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그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우리는 그간의 아쉬움을 달래듯 뜨겁고 솔직하게 사랑을 속삭였다.
우리가 만들어낸 숨결은 태양보다 뜨거웠다. 그러면서도 작은 움직임도 세밀하고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열락의 파도가 휘몰아치는 순간, 우리는 그 누구보다 격렬하게 바뀌었다.
그렇게 서로를 뜨겁게 탐하던 우리는, 어둠 속에서 다시 밝은 빛이 솟아오를 때쯤 되어 다시 정신을 차렸다.
“처음이었어요.”
사랑의 속삭임이 끝나고, 내 품에 안긴 김 비서가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그런 김 비서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도련님과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은 흔들린다.
불안한 것일까.
하긴,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나와 그녀의 관계가 오늘부터 송두리째 바뀌는 거니까.
그래서 나는 더욱 그녀를 아껴주고 지켜줘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김 비서. 아니. 유리야.”
“……!”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널 반드시 지켜줄게.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너만큼은 반드시 내가 지켜줄거야.”
지금까지 김 비서가 나에게 해준 모든 것들을 떠올려보면, 나는 그녀에게 평생 갚아도 모자라다.
그런데 이제 내 여자가 된 이상, 나는 그녀를 죽어서도 지켜줄 생각이다.
“도련님.”
“쉿. 도련님이라 부르지마. 지태훈. 태훈이라고 불러.”
사소한 호칭 하나도 이제 다시 정립해야 한다. 비록 지금 당장 어색할지라도, 이제 달라진 관계는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녀도 그런 내 의지를 안 것일까?
어색하지만, 그래도 내 이름을 불렀다.
“태, 태훈 씨.”
그녀가 나보다 한 살 더 많다.
평생 존댓말을 사용하다 보니, 태훈이가 아닌 태훈씨로 불렀다.
얼굴을 붉히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가 사랑스럽게 느껴지면서도, 앞으로 바꿔나가야 할 과제들이 많다고 느껴졌다.
“사랑해. 김유리.”
* * *
휴가를 마치고 나는 다시 업무에 복귀했다.
“이렇게 뵙는군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모처럼 다시 만나는 박준후 팀장의 얼굴은 조금 초췌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김 이사님으로부터 이야기는 듣긴 했는데, 얼굴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덕분에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되었습니다.”
박준후 팀장은 우리의 도움을 받아 고양시로 완전히 올라왔다.
고향에 살던 가족도 신변문제로 모두 함께 데리고 왔다.
“저희와 있으면 아무리 형이라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그렇겠지요.”
짧게 대답하는 박준후 팀장의 두 눈이 번뜩였다.
“지금 영신그룹은 내부 일로 시끄럽습니다. 다른 일은 신경도 못 쓰겠지요.”
“뭔가 들으신 게 있으십니까?”
“지태완을 반대하는 내부 세력이 제법 큰 모양입니다. 현재 그룹 내에서 추진하는 사업들이 내부 반대로 무산되는 경우가 허다하더군요.”
“생각보다 그 안에서 많은 일이 벌어지는 모양이군요.”
김진철 이사나 용준형 사장으로부터 영신그룹 내부 일을 종종 듣고는 있었다.
그런데 박준후 팀장이 하는 말로는, 듣던 것보다 사태가 더 심각해 보였다.
“이 모든 일의 중심에는 대표님이 계십니다.”
“제가요?”
“네. 원래대로라면 그룹 전체를 본인 손에 쥐어야 했겠지만, 영신건설을 비롯하여 일부 계열사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잡음이 만들어졌습니다.”
“흐음.”
“그러면서 지태완과 같은 형제인 대표님께서 그룹에서 내다버린 영신건설을 다시 이끌어 올린 모습을 보고 지태완의 능력에 의구심을 품는 이들도 존재하게 됐고요.”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렇게 대단해 보였던 지태완이 이렇게까지 흔들리고 있다니.
“그자도 어차피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님께서도 충분히 지태완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본능적으로 이때가 기회임을 알았다. 이 기회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 의지를 박준후 팀장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부터 제가 돕겠습니다. 전대 회장님을 모셨던 모든 능력을 발휘해서 대표님을 돕겠습니다.”
박준후 팀장의 천명(闡明).
그 말에 나는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 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내 손을 맞잡으며 악수하는 박준후 팀장이었다.
그 순간, 나는 볼 수 있었다.
복수심에 불타는 박준후의 눈동자를.
* * *
나는 프랑스로 향했다.
“여기가 보르도구나! 와인이 그렇게 유명하던데!”
“도련, 아니, 태훈씨. 또 술이에요?”
“에이, 일하면서 분위기 좋은 와인 한잔 좋잖아~ 응?”
나는 김 비서와 함께 보르도에 도착했다. 이번에 고양이 진행하는 유럽 원정 친선 경기가 프랑스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예정보다 조금 더 일찍 프랑스로 왔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바로,
“형제여!”
칼리드 왕자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꽉 끌어안았다.
“아! 내가 사랑하는 형제여! 이렇게 보니 반갑군! 반가워!”
“그, 왕자님. 저 숨이 막히는데요.”
“아아! 미안하네! 내 우리 형제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서 말이야.”
칼리드 왕자는 누구보다 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왕자에게서 풀려난 나는 뒤에 서 있는 아흐메드에게도 짧게 인사했다.
“아흐메드 씨도 오랜만이네요.”
끄덕.
그는 목례로 대신 대답했다.
그 사이 왕자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영신건설. 아니, 이제는 TH건설이지? 정말, 기대 이상으로 일을 잘해주더군! 태조건설도, 다른 기업들도, TH건설을 따라오지 못해.”
“그렇습니까?”
“하하! 이번 사업 건으로 나바드 녀석의 가치는 내려가고, 나의 가치는 더욱 높아졌지!”
기뻐하는 칼리드 왕자를 보니 나도 흡족했다. 어쨌거나 나는 칼리드 왕자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고양 유나이티드를 단시간 내에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칼리드 왕자가 대준 밑천 덕분이었으니까.
그런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그런데 그와 이야기하다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왕자님. 한국어 잘하시네요?”
“아! 배웠네! 우리 형제하고 좀 더 깊은 관계를 형성하고 싶은 내 마음이네! 하하하! 어떤가?”
“와, 대단하시네요. 한국인인 줄 알았습니다.”
분명 마지막에 만났을 땐,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했던 칼리드 왕자는, 이번에 만났을 땐 굉장히 유창한 실력을 자랑했다.
“용준형 사장에게 괜찮은 한국어 선생이 없겠냐고 자문을 구했지, 그랬더니 꽤 실력 좋은 선생을 소개해 주더군. 덕분에 빠르게 습득할 수 있었지.”
한국어가 가능한 아랍 왕자라니.
나중에 용준형 사장으로부터 이미 중동에는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중동 사람들이 많아서 누구나 손쉽게 한국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한국어를 가르칠 때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요즘 상당히 잘나가는 이야기는 들었네.”
“모두 왕자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죠.”
“하하하! 자네는 참 말도 예쁘게 하는군!”
왕자로부터 성대한 대접을 받으면서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혹시 추가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하게. 최근에 사업도 잘 풀리고, 서열 싸움에도 여유가 생겨서 말이야.”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이렇게 된 건 다 자네 덕분인데.”
TH건설의 대활약 덕분에 칼리드 왕자의 입지가 상당히 좋아졌다.
사실 영신건설이었던 시절엔 무늬만 건설사 취급을 받았지만, 그 안에 인재들은 결코 수준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들에게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을 제공했을 뿐이다.
그런데 마치 잠재력 높던 유망주가 포텐을 터트린 축구선수처럼 개화한 것이다.
현재 TH건설은 중동에서 태조건설만큼 단시간 내에 인지도를 끌어올린 상태였다.
“건물도 빠르고 튼튼하게 짓고, 거기에 요즘 사람들 취향에 맞는 트랜드까지 완벽하더군.”
칼리드 왕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에게 추가 투자를 진행하려는데, 괜찮겠나?”
“네?”
“TH투자회사에 추가 투자를 진행하겠다는 뜻일세.”
“……!”
“자네도 상장 준비해야지. 안 그런가?”
상장.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보는 ‘기업 상장’.
하지만 상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장을 위한 과정은 상당히 까다롭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하지만 그 과정을 이겨내고 상장까지 이루어내면, 그 기업은 ‘진짜’ 기업이 된다.
칼리드 왕자는 나에게 ‘상장’을 주문하고 있었다.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인생에 타이밍이 있듯, 기업에도 타이밍이 있는 법이야. TH투자회사에도 슬슬 타이밍이 오고 있다고 봐야지.”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예전 같으면 무조건 OK를 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험이 쌓인 지금은 이 선택을 결코 쉽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몸소 깨닫고 있다.
“조금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좋네. 하지만 너무 긴 시간을 줄 수는 없을 거야.”
“알겠습니다.”
칼리드 왕자는 한손에 와인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자, 그럼 한잔하지.”
“예.”
서로의 잔 끝이 가볍게 부딪쳤다.
* * *
칼리드 왕자와 만나고, 김 비서와 아주 잠깐 프랑스 여행을 즐겼다가 선수단을 이끌고 온 곽찬구 감독과 만났다.
“감독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요. 대표님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비행기 하나를 통째로 예약한 덕분에 선수들은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편하게 프랑스까지 올 수 있었다.
“계약 문제 때문에 그러시죠?”
“네. 얘기는 들으셨나요?”
“네. 안 그래도 유지원 부장이 말씀하시더군요.”
곽찬구 감독과 계약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선수단 재계약은 모두 성공적으로 진행했지만 정작 중요한 코칭스태프 재계약은 아직 하지 않았다.
곽찬구 감독이 시즌이 끝난 뒤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요청했던 이유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감독을 믿고 기다렸다.
“혹시 재계약은…….”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전에 한 번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대표님께서 저를 먼저 내치지 않은 이상, 제가 먼저 떠날 일은 없을 겁니다.”
곽찬구 감독은 흔쾌히 재계약을 받아들였다.
“저는 이곳에서 지금 만족스럽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상승세인 팀을 두고 떠나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곽찬구 감독의 지휘 아래 팀은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더불어 결과까지 만들어 냈다.
이런 감독을 두고 다른 감독을 데려올 수 없었다.
다행히 곽찬구 감독도 나와 생각이 일치했던 모양이다.
“연봉과 보너스 모두 전보다 올라가긴 했는데, 부디 감독님께서 만족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대표님께서 백지 계약서를 내민다고 해도 저는 사인할 여지가 있습니다. 알아서 잘 챙겨 주시겠죠.”
곽찬구 감독은 망설임 없이 재계약에 사인했다.
감독의 사인을 시작으로, 다른 코치들도 모두 재계약에 동의했다.
그렇게 코칭스태프 재계약까지 마친 우리는, 그날 한국시간으로 저녁 시간대에 오피셜을 발표했다.
【오피셜】고양 유나이티드, 곽찬구 감독 포함한 코칭스태프 전원과 재계약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