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황진용은 전북에서 5년을 뛰었다.
원래 고양에서 활약했던 그였지만 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활약하는 김용수 감독의 눈에 띄어 전북으로 영입된 뒤 K리그 통산 163경기를 뛰면서 25골 19도움을 기록했다.
그는 주로 주전보다 교체 자원으로 활약하며, 팀이 필요할 때마다 제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팬들도 그런 그의 헌신을 알고 그를 존중하고 응원했다.
그런데 올 시즌이 끝나고 상황이 급변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팀에서 저를 방출할 생각이라뇨.”
“하아. 그게, 나도 너무 뜬금없이 소식을 들어서. 미안하다. 전달하는 나도 너무 황당하다.”
황진용은 자신의 에이전트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팀이 다음 시즌 자신과 동행할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계약기간 남았잖아요!”
“1년 남았지? 근데 이미 네 자리에 다른 선수 알아보는 모양이더라. 듣기로는, 무슨 외국인 데려온다던데.”
“말도 안 돼. 내가 그동안 해준 게 얼만데.”
당사자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지만, 황진용의 방출은 예고된 상황이기도 했다.
황진용의 활약으로 그토록 원했던 AFC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리그와 FA컵에서는 각각 울산과 고양에게 밀렸다.
특히, 시즌 막판 고양과의 경기에서 연속으로 패배하면서 리그와 FA컵을 모두 내준 일은 전북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문제는 그 경기의 패배 원흉으로 꼽히는 인물이 바로 황진용이었다는 점이다.
산드루가 부재한 상황에서 황진용이 홀로 팀을 이끌어야 했는데,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젠장!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보내는 건 말도 안 됩니다!”
“맞아. 이건 너무한 거야.”
황진용이 원한다면 계약기간이 끝날 때까지 팀에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팀에서 이미 자신을 전력 외로 구상했다면, 남아도 의미가 없었다.
벤치에라도 앉을 수 있다면 다행일 것이다.
“이종일 단장님은 아무 말도 없나요?”
“이 단장님은 굉장히 미안해하지. 자기도 박정혁 감독하고 구단 이사들의 판단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하아.”
이종일 단장은 김용수 감독과 함께 자신을 데려올 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었다.
김용수 감독이 떠난 이후, 이종일 단장은 수시로 황진용을 챙겨줬다.
“박정혁, X발, 진짜.”
사실 황진용은 박정혁 감독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내가 산드루보다 컨디션이 좋을 때도 나를 넣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나를 기용하다가 막상 결과가 망하니까 지금 와서는 책임을 회피해?”
박정혁 감독과 황진용은 서로 궁합이 맞지 않았다.
박정혁 감독은 포지션 경쟁자인 산드루를 주로 기용했다. 산드루가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도 황진용을 선발로 쓰지 않을 정도였다.
이와 관련해 감독과 면담도 진행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그는 납득할 수 없는 말로 자신을 달래려고 할 뿐이었다.
그렇게 보이지 않은 불만이 잔뜩 쌓여갈 무렵, 결정타는 이번 FA컵 결승전이었다.
당시 황진용의 몸 상태는 상당히 좋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아시아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부상을 당했던 그는, 부상에서 완치되지 못한 상태에서 박정혁 감독 때문에 강제로 FA컵 결승전까지 출전해야 했다.
지금도 부상에서 완치되지 못해서 계속 치료를 받던 중이었다.
“진용아. 이렇게 화만 낸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야.”
“하아.”
“어떻게 할까? 네가 원하면 이적을 진행할 수도 있어.”
황진용은 괴로워하며 마른세수했다. 그런 그에게 에이전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너한테 제안한 팀이 있어.”
“네?”
에이전트는 조금 망설였다가 말했다.
“고양 유나이티드.”
“…….”
그는 황진용의 분위기를 살폈다. 살짝 굳어진 얼굴을 본 그가 황급히 말했다.
“진용아, 있잖아. 내 얘기 좀 들어봐. 고양이 예전하고 달라. 네가 있었을 땐, 그 임태무하고 허재우가 있을 때였잖아? 근데 그놈들은 사라지고 없어.”
“형.”
“어, 어?”
“알잖아. 나 고양에서 진짜 개 같은 일 겪고 나온 거.”
“…….”
“고양이 구단주 바뀌고 달라진 건 아는데, 나 아직도 그때 기억이 떠올라.”
황진용은 얼굴을 찌푸린 채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고양은 절대 가지 않을 거야.”
“휴. 알았어.”
에이전트는 아쉬운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우리의 이적시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재까지 영입과 방출된 명단입니다.”
“흐음.”
나탈은 계약만료로 떠났고, 장현우는 도르트문트도 이적했다.
그 빈자리를 한석원의 완전 영입과 필립 호프만으로 채웠다.
“다른 영입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직 진행중에 있습니다만, 황진용의 경우 선수가 일단 거절 의사를 표했다는 에이전트의 연락이 있었습니다.”
“선수가 거절했다고요?”
“네. 그 선수도 허재우와 임태무가 만들어 낸 피해자였으니까요. 상당히 증오할 겁니다.”
유지원 부장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의 망령들은 계속 나오는군요.”
“어쩔 수 없지요.”
“뭐, 선수 본인이 거절했다면 어쩔 수 없죠. 우리 팀의 2선 자원은 이미 포화상태니까요.”
기존에 박형우, 오세진, 박요한에 한석원의 완전 영입과 필립 호프만까지 무려 다섯이나 된다.
박형우의 경우 필요하면 최전방으로 올라가서 활약하기도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스트라이커는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최전방 스트라이커와 중앙 수비수 그리고 골키퍼 정도가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현재 최전방 공격수는 사무엘이 유일했다. 하지만 사무엘의 경우 나이가 많아서 예전 같은 기량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지난 시즌에도 선발보다는 교체 출전이 더 많았다.
올해 35세, 한국 나이로 36세가 되는 그에게 매번 선발로 뛰게 하는 것은 부담이 된다.
그리고 중앙 수비수도 문제였다.
현재 믿을 만한 중앙 수비수는 라시모프뿐이었다.
재작년에는 백종수, 작년에는 김지우를 라시모프의 짝으로 내세웠지만 모두 케미가 좋지 않았다.
백종수는 경험이 부족했고, 김지우는 전문 수비수가 아니었다.
그래서 지난 시즌에도 의도치 않은 실수들로 인해서 실점을 당하는 경우들이 종종 나왔다.
마지막으로 골키퍼, 매년 든든하게 골문을 지켜주는 박지원이 있었지만 이제 그도 나이가 많았다.
골키퍼는 관리만 잘하면 30대 후반, 더 나아가 40대가 되도 뛸 수 있다고 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병행할 경기 숫자를 생각하면 믿을 만한 백업 골키퍼가 필요했다.
현재 팀에 있는 다른 골키퍼들은 아쉽지만 경기를 맡길 만한 실력은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이것 참, 골치 아프네요.”
“허허, 모두 팀을 위한 일이니 어쩔 수 없지요. 저도 백방으로 뛰어보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네.”
이런 일은 원래 단장이 맡아야 하는 부분이지만, 아직도 단장직이 공석이었다.
아무에게나 단장을 맡길 수 없었다.
단장직은 팀의 한 해 농사를 책임지는 위치다. 그저 자리를 채워야 한다고 아무에게나 맡겼다가 큰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하아. 고민이구만.”
여러 문제로 고민에 휩싸인 나를 향해 누군가가 다가왔다.
“괜찮아요?”
“아, 유리야.”
사장님 의자에 앉아 있던 나에게 그녀가 다가와 어깨 위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어깨라도 주물러 드릴까요?”
“그래 줄래?”
그녀가 내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잠시나마 힐링을 받았다.
“늘 고마워.”
“뭘요. 저도 도련, 아니, 태훈 씨가 늘 고마운 걸요.”
그녀의 말에 살짝 미간을 좁혔다.
“태훈 씨 말고 이제는 태훈이라고 부르면 안 될까?”
“그건…… 아직 어색해요. 미안해요.”
나는 잠깐 고민했다가 이내 씩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 안고 내 무릎 위에 앉히게 했다.
“어멋!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태훈이라고 부르거나 자기야 라고 부르면 놔줄게.”
“무, 무슨 그런……!”
“허어, 그럼 안 놔준다?”
김 비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시한폭탄 같은 그녀의 모습에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힘겹게 말했다.
“자, 자기야.”
“훌륭해. 자기.”
내가 씩 웃으며 웃어 보이자 그녀는 주먹으로 내 가슴을 때렸다.
하지만 주먹에는 전혀 힘이 실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크흠!”
“헉!”
깜짝 놀란 김 비서가 후다닥 내 품에서 벗어났다.
나도 흠칫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 천지원 부장이 멋쩍은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표님, 나중에 다시 올까요?”
“오호호! 마침 볼일 끝나고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천 부장님 얼른 일보세요!”
김 비서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둘만 남게 된 상황에서 나는 살짝 멋쩍은 표정을 드러냈다.
그런 나를 향해 천지원 부장이 말했다.
“한창 좋을 시기지요. 이해합니다.”
“크흠.”
괜히 부끄러워지네.
나는 급히 주제를 돌릴 필요를 느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좀 전에 TH건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공사가 거의 마무리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네. 예상보다 조금 빠르게 완료될 것 같답니다.”
“잘됐네요. 클럽하우스는요?”
“그것도 비슷하게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구장 리모델링과 클럽하우스 건설 모두 우리 구단에서 추진하는 주요 사업들이다.
다행히 큰 무리 없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필립 호프만과 관련된 용품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오, 얼마나 팔렸던가요?”
“기념 머플러의 경우 1만 장 모두 판매됐고, 기념 유니폼 3만 장도 모두 팔렸습니다. 이 외에 다양한 굿즈들도 거의 다 팔렸구요.”
“그게 다 팔렸다구요?”
“네. 심지어 추가 주문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물량을 추가로 생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단하다.
역시 월드클래스급은 다르구나.
박형우와 장현우가 월드컵에서 대활약하고 돌아와서 팔린 물량보다 더 대단했다.
우리 팀 팬들의 구매도 있지만, 해외 축구만을 보던 팬들의 구매도 이어졌다고 한다.
“해외 주문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기존에 독일에 있던 필립의 팬들이 구매하는 모양인 것 같습니다.”
기존에 없던 해외판매까지 발생하다니.
해외 유명 구단들은 이런 상황을 매일 겪고 있겠지?
“라 르 테일에 연락해서 추가 생산 들어가자고 이야기하세요.”
“물량은 어느 정도로 할까요?”
“뽑을 수 있을만큼.”
“알겠습니다.”
필립 호프만의 효과는 벌써부터 보이고 있었다.
우리에게 상당히 긍정적인 일이다.
힘든 일도 있지만, 그만큼 성과도 나와주고 있으니 다행이다.
“앞으로도 쭉 이렇게만 되어다오.”
간절하게 바랐다.
* * *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이번 1월 K리그 이적시장에서 기대 이상의 스토리텔링이 나오는 가운데, 팬들이 기대하는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태훈컵.
1월 말에서 2월 초 사이에 개최가 확정된 태훈컵은 원래 고양 별무리 경기장에서 진행하기로 됐지만, 고양 더블은행파크가 예정보다 빠르게 리모델링 공사가 끝나면서 장소가 그쪽으로 변경되었다.
사실상 더블은행파크의 개장 행사나 다름없는 태훈컵에는 쟁쟁한 팀들이 참여했다.
작년 K리그1 우승팀인 울산과 K리그1 2위 전북이 참여하는 가운데 FA컵 우승팀인 고양과 K리그2 우승팀인 부산이 참여했다.
지난 시즌 승격을 노렸다가 실패했던 부산은 이번에 리그 1위로 K리그1 다이랙트 승격에 성공했다.
이렇게 4팀이 풀리그로 경기를 치르고 순위를 매겨 우승팀을 가린다.
늘 비시즌 기간 활용이 애매했던 K리그 팬들에게는 기대되는 경기였다.
이미 이 경기를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 있는 K리그 팬들이 티켓을 끊고 고양시로 갈 준비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태훈컵 개막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