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산드루가 퇴장당하면서 전북은 1명이 빠진 상태에서 경기를 치르게 됐다.
그런데 이 상황이 오히려 전북에게 강한 자극이 됐다.
전북이 오랜 시간 챔피언의 자리를 유지해왔던 것은 어떤 상황이든 위기 대처에 능숙했기에 가능했다.
그 부분을 오늘 경기를 통해서도 보여주고 있었다.
『박정혁 감독이 한 번에 2명의 선수를 교체합니다. 김민우 선수와 조형민 선수인데요.』
『김민우 선수는 수비수이고, 조형민 선수는 공격수인데요. 자, 누굴 빼고 두 선수를 넣을까요?』
주심이 교체 사인을 보냈다.
그러자 대기심이 든 전광판에 선수 번호가 떴다.
『미드필더 채원식과 한영현 선수를 빼는군요.』
『박정혁 감독이 빠르게 대처하네요.』
전북은 선수 교체를 통해 변화를 주었다.
한편, 고양은 수적 우위를 통한 주도권 선점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주도권이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뭐지? 분명 저쪽은 1명이 없는데 왜 11:11로 싸우는 것 같지?’
곽찬구 감독마저 의문이 들 정도로 전북은 수적 열세에도 잘 버티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수비에 치중하는 것처럼 보여도, 조금이라도 틈이 나면 교체로 들어간 조형민을 중심으로 빠르게 카운터를 선보였다.
이러니 고양도 경기를 풀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역시 전북은 만만치 않아.’
고양 선수들도 전북의 수준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국 뜻밖에 사단이 일어났다.
『후반전 정규 시간도 5분 정도 남아 있는 상황입니다. 전북이 모처럼 공격해서 코너킥까지 만듭니다.』
코너킥 상황에서 황진용이 공을 차올렸다.
포물선을 그리며 올라간 공이 경합하던 스즈키와 조형민 쪽으로 뚝 떨어졌다.
조형민이 먼저 어깨로 스즈키를 밀어내고 점프해서 공을 이마에 닿게 했다.
그렇게 방향이 틀어진 공이 그대로 골망마저 흔들었다.
출렁-
우와아아아아!
지켜보던 전북의 모든 이들이 환호했다.
『전북이 수적 열세를 딛고 득점을 만듭니다! 교체로 들어온 조형민의 득점입니다!』
『이야~ 박정혁 감독이 준비한 비장의 카드가 통했네요!』
팽팽했던 경기의 흐름은 전북의 추가 득점으로 완벽하게 변했다.
이렇게 되면 고양은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도 패배하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다 올라가!”
곽찬구 감독의 주문으로 고양의 공격라인이 전체적으로 확 올라갔다.
이렇게 패배할 수는 없었다.
고양의 모든 선수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이 악물고 남은 시간을 집중해서 뛰었다.
하지만 전북도 사력을 다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승리하기 위한 전북의 육탄 수비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눈앞에서 드러났다.
『주심이 휘슬을 붑니다! 2027 더블은행 FA컵 결승 1차전은 2:1로 전북이 승리합니다!』
『오늘 경기 이변이네요! 양 팀 감독의 수싸움이 있던 경기였는데, 결국 박정혁 감독의 교체가 만든 변화가 득점까지 이어지면서 전북이 승리하네요.』
『이렇게 되면 고양은 2차전 준비를 잘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죠. 그리고 전북도 방심하면 안 됩니다. 스코어가 1골 차이밖에 안 나기 때문인데요. 고양도 언제든지 저 스코어를 뒤집을 수 있는 팀이거든요.』
『그렇습니다. 그럼 저희 중계는 여기서 마칩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
결승 1차전 경기가 끝나고, 우리 팀 분위기는 한동안 초상집이었다.
사무실로 출근한 나는 우울한 직원들의 모습을 보고 반응했다.
“다들 표정이 왜 그렇습니까? 누가 죽기라도 했습니까?”
“대표님은 괜찮으세요?”
천지원 부장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고 말고가 있겠습니까? 아직 2차전이 남아 있고, 지금 우리는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 힘내서 2차전 잘 준비해 봅시다.”
내 말에 직원들이 무언가 감동한 표정을 드러냈다.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이해가 안 된 나는 바로 대표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대표실 안에 있던 김 비서와 마주쳤다.
“도련님. 오늘 결제해야 할 보고서들을 모아뒀습니다.”
“아, 고마워.”
“커피 드릴까요?”
“아니야. 괜찮아.”
“네. 그럼 필요한 거 있으시면 불러 주세요.”
김 비서가 고개 숙여 인사하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 김 비서의 뒷모습을 보게 된 나는 돌연 그녀를 불렀다.
“김 비서. 잠깐만.”
“네?”
“혹시 저녁에 시간 돼?”
“저녁에요?”
“어. 오래간만에 둘이서 같이 저녁이나 먹자고.”
그러자 김 비서가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
“저, 도련님, 오늘은 제가 선약이 있어요.”
“선약?”
“네. 한참 전에 잡은 선약이라서요. 빼기가 어려워요.”
“음.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저녁은 다음에 먹자고.”
“네. 그렇게 해요.”
그렇게 약속은 다음으로 미루어졌다. 그리고 별다른 생각 없이 오늘 업무를 소화하다 보니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오늘 저녁은 뭐로 먹어야 하나.”
보통 저녁은 집에서 먹는 편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외식이 하고 싶었다.
“혼자 가서 먹을 만한 음식점은 어디가 좋으려나.”
스마트폰으로 이리저리 식당들을 검색했다.
“음. 딱히 눈에 안 들어오네. 그냥 돌아다녀 볼까.”
대표실에서 나오자 김 비서는 보이지 않았다.
“김 비서는 벌써 퇴근했나요?”
“네. 약속이 있으시다고 하면서 나가셨어요.”
“그렇군요. 그럼 저도 먼저 가보겠습니다. 수고들 하세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대표님.”
직원들에게 인사를 받은 뒤 나는 유유히 퇴근길을 나섰다.
그렇게 3호선 정발산역에서 내려 미관광장으로 빠져나온 순간 내 눈이 부릅떠지는 상황을 목격했다.
“뭐, 뭐야?”
광장에서 김 비서가 어떤 안경을 쓴 남자와 함께 길을 걷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누구지?’
순간 불쾌감이 스쳐 지나갔다.
180은 넘어 보이는 키와 훈훈하게 생긴 이목구비를 지닌 안경남이 왜 김 비서와 함께 있는 거지?
그런데 더 놀랄 일이 벌어졌다.
김 비서가 그 안경남과 손을 맞잡은 것이다.
“……!”
순간 내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어!’
이미 머릿속에는 저녁 먹을 생각도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김 비서와 안경남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누군데 저렇게 즐거운 모습을 보이는거야?’
걸어가면서 안경남과 대화를 나누는 김 비서는 환하게 웃는 모습들을 여러차례 보여 줬다.
그 장면이 사뭇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불순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남자…… 친구는 아니겠지?’
김 비서에게 남친이라니.
애인!
믿을 수 없는 대사건이다.
‘근데 내가 왜 이렇게 신경 쓰는 거지? 내가 김 비서하고 사귀는 것도 아닌데…….’
이 가슴 속을 잡아끄는 불쾌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그렇게 계속 뒤를 밟아가던 중, 김 비서가 안경남과 함께 어디를 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됐다.
‘어디 가는 거지? 헉.’
나는 건물 간판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박정권 산부인과]
“사, 산부인과!?”
이게 뭐야?
김 비서가 왜 남자하고 단둘이 산부인과에 들어가는 거야?
설마…….
“그럴 리 없을 거야. 착한 생각. 착한 생각.”
그런 말과 달리 내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산부인과로 들어갔다.
‘어디로 간 거지!?’
병원 내부가 상당히 컸다.
건물 전체가 산부인과 전문 병원이었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서 허둥지둥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도련님?”
김 비서가 안경남과 함께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 * *
잠시 후, 나는 이야기를 듣고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거였군요.”
“설마 이상한 생각하신 건 아니시죠?”
“이, 이상한 생각이라니! 나를 뭘로 보고!”
“흐음~ 이상한 생각하셨구나~?”
“…….”
김 비서와 함께 있었던 안경남.
그의 이름은 오수혁.
김 비서의 초등학교 친구인데, 작년에 결혼해서 올해 아이가 생겼다.
출산한 지 얼마 안 된 터라 산모와 아기가 아직 병원에 있었던 것이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말로만 듣던 대표님을 이렇게 뵙게 되니 영광이네요.”
“저에 대해 아시나요?”
“알죠. 일산 살면서 대표님 이름을 못 들어본 사람이 거의 없을걸요? 시장님 이름은 잘 몰라도 대표님 이름은 알죠.”
“그랬군요.”
“그리고 유리가 평소에 얼마나 대표님 이야기를 하는…… 아얏!”
김 비서는 호호 웃으면서 오수혁의 어깨를 주먹으로 때렸다.
“호호. 애는 못하는 말이 없네.”
그런 김 비서의 반응을 본 나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저희 아기 보실래요?”
“맞다. 보고 가요.”
나는 졸지에 오수혁의 아기를 보게 됐다.
오수혁의 아기는 투명한 창 너머에 있는 바구니 같은 작은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다.
“저기 보이는 아기가 지희야. 오지희. 우리 딸 예쁘지?”
“우와. 진짜 예쁘다.”
창 너머로 지켜보는 김 비서의 두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아직 실감이 안나. 내가 아빠가 됐다니.”
“너는 멋진 아빠가 될 거야.”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나는 조용히 아기를 바라보았다.
잠든 아기에게 나도 모르게 자꾸 시선이 갔다.
그런 나에게 김 비서가 말을 걸었다.
“도련님도 아기가 좋으세요?”
“음? 어. 뭐, 그렇지.”
“호호. 도련님도 언젠가 결혼하면 아빠가 되겠죠?”
“아빠라…… 그것도 좋겠네.”
“저는 결혼하면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요. 자식은 둘이나 셋 정도면 좋을 거 같고…….”
“……꽤 구체적인데?”
“그런가요? 호호호.”
문득 그녀를 보다가 생각이 들었다.
‘김 비서를 닮은 아이들이라. 많이 예쁘겠는데.’
순간 머릿속에서 멋대로 상상했다.
김 비서와 그녀가 낳은 자식들이 서 있는데, 그 옆에 내가 있었다.
“헉!?”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도련님? 왜 그러세요?”
“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김 비서와 결혼한 미래라니.
나도 모르게 상상해 버렸다.
괜히 들키면 안 될 것 같은 상상을 해버린 나는 고개를 획 돌렸다.
그런 나에게 김 비서가 작게 웃으면서 말했다.
“도련님은 분명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 말에 놀라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가 고개를 획 돌렸다.
고개가 돌아간 그녀의 귓가가 어째서인지 빨갛다.
“크흠!”
그때, 오수혁이 헛기침을 하며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대표님, 혹시 저녁은 드셨습니까?”
“저녁이요? 아! 아직 못 먹었습니다.”
그제야 배고픔을 느꼈다.
김 비서의 뒤를 밟느라 애초에 목표였던 저녁 먹기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괜찮으면 같이 드실래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네. 친구에게 가장 소중한 분이신데, 함께 저녁 드시죠. 원래 저녁을 같이 먹으려고 했으니까요.”
“소중한 분?”
“네, 유리가 그렇게 말했…… 아얏! 왜 또 때려!”
“호호. 계속 말하면 죽인다. 호호.”
나는 그런 김 비서를 보고 곧 소리 없이 웃었다.
모처럼 기분 좋은 날이다.
* * *
FA컵 결승 2차전은 이번 주 토요일 오후 2시에 진행된다.
장소는 덕양구에 있는 고양별무리 경기장.
고양종합운동장, 아니, 더블은행파크의 보수공사가 아직 진행 중이었던 탓에 홈경기장으로 고양별무리 경기장을 쓸 수밖에 없었다.
선수단은 2차전 반격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실 팬들의 비난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차전에서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졌다는 결과가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지막 남은 2차전에 희망을 걸었다.
나는 직접 팬들에게 1차전 패배에 대한 사과문과 동시에 2차전에서 반드시 좋은 결과를 보이겠다는 서신을 발표했다.
다행히 팬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고 응원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준비하고 있는 퍼포먼스가 계획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홈 마지막 경기입니다. 이 경기에서 우리가 보여줄 퍼포먼스는 가히 역대급이라고 봐도 될 겁니다.”
“정말 기대가 되네요. 경기 당일에 이 퍼포먼스를 본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이미 사전에 퍼포먼스를 확인한 우리는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대망의 2차전 경기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