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나는 백우진 전(前) 명예 회장과 스님이 마련해 준 손님 방에서 차를 마셨다. 백태현도 김 비서도 없이, 단둘이서만 말이다.
“둘만 이렇게 있으니 어색한가?”
“괜찮습니다.”
“모처럼 지가네 막내와 이렇게 둘이서 한잔하고 싶었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에 담긴 차에서 좋은 향기가 내 코끝을 자극했다.
“들게.”
“예.”
이름도 모르는 차를 한 모금 마시자 혀끝으로 묘한 맛이 느껴졌다. 뭔가 씁쓸한 맛과 달콤한 맛이 함께 느껴졌다.
“신기한 맛이네요.”
“표정을 보니 입에 맞나 보군.”
평소 눈매가 부릅뜬 기백 가득한 모습만을 보이던 백우진은 한없이 인자한 태도를 드러냈다.
“지가의 막내야. 회사 경영을 할 만하더냐.”
“뭐, 하던 대로 하는 거죠. 이제는 뒤로 빼고 싶어도 뺄 수도 없고요.”
“하하. 네가 제대로 경영하는 모양이구나!”
백우진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시종일관 미소를 보였다.
“회장님께서는 별일 없으시죠?”
“나이 많은 이빨 빠진 사자에게 별일이야 있겠느냐. 그저 하루하루 살아있으면 감사한 일인게지.”
“에이, 아직 정정하신대요. 뭘.”
“허허.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구나. 하지만 나도 세월의 흐름은 무시할 수 없더구나. 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마찬가지란다.”
내가 씁쓸한 표정을 드러내자, 백우진은 허허 웃었다.
“그리 나쁜 표정 지을 것도 없다. 어차피 모두가 받아들여야 할 세상의 법칙인 것을.”
“그래도 그간 세상에 보여 주신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회장님께서는 적어도 범인은 아니라고 봅니다.”
“허허허. 지가네 막내가 확실히 많이 컸구나. 그런 말도 다 할 줄 아는 걸 보니.”
백우진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가 내려놓으며 열린 문 사이로 밖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너로 인해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
“특히 우리 백가에게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지.”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태현이에게 회장직을 물려줄 생각이다.”
“……!”
그 말에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 백태현에게 천산그룹 회장직을 넘겨준다고?
“미리 작업은 끝났고, 조금 이따가 태현이에게 전달할 예정이다.”
“도대체…….”
“이게 네가 우리에게 끼친 영향에 대한 결말이다.”
나는 도무지 회장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자 백우진이 차분하게 말을 덧붙였다.
“너로 인해 태현이가 개과천선했다. 영신의 망나니와 천산의 망나니가 이토록 재능이 있을 줄은 미처 나도 깨닫지 못했던 부분이었지.”
“…….”
“태현은 이미 내게 후계자 교육도 받은 상태다. 회장직을 물려받을 준비도 어느 정도 끝났고.”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어차피 그릇이 되질 못한다. 애석하게도 천산은 영신과 다르게 그렇게 좋은 인물들이 많지 않거든.”
“그럴 리가요.”
“영신에는 지태완과 지태훈, 이 두명의 쌍두마차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태현이 하나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그렇게 말하던 백우진이 돌연 나에게 고개 숙였다.
“고맙네. 지가의 막내아들아. 내 평생 큰 은혜를 입었네.”
“헉! 이, 이러지 마십시오. 회장님!”
당황한 내가 허우적대자 백우진은 허허 웃어 보였다.
“자네가 우리 천산을 살렸어. 고맙네.”
그렇게 나는 생각지도 못한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와, 나도 그토록 이루고 싶었던 회장 자리를 백태현이 먼저 이룬다고?’
조금 부럽기도 했다.
“지가의 막내야.”
“네, 회장님.”
“너는 그 누구보다 그릇이 큰 사람이다.”
“…….”
“자고로 그릇이 큰 사람에게는 시련도 크게 오는 법이다. 네가 어떤 시련을 겪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알 수 있다. 네가 만만치 않은 시련을 겪었다는 것을.”
나는 그 말에 소름이 끼쳤다.
백우진이 가진 연륜은 내가 회귀 전에 어떤 일을 겪었다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본디 천산의 이름은, 하늘 높이 치솟은 산을 올라가 스스로 큰 인물이 되겠노라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하지만 그 이름대로 사는 사람은 없었지. 헌데…… 천산 밖에서 그런 인물을 마주하게 되는구나.”
“저를 너무 고평가해 주시네요. 저는 그냥 망나니입니다.”
“자네가 그저 망나니였으면, 세상 사람들은 뭐가 되겠나.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지게.”
나에게 해주는 말들이 너무 고마웠다.
“분명 먼저 하늘로 올라간 종윤이도, 너를 보며 안도하고 있을 게다.”
* * *
경주에서 첫날은 즐겁게 보냈다.
불국사도 다녀오고, 황리단길에 가서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맛집이 있으면 들려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밤이 되고, 나는 뜻밖의 일을 겪었다.
“김 비서. 왜 방이 하나야?”
“어쩔 수 없었어요. 저희가 급하게 잡고 내려 온 거라서 남은 방을 겨우 잡은 거거든요.”
보통 같으면 싱글룸 2개나 아예 스위트룸 같이 큰 방을 잡았을 테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있었다.
왜 김 비서는 이 이야기를 나한테 하지 않은 것일까?
“도련님. 혹시 저하고 함께 방을 쓰는게 불편하면 저는 차에서 잘게요.”
“미, 미쳤어? 가만히 있는 나를 갑자기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마!”
차에서 자겠다는 김 비서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방에 들어온 우리 사이에는 묘한 적막감이 흘렀다.
“흠흠. 침대도 하나네.”
트윈룸도 아닌 더블룸.
커다란 침대 하나가 놓인 방을 보니 나는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와, 어쩌지? 내가 밖에 나가서 잘까?’
속으로 별별 생각을 하고 있는데, 김 비서는 아무렇지 않게 짐을 풀면서 말했다.
“도련님. 저 먼저 씻어도 되죠?”
“어? 씻는다고?”
“네.”
“어, 음. 어. 그래.”
그렇게 김 비서가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곧 물소리가 들리고 씻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서 부동자세로 얼어붙어 있었다.
“이거 문제없는 거…… 맞지?”
다 큰 성인 남녀가 방에 있다.
아무리 김 비서가 나하고 오랜 시간 막역하게 시간을 보낸 사이라고 해도, 이건 좀…….
갑자기 한쪽에 피가 확 쏠린다.
서둘러 속으로 애국가를 부르고 있는데,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화장실에서 하얀 가운을 입고 나온 김 비서가 등장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도련님?”
“어? 왜?”
“도련님은 안 씻으세요?”
“어? 씨, 씻는 게 낫겠지?”
“그럼 안씻고 주무시게요?”
“어, 음. 그건 아니지만…….”
왠지 나 혼자만 호들갑 떠는 것 같았다.
조금…… 분위기가 식었다.
나도 별말 없이 화장실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 옷을 하나씩 벗었다.
적당히 잡힌 근육이 눈에 들어왔다.
‘매일 운동한 보람이 있네.’
사실 나는 틈만 나면 운동을 하고 있었다.
명색이 구단주가 되어서 배불뚝이로 있을 수는 없었다.
김 비서도 나에게 건강을 위해서라도 운동을 하는 게 좋다고 권유했고.
그래서 꾸준히 운동을 해온 결과, 어느 정도 괜찮은 몸매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내 몸을 잠깐 감상하던 나는 마저 옷을 벗고 샤워를 했다.
솨아아아.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샤워를 마친 나는 수건으로 머리와 몸을 말렸다.
“맞다. 입을 옷을 안 갖고 들어왔네.”
그냥 생각 없이 몸만 들어와 버렸다. 당황한 나머지 잠깐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내 눈에 하얀 가운이 눈에 들어왔다.
김 비서가 입고 나서 하나 남은 가운이었다.
“저거라도 입어야겠다.”
몸 위에 가운 하나 걸친 뒤, 단단하게 끈을 조였다. 그리고 벗은 옷가지들을 들고 가지고 나왔다.
“도련님?”
“음?”
그녀와 내가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녀가 고개를 돌려 회피하더니 손만 내밀었다.
“옷가지 주세요. 제가 정돈할게요.”
“아니야. 내가 할게. 내 옷인데.”
나는 서둘러 옷가지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정적.
“크흠. 김 비서.”
“네?”
“오늘 어땠어?”
내 물음에 김 비서는 잠깐 생각했다가 대답했다.
“좋았어요. 학창 시절 때 기억도 새록새록 다시 떠올랐고요. 물론 그때 비하면 많이 달라졌더라고요. 황리단길은 처음 가봤고요.”
“그래?”
“도련님은 어떠셨나요?”
“나도 좋았어.”
사실 나는 학창 시절에 좋은 기억이 없었다. 딱히 친구라 부를 만한 사람도 없었고, 남들하고 잘 어울리는 성격도 아니었으니까.
아마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도련님. 궁금하지 않으세요?”
“뭐가?”
“도련님께서 저한테 먼저 같이 놀러 가자고 제안하셨잖아요. 근데 그때 거절했던 제가 왜 갑자기 놀러 가자고 얘기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궁금하긴 한데…… 글쎄. 김 비서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딱히 물어볼 생각은 안 했지.”
내 말에 김 비서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도련님이시네요.”
“그래?”
“네, 이런 도련님이 저는 좋아요.”
“나도 김 비서가 좋아.”
“……남자로서요.”
“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순간 나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런데 김 비서는 어느샌가 나를 또렷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저는 도련님이 남자로서 좋다고요.”
“……!”
두근.
갑작스러운 그녀의 고백에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김 비서, 여기 와서 이런 장난치면 재미없어.”
“진심이에요. 제가 지금 장난치는 사람으로 보이세요?”
“…….”
나를 바라보며 똑바로 이야기하는 그녀에게 진심이 안 느껴질 리 없었다.
그저 나는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도련님은 저를 싫어하시나요?”
“그럴 리가. 나도 김 비서가 좋아.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이 전혀 믿어지지가 않아서 그래. 나 꿈꾸고 있나?”
김 비서에게 고백을 받다니.
지금 당장 ‘아, 사실 이건 전부 꿈입니다.’라고 말해도 납득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도련님.”
그녀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저도 수없이 고민했어요. 그런데 제 마음이 자꾸 도련님을 향해 가더라고요. 그리고…….”
“……?”
“아무리 신호를 줘도 눈치조차 못 채는 도련님에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마 저는 평생 아무것도 못 하고 늙어 죽겠죠!”
잠시만요.
신호를 줬다고요?
도대체 어디서? 언제?
나는 그간의 기억을 마구잡이로 떠올렸다.
전혀 모르겠어!
나는 진심으로 그녀가 언제 신호를 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내 생각을 눈치챈 그녀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어요.”
“미안해.”
“그래도 괜찮아요. 지금 저는 도련님께 제 마음을 고백했으니까요.”
“…….”
그래, 솔직히 나는 김 비서를 좋아한다. 지난번 산부인과 사건 때도 그랬지만, 그녀가 다른 남자와 사귄다 생각하면 마음이 크게 불편했다.
그래서 언젠가 지금의 상황이 나아지면 김 비서에게 내 마음을 드러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 비서가 먼저 이렇게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김 비서.”
“네?”
“좋아해.”
“…….”
“여자로서, 좋아해.”
“……!”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진심을 전했다. 그러자 그녀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흑. 흑흑.”
“어? 울어? 김 비서?”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김 비서 때문에 당황하고 있는데, 그녀가 흐느끼며 말했다.
“다행이다. 나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서.”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결국 참지 못한 나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남은 손으로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고 그대로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