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마침내 들어 올린 FA컵 트로피.
고양 유나이티드는 축제였다.
팀을 창단 한지 무려 30년이 넘었지만, 그동안 FA컵과 인연이 없었던 고양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첫 FA컵 우승트로피를 들어 올리면서 그간의 한을 풀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고양 유나이티드가 이번 FA컵 우승을 통해서 경쟁력 있는 팀이라는 것을 세상을 향해 검증한 것이다.
작년 2부 리그 우승할 때만 해도 한 시즌 반짝 잘하는 정도로 여기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이제 대부분은 고양 유나이티드가 경쟁력 있는 팀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됐다.
전문가들도 고양 유나이티드가 빅클럽으로 가는 중요한 지점을 통과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현재의 빅클럽으로 분류되는 팀들이 과거 약소팀에서 강팀으로 가는 과정을 비슷하게 겪어가고 있었다.
이는 향후 다가올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 셈이다.
그리고 이런 고양 유나이티드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지태훈. 네가 나를 아주 번거롭게 만드는구나.”
지태완도 고양 유나이티드의 우승 소식을 듣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당장이라도 지태훈을 쳐부수고 싶었지만, 어떤 방법을 써도 그는 요리조리 잘 빠져나갔다.
다른 형제들이 폭풍에 휩쓸려가도, 지태훈만큼은 용케 살아남았다.
“제일 먼저 죽을 줄 알았던 송사리가 이토록 오래 살아남을 줄이야.”
지태완 입장에서는 골칫거리였다.
현재 지태완은 그룹 내에서 반(反)지태완 세력과 암암리에 싸우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그룹 총수로서 기업 전체를 휘어잡은 것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와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는 이들은 대부분 ‘정당성’을 이유로 들었다.
그가 회장이 되었을 때는 아직 지종윤 회장이 살아있던 상태였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전대 회장의 승인도 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진행해서 회장 자리에 오른 지태완에게 그 일은 이후에 상당히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거기다 최근 그룹 내부에 긴축 정책을 크게 활성화하여 그룹에 불필요한 이라 생각하는 자들을 대거 제거했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그룹에서 내보내졌다.
하지만 그룹의 힘으로 대외적으로 언론에 알려질 수 없게 은폐했다.
하지만 그룹 내부에서는 이 일을 두고 지태완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지태훈이 떠오르고 있었다.
지태완이 필요없다고 판단한 고양 유나이티드와 영신건설을 흡수해서 다시 되살려놓은 지태훈의 일은, 영신그룹 내부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지태완의 능력에 의심을 품는 이들도 나타났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는 적이 된 김진철 이사와 용준형 사장이 그룹 내부의 반대세력과 지속적으로 접촉한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만약 이대로 반(反) 지태완 세력이 지태훈에게 붙는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명천파의 황 실장 오른팔로 활약하던 이명훈이 사라졌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명훈은 지태완과 명천파의 인과관계를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으니, 지태완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분명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지태훈이 그에게 빅엿을 선사한 것은 분명했다.
“지태훈!”
그가 이를 악물었다.
사납게 굳어진 얼굴로 주먹을 꽉 움켜쥔 그는, 이제 완벽한 적이 된 동생을 처단할 악귀로 바뀌었다.
“그리 길지 않을 거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모든 것을 했다. 그랬던 그가 이보다 더한 짓을 막내에게 저지른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곧 선물 하나 보내주마.”
지태훈의 두 눈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 * *
우승 뒤풀이를 찐하게 하고, 본격적인 휴가를 즐기기 시작한 나에게 김진철 이사가 찾아왔다.
“애송아.”
“오잉? 이사님께서 갑자기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집까지 찾아온 그가 사뭇 진지한 자세로 말했다.
“이제 너에게 해줘야 할 말이 있어서 왔다.”
“저한테요?”
“그래. 네가 지금까지 후계자 교육을 받지 않고도 여기까지 조직을 이끌어온 건 정말 대단한 일이야. 하지만 앞으로는 많이 힘들 거다.”
“…….”
“네가 지태완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싶다면, 너도 후계자 교육이 필요해.”
“후계자 교육이라니…….”
나는 난감한 표정을 드러냈다.
영신 그룹 집안사람들은 서열에 따라 후계자 교육을 받는 차이가 존재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서열 자체가 너무 낮아서 후계자 교육은 거의 꿈도 못 꿨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될 거라고 하니, 도통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영신그룹은 대외적으로 트렌디한 그룹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실상 제일 보수적인 집단이야.”
“…….”
“지금 영신그룹 내부에서는 ‘정당성’과 ‘정통성’을 두고 시시비비가 끊이질 않고 있어.”
언뜻 이야기를 전해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최근 영신 그룹 내부에서 반(反)지태완 세력이 형성되고 있다고.
“그들은 그룹을 망치는 지태완을 몰아내고 싶어해. 하지만 그들이 가진 보수적인 생각 때문에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지.”
“설마…….”
“‘지태완을 내치고 누구를 그 자리에 앉힐 거냐?’라는 물음에 지금 상황에서 그 누구도 자리에 앉을 수가 있는 사람이 없다. 이게 바로 그룹 내에 공유되고 있는 이야기다.”
“……!”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부분을 채워 줄 사람이 나타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그제야 나는 김진철 이사의 말이 이해됐다.
결국 그는 나에게 정식으로 후계자 교육을 받고 영신그룹의 주인이 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제가 어떻게 후계자 교육을 받습니까?”
영신 그룹의 후계자 교육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모르는 나다.
그런 내가 어떻게 후계자 교육을 받는단 말인가.
그것도 아버지도 안 계신 상황에서.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후계자 교육이 가능한 인물을 포섭했으니까.”
“네!? 정말입니까? 그 사람이 누굽니까?”
화들짝 놀란 나와 달리 김진철 이사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박준후.”
“……!”
“전대 회장님을 누구보다 가까이 모셨던 사람이고, 지태완이 후계자 교육을 받을 때, 그의 스승이기도 했지.”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박준후 비서팀장이 큰형의 스승이었다니.
전혀 몰랐다.
“회장님이 비밀스럽게 진행했던 일이니까, 너는 몰랐을 수밖에 없다. 아마 너의 다른 형제들도 잘 모를 거다.”
“그럼 박준후 팀장이 저에게 후계자 교육을 가르쳐주는 겁니까?”
“그래. 박준후 팀장은 회장님이 돌아가신 이후 바로 옷 벗고 나온 상태였더군. 한동안 소식이 끊겨서 뭐 하고 지내나 싶었는데 고향에서 낚시나 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더군.”
“아예 맘 접고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 같은데, 그 사람이 갑자기 왜 저에게 도움을 준다고 합니까?”
박준후 같은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나를 도와줄 거라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여태까지 그 사람을 봐왔을 때만 하더라도 본인만의 신념이 강했던 사람이니까.
그런데 김진철 이사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살해 위협을 받았다.”
“네!?”
“네가 FA컵 결승전에 집중하는 동안, 박준후 팀장이 지태완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았다. 때마침 내가 그 자리에 있어서 망정이었지.”
“아니, 그 사실을 왜 이제야 말씀하십니까!”
“그때 말했다고 한들,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겠냐?”
“…….”
“이미 지나간 일이다.”
솔직히 김진철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불쾌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간 나는 형에게서 여러 차례 위협을 받았지만, 그에 따른 반격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예로 아직도 형이 버젓이 살아 있다.
대기업 회장을 상대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지태완처럼 치밀하게 준비한 이들은 더욱 상대하기 어려웠다.
“박준후 팀장을 공격한 사람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도주했다. 그런데 느낌상 저번에 잡았던 그놈하고 같은 놈들 같아.”
“그놈이라면… 이명훈 말입니까?”
“그래. 지금은 동남아로 넘어갔지.”
김진철은 이명훈을 베트남으로 보냈다. 김진철은 베트남에 사는 지인에게 부탁해서 그가 잠깐 머무를 수 있게 해뒀다.
“이명훈은 언젠가 요긴하게 써먹을 히든 카드야. 쉽게 잃어서는 안 돼.”
“그렇죠.”
“어쨌든, 박준후 팀장은 그 일을 계기로 우리 쪽에 합류하기로 했어. 조만간에 고향에 있는 집을 정리하고 일산으로 올 거다.”
“잘됐네요. 모쪼록 이사님께서도 도와주세요.”
“그건 걱정 마라. 그래서 말인데….”
“네?”
“이번 휴가를 끝으로 한동안 휴가는 없을 거다.”
* * *
“이번 휴가는 어떻게든 즐겁게 보내겠어!”
김진철 이사의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 나는 즐겁게 휴가를 보낼 생각으로 가득했다.
휴가는 정확히 열흘.
크리스마스와 새해 신정까지 보내면 끝이다.
하지만…….
“무얼 하면서 휴가를 보낸단 말인가.”
보통 휴가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좋은 곳을 다녀온다던가 아니면 소중한 사람과 오붓한 시간을 보낸다던가.
그런데 나는 딱히 그럴 수 없었다.
“아, 이거 뭔가 슬픈데.”
망나니였을 때는 같이 놀 친구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르다.
“그냥 집에서 조용히 보내야 하나?”
조금 고민하던 찰나, 누군가가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도련님. 어디 놀러 가실래요?
“어!?”
김 비서였다.
“김 비서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사실 휴가를 맞아 연말에 같이 놀자고 얘기를 했었다. 그런데 김 비서가 연말에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며 거절했던 것이다.
슬픈 일이지만 현실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나한테 놀러 가자고 연락을 한다고?
“설마 보이스피싱인가?”
살짝 의심을 했지만, 분명 김 비서의 전화번호로 정확하게 연락이 왔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답장을 보냈다.
-어디로 갈까?
-국내도 좋고 해외도 좋아요.
음, 순간 고민이 됐다.
여기서 뭐라 답변하는 게 좋을까?
내 능력으로 어디든 다 갈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장거리 해외여행을 가기에는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국내뿐인가?
-국내가 좋을 거 같아. 해외는 조만간에 출장이 잡혀 있으니까.
-좋아요. 그럼 국내 어디로 갈까요?
또 고민이다.
아무런 계획도 없는데 어디로 가자고 할까.
그때 김 비서가 먼저 제안을 해왔다.
-경주 어때요?
-경주?
-네. 생각해 보니까 중학교 수학여행 이후로 한 번도 안 갔었네요.
-좋아. 그럼 바로 준비할게.
그렇게 우리의 목적지는 경주로 정해졌다.
* * *
이번에는 김 비서의 차가 아닌 KTX를 타고 경주에 도착했다.
경주에서 렌트해서 돌아다니자고 김 비서가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경주에서 렌트카를 빌린 우리는 경주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여기가 경주 불국사에요.”
“불국사…… 나도 여기는 되게 오랜만이네.”
나도 김 비서와 똑같이 중학교 때 이후로 처음 오는 경주였다.
그 유명한 불국사도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까마득하게 오래된 기억들이 조금씩이지만 생각났다.
불국사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들로 잠겨 있는데, 돌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설마 지 대표야?”
“음? 어, 뭐야!?”
백태현이었다.
한때 천산 그룹의 망나니였다가 개과천선해서 잘살고 있는 그가 왜 여기에 있지?
“야, 우리가 여기서 다 만나네?”
“그러게. 너는 왜 여기에 있냐?”
“아버지가 경주에서 요양하시는데, 마침 아버지하고 친한 스님도 여기 불국사에 계시거든. 그래서 종종 이곳에 놀러 오셔. 나는 잠깐 휴가 내서 아버지 모시고 여기 온 거고.”
“그렇구나.”
“근데 너는…… 오, 김 비서하고 둘이 온 거야?”
“어.”
“올. 커플 여행?”
“크흠! 그런 거 아니거든!”
당황한 나를 향해 백태현이 묘한 표정을 드러냈다.
“김 비서님도 오랜만이에요?”
“네. 오랜만입니다.”
김 비서는 특유의 포커페이스를 드러내며 담담하게 인사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백태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는 사이, 우리를 향해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가네 막내가 여기는 어쩐 일이냐?”
고개를 돌리자 백우진 전(前) 천산그룹 명예회장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