도 안했는데 설레발 ㄴㄴ 시즌 해보고 판단해야 됨.
-고양이 주전 멤버들만 보면 우승 전력이기는 한데 로테가 많이 약하지 않나?
-이번에 아챔 병행해야 하는데, 로테 못돌리면 힘 빠질 수 있음.
-나는 생각이 좀 다른데. 작년에 고양이 보여준 폼이 그대로 유지만 된다면, 여기에 새로 영입한 선수들 있으니까 충분히 우승 경쟁도 가능하다고 보는데?
-나도 윗댓하고 같은 생각임. 최소 트로피 하나는 노려볼만한 전력인 건 확실함.
-ㅇㅈ.
고양 유나이티드에 대해서는 대체로 호평이 많았다.
반면, 전북은 시즌 개막이 오기도 전부터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박정혁 제발 나가줬으면.
-타팀 팬으로서 박정혁 종신! 정혁 종신! 정혁 종신!
-전북 개못하던데 ㅋㅋ
-선수를 그렇게 사줘도 감독이 제대로 못 쓰네.
-작년에 어떻게 아챔 우승했냐?
-황진용 선수 불화설 있던데, 시작부터 ㅈㄴ 불안하네.
-작년 아챔 우승팀이 1무 2패라닠ㅋㅋ 실환가 ㅋㅋㅋ
아무리 친선대회라고 해도, 지난 시즌 아시아를 제패한 팀이었다.
그런 팀이 1무 2패로 가까스로 최하위를 면한 건 너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전북 감독 박정혁도 대회가 끝나고 사죄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렇게 다양한 뒷말을 남긴 태훈컵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 * *
대회를 마치고 나는 곽찬구 감독과 이야기를 나눴다.
“대회 우승을 축하드립니다. 감독님.”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아직 이적시장 기간이 남아 있는데, 대회를 치러보니 부족한 부분들이 있던 것 같았나요?”
“음. 공격 보강은 많이 진행돼서 걱정이 없었는데, 문제는 수비 쪽이었습니다.”
“여전히 문제가 많나요?”
“백업 골키퍼의 영입은 필수입니다. 그래도 수비수는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네. 종수가 드디어 포텐이 터지려는 기미가 보입니다.”
“오.”
라시모프와 계속 짝을 이루었던 중앙 수비수 백종수.
곽찬구 감독이 부임한 이후, 지속적으로 선발 기회를 부여받았던 선수였다.
그전까지 어린 유망주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많은 출전을 통해 경험을 많이 쌓았다.
하지만 틈틈이 노출되는 불안정한 수비 때문에 팬들은 백종수를 대체할 라시모프의 짝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단 내부에서도 백종수의 대체자를 고심하고 있었다.
그랬던 백종수가 이번 태훈컵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고양이 3전 전승을 달성할 수 있었는데는, 라시모프와 백종우가 철벽 수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뒷문이 단단하니 공격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수비수라는 포지션이 잘 드러나지 않은 위치이기는 해도, 백종수가 성장했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럼 수비수 영입은 조금 시간을 두고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네. 일단 종수를 믿고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곽찬구 감독은 전반기까지 상황을 지켜보자고 이야기했다.
“좋습니다. 그럼 박지원 골키퍼를 백업할 수 있는 백업 골키퍼 영입에 집중하죠.”
“네.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그날 일을 마무리하고 슬슬 퇴근하려고 준비하는데, 느닷없이 나에게 연락이 왔다.
* * *
베트남, 하노이.
하노이 번화가에는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가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 틈에서 한 남자가 뛰어가고 있었다.
“거기서!”
뛰어가는 남자 뒤로 일단의 남자들이 쫓고 있었다.
‘이런 XX!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아낸 거지!’
도망치는 남자는 바로 이명훈이었다.
김진철이 마련해 준 안전 가옥에서 죽은 듯 지내던 이명훈은 떨어진 생필품을 채우기 위해 동네 마트로 향했다가, 우연히 자신을 쫓는 명천파 조직원들과 마주쳤다.
이후 실랑이 끝에 가까스로 도망치게 된 이명훈은 사람들이 많은 번화가 쪽으로 뛰어가서 몸을 숨겼다.
“제기랄. 어떻게 저 녀석들이 왔는지 몰라도, 아주 날 죽이려고 작정을 했군!”
지태훈이 경고했던 부분이 맞았다.
명천파는 자신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래도 오랜 시간 조직을 위해 헌신했던 이명훈은, 이렇게 쉽게 버림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만나서 해명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마주친 명천파 조직원들은 들을 말도 없다는 듯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순순히 죽어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야.”
이명훈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연락책을 마련해 두었다.
그는 곧장 하노이 번화가에서 조금 외곽에 위치한 작은 상점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입니까?”
나이가 많은 한국인 사장이 땀을 잔뜩 흘리며 나타난 이명훈을 보고 놀랐다.
“지금 당장 한국에 연락해야 합니다! 빨리요!”
“자, 잠시만 기다리시오.”
연락책의 도움을 받아 이명훈은 겨우 한국으로 연락할 수 있었다.
전화 연결이 되자 그가 다급하게 외쳤다.
“지태훈 대표! 명천파가 나를 쫓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