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원정 좌석에는 고양 팬들 외에도 프런트도 함께하고 있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굳은 얼굴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경기 전에 대부분 우리가 아챔 우승트로피를 들어 올리면서 기세가 오른 전북을 상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런 생각이 틀리다고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다가 홈도 아니고 원정이다.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눈앞에서 전북이 우리 팀을 상대로 밀어붙이는 모습만 봐도 그랬다.
초반 경기력은 우리보다 전북이 훨씬 좋았다.
분명 아챔을 치르는 동안 체력 소모가 상당했을 텐데도, 그들은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비축한 우리보다 훨씬 좋은 모습을 보였다.
‘이래서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했구나.’
곽찬구 감독이 나에게 축구는 어느 정도 분위기 싸움도 포함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경기를 보고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객관적으로 실력 차이가 있어도 분위기에 따라서 그날 경기력으로 뒤집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오늘 경기도 그런 날이었다.
출렁-.
아아아!
지켜보던 고양 팬들의 입에서 비명 같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반면, 전주성은 전북 팬들이 내지리는 환호로 가득했다.
‘지금 시간이…… 뭐야, 겨우 10분 지난 거야?’
전반 12분.
전북의 산드루가 날카로운 중거리 슈팅으로 선제 득점을 만들어 냈다.
우리 팀 선수들이 아쉬워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시간 있어! 집중하자! 경기 벌써 끝났냐! 어!”
주장 김지우가 선수들을 독려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골키퍼 박지원도 외쳤다.
“애들아! 미안하다! 이제 실점 안 당할게! 골 좀 넣어줘!”
팀 내 가장 높은 고참들의 외침에 선수들도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전북이 1점 앞서는 상황에서 두 팀 감독들의 수싸움이 나오기 시작했다.
“진용아! 바로 전방으로 찌르지 말고! 빌드업해야지! 빌드업! 급할 거 없다니까!”
“현우야! 스즈키 혼자서 감당 안 된다! 스즈키가 키핑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해! 종호야! 측면 봐줘야 한다! 측면!”
그냥 경기도 아니고, 결승전이기 때문에 양 팀 감독 모두 평소와 달리 터치라인에 서서 진두지휘했다.
“안 되겠다! 바꿔!”
곽찬구 감독이 먼저 변화를 크게 가져갔다.
『두 팀 감독들의 수 싸움이 상당히 치열한데요. 고양이 먼저 선수 교체를 진행합니다.』
『아직 경기 초반인데 벌써 교체를 진행한다는 건, 곽찬구 감독도 준비했던 부분하고 맞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걸 바로 인지하고 대처한다고 봐야겠네요.』
『박요한 선수가 빠지고, 오세진 선수가 들어가네요.』
『이렇게 되면 오늘 고양은 4-3-3 포메이션이었는데, 측면에 있던 박요한 선수가 빠지고 오세진 선수를 투입해서 미드필더 하나가 늘었기 때문에, 4-4-2 또는 스리백으로 전환할 가능성도 크겠네요. 잠깐 지켜봅시다.』
오세진을 투입한 고양은 한정희 해설의 예측대로 포메이션에 변화가 생겼다.
『아! 스리백이네요. 3-5-2인데, 이러면 최전방에는 사무엘과 박형우가 투톱 형태로 가고, 정성진 선수가 윙백으로 올라가겠네요.』
『이번 K리그 대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한 정성진 선수인데요. 변화한 포메이션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됐습니다.』
고양의 변화에 전북도 즉각 대응했다.
『박정혁 감독도 변화를 주는 것 같은데요. 지금, 박정혁 감독도 스리백으로 바꾼 것 같아요?』
『오, 그렇네요. 선수 교체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위치에 변화를 줘서 전체적인 포메이션 변화를 줬는데요. 오~ 이거 오늘 양 팀 감독 수싸움이 대단하네요.』
『전북도 3-5-2 포메이션입니다. 거의 맞불로 가겠다는 뜻이겠죠?』
『그렇네요. 전북이 이른 시간 먼저 득점을 만들었지만, 그래도 1골로 만족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상대가 공격적으로 나온다면, 우리도 공격적으로 나서겠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양 팀 감독의 전술 분석이 끝나자 캐스터 양종윤이 감독들에 대해 살짝 코멘트했다.
『박정혁 감독은 부임 첫해에 아시아챔피언스리그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렸는데요. 지금 대표팀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는 김용수 감독 밑에서 수석코치로 활동해서 그런지 거의 김용수 감독과 흡사한 경기 운영을 보인단 말이죠.』
『그렇죠. 김용수 감독도 대표팀 부임 전에 지휘봉을 박정혁 감독에게 넘기면서 남겼던 코멘트가 ‘자신하고 가장 흡사한 제자다’라고 말했으니까요. 실제로도 그렇고요.』
『반면, 곽찬구 감독은 뭐, 말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실력 있는 감독이죠.』
『그렇죠. 파주의 레전드죠? 그런데 오랜시간 라이벌이었던 고양의 지휘봉을 잡고 부임 후 2년 차 만에 마법 같은 승격을 하고, 올해 3년 차에는 팀을 FA컵 결승전으로 올려놓은 명장이죠.』
『고양에게는 곽찬구 감독 영입이 신의 한 수다라는 말이 있어요.』
『그럴 수밖에요. 지금 고양이 3~4년 전에 비하면 엄청나게 리빌딩이 잘되어 있고요. 신구 조화가 아주 훌륭한 팀이에요. 이 팀이 과연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을지는 곽찬구 감독의 능력에 달렸고요.』
마침 중계 카메라에 내 얼굴이 잡혔다. 팔짱을 끼고 굳은 얼굴로 경기를 지켜보는 내 모습을 본 중계진이 코멘트를 남겼다.
『오늘도 경기를 지켜보는 지태훈 대표인데요. 이 지태훈 대표의 영향력도 이제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죠?』
『그렇죠. 지태훈 대표가 지금 고양 유나이티드를 넘어서 K리그 메인스폰서로 등장하면서 끼친 영향이 크거든요. 이미 시즌을 마친 구단들의 경우, 다음 시즌 파격적인 상금 금액에 맞춰 대규모 투자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연이어 들려오고 있고요.』
한정희 해설자의 말대로 시즌을 마친 구단들은 다음 시즌을 위한 대규모 투자와 선수단 보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000억대로 상금 규모가 올라가면서, 소문을 들은 투자자들이 K리그로 대거 몰린 탓이었다.
이는 기업구단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 열악한 시도민구단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저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경기는 여전히 치열하게 진행하고 있는데요! 이번에 고양이 역습합니다!』
『자~ 박형우죠~』
교체로 들어간 오세진이 전방으로 내어준 패스를 박형우가 측면에서 받고 전북 진영으로 뛰어올라갔다.
어느샌가 사무엘과 정성진도 라인을 맞춰 뛰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들 앞에 전북 선수 4명이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박형우는 그런 전북 선수들 뒤쪽으로 절묘하게 공을 전달했고, 그 공을 사무엘이 한 번 잡고 정성진에게 짧게 패스했다.
사무엘과 정성진이 빠르고 간결하게 리턴패스를 주고받으며 전북 수비를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크게 흔들었다.
그렇게 비어 버린 공간을 향해 정성진이 슈팅을 때렸다.
팡!
『열렸는데요! 정성진 슈우우웃!』
경기장에 있는 모두가 정성진의 발끝을 벗어난 공을 주목했다.
출렁-.
우와아아아!
공은 전북의 오른쪽 골문 구석으로 정확하게 빨려 들어갔다.
막내 정성진의 득점을 목격한 팬들이 환호했다.
“그래! 바로 이거지!”
“꺄아아!”
나도 옆에 있던 김 비서를 와락 끌어안고 기쁨을 드러냈다.
『올해의 신인상! 정성진이 동점골을 만드는데요! 올해 자신의 리그 1호골을 아주 중요한 FA컵 결승전에서 만듭니다!』
『곽찬구 감독의 전술이 제대로 먹혔어요! 윙백 정성진에게 이런 걸 기대했었거든요!』
『환호하는 고양의 팬들 앞에서 셀레브레이션을 펼치는 정성진인데요. 벤치에 있던 곽찬구 감독도 주먹을 번쩍 위로 들어 올립니다!』
정성진의 득점으로 스코어는 다시 동률이 되었다.
원정 다득점이 없기에 원정 득점 이득은 없었지만, 향후 경기 결과를 뒤집을 수 있는 중요한 득점인 것은 맞았다.
* * *
경기가 치열한 만큼, 양 팀 서포터스들의 응원 열기도 대단했다.
약 800명의 원정 팬을 동원한 고양 유나이티드.
그들이 만드는 응원 화력은, 홈팀 못지않을 정도로 강했다.
“우리가 원정팀이기 때문에 쪽수는 저쪽이 훨씬~ 많지만! 우리가 인당 100인분씩 하면 됩니다! 아시겠죠!”
“네에에!”
“좋습니다! 그럼 목소리 크게! 다 같이 고~~양~~!”
고양 서포터스 연합 회장 박태준이 노란 확성기를 들고 콜리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콜리더의 외침에 맞춰 옹기종기 모여 있는 팬들이 힘차게 외쳤다.
둥. 둥. 둥.
고~~양~~!
둥. 둥. 둥.
고~~양~~!
녹색 물결이 출렁이는 전주성에서 돌연 노란 물결의 함성이 가득했다.
그러자 전북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전북 서포터스들도 모든 힘을 다해 응원가를 불렀다.
워오~ 워오~
전북~ 전북~
팬들의 응원은 곧 선수단의 사기에도 직결되었다.
“팬들이 저렇게 응원해주는데 우리가 제대로 뛰어야 하지 않겠냐!”
김지우의 말에 선수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승부로는 안 돼! 반드시 이겨서 2차전 준비하자!”
승리를 다짐하는 고양 선수들이었다.
벤치에서도 대기 선수들이 필드에 있는 선수들을 향해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힘내! 잘하고 있어!”
“조금만 더 힘내자!”
모두가 하나가 되어 경기에 임하고 있었다.
축구에서 가장 바라는 이상적인 ‘One Team’의 모습을 고양 유나이티드가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고양은 원정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저력을 보여줬다.
오히려 당혹스러운 것은 전북이었다.
초반에 선제득점을 만들 때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몰아붙이던 전북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뒤집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경기 내용이 뒤밖일 수 있는 결정적인 상황이 후반전에 벌어졌다.
『전반전에 양 팀 모두 1골씩 주고받은 가운데, 후반전 경기가 시작됐는데요. 후반전에 과연 양 팀 모두 어떻게 경기를 운영할지 기대해보겠습니다.』
후반전이 시작한 후, 스즈키가 산드루와 경합을 벌였다.
『스즈키 선수가 볼을 잡습니다! 산드루 선수와의 경합을 이겨내는 스즈키인데요!』
오늘 선발로 나온 스즈키는 경기 내내 산드루와 충돌했다.
산드루가 볼을 잡을 때마다 온갖 플레이로 저지했다.
산드루가 막히자 전북의 공격 흐름도 점점 어렵게 변하고 있었다.
그러자 결국 산드루가 경합 과정에 스즈키에게 거친 플레이를 펼치고 말았다.
『스즈키 선수가 쓰러졌는데요! 어! 주심이 달려옵니다!』
『주심이 눈앞에서 봤죠! 산드루 선수가 상당히 거칠었는데요!』
산드루와 스즈키가 떨어지는 롱볼을 뛰어올라서 경합하는 과정에서, 산드루가 팔꿈치로 스즈키의 얼굴을 강하게 쳤다.
『지금 주심이 VAR과 교신하고 있는데요. 아무래도 이게 옐로카드냐, 아니면 다이랙트 레드카드냐를 보는 것 같습니다.』
『어~ 상당히 위험한 플레이였는데요. 이렇게 리플레이 화면으로 볼땐, 레드카드 위험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FA컵 결승전에는 VAR이 함께한다.
VAR과 교신하던 주심이 휘슬을 짧게 불더니 좌우 손가락으로 크게 네모박스 모양을 만들었다.
『어! 온 필드 리뷰 들어가는데요! 이렇게 되면……!』
온 필드 리뷰를 통해 상황을 재확인한 주심이 다시 필드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산드루를 앞으로 불러들였다.
『자, 지금 주심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요! 어떤 카드를 꺼낼까요. 어! 빨간색이에요! 지금 주머니에서 빨간색이 보입니다!』
『자! 산드루 선수가 레드카드를 받습니다!』
온 필드 리뷰까지 진행한 결과, 산드루가 다이랙트 퇴장을 받게 됐다.
주심은 산드루의 행위가 상당히 고의적으로 판단해서 이 같은 판정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자 경기장은 전북 팬들의 야유로 가득했다.
우우우-
그와 동시에 전북 서포터스가 힘차게 외쳤다.
정신차려! 심판!
정신차려! 심판!
팬들의 반발에도 한번 내려진 판정이 번복되지는 않았다. 산드루는 고개를 숙이고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그런 산드루를 박정혁 감독이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주며 위로했다.
『후반전에 경기 결과가 바뀔 수 있는 결정적인 상황이 나왔습니다! 과연 남은 시간 두 팀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지켜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