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어쩌다 보니 잡게 된 팔.
나와 김 비서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어색하게 잡은 팔을 내려놓은 나는 헛기침을 했다.
“크흠. 디, 디저트라도 먹고 가.”
“으음. 그럴까요?”
“자, 잠깐만 기다려.”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마침 김 비서가 사온 과일들이 몇 개가 있었다.
나는 마침 손에 잡힌 사과를 꺼냈다.
그리고 과도와 함께 쟁반에 담아서 거실로 가져왔다.
내가 과도를 손에 쥐자 김 비서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도련님 과일 껍질 깎을 수 있으세요?”
“어? 어! 깎을 수 있지.”
생각해 보니 한 번도 내가 직접 깍아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 깎아준 걸 먹거나, 아니면 완전히 손질되어 있는 과일을 사다 먹었다.
뭐, 그래도 사과 하나 깎는 게 뭐 어렵겠나!
“…….”
이런 내 생각은 아주 처참하게 깨져 버렸다.
껍질을 깎으려다가 속살까지 뭉텅이로 깎아 버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걸 본 김 비서가 살짝 웃으면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저 주세요. 제가 깎아 드릴게요.”
“…….”
젠장, 너무 쪽팔리다.
김 비서는 사과 껍질을 예쁘게 돌려깎기 시작했다.
그런 김 비서를 보며 나는 묘하게 가슴이 뛰었다.
“김 비서.”
“네?”
“과일 정말 예쁘게 잘 깎네.”
“그런가요? 우리 도련님 과일 먹게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죠.”
“……미안.”
“왜 미안해하세요. 사람은 각자 잘하는 것을 하면 그만인데. 과일은 제가 더 잘 깎으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도련님은 이것보다 더 잘하는 게 많은 사람이니까요.”
그 말에 나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이게 바로 ‘심쿵’이라는 걸까?
“고마워. 김 비서.”
“여기 과일 드세요.”
김 비서가 포크로 사과조각 하나를 찍어서 내 앞으로 향했다.
나는 그걸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으로 받았다.
“…….”
순간 김 비서가 움찔하더니 당황해 했다.
“도, 도련님, 왜 그렇게 받으세요!?”
“어? 내가 뭐 실수했나!?”
“그, 그건 아니지만…….”
나는 김 비서가 왜 이렇게 반응하나 어리둥절했다가 금방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아!”
순간 나도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크흠. 김 비서도 하나 먹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과일 하나를 포크로 찍어서 넘겼다.
그러자 김 비서가 나와 포크에 찍힌 과일을 번갈아 보더니, 입으로 과일을 받았다.
“…….”
어, 미친.
왜 이렇게 심장이 마구 뛰지?
그저 입으로 받았을 뿐이잖아.
근데 이게 왜…….
“크흠!”
우리는 말없이 과일을 먹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다음에 김 비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흠흠, 도련님. UAE 신도시 사업과 관련해서 영신건설이 현지에서 호평을 받는 모양이에요.”
“그래?”
“네. 용준형 사장님이 저에게 오늘 연락을 주셨어요.”
“오, 잘됐네. 용준형 사장은 언제 돌아 오신데?”
“3일 후에 귀국하신다고 해요.”
“용 사장이 바쁘네.”
용준형 사장은 계속 두바이와 한국을 오고 가며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이런 용 사장 덕분에 나도 좀 더 수월하게 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용 사장님이 오늘 제안을 하나 하셨어요.”
“음? 제안?”
“네. 저희가 영신건설을 인수해서 그 계보를 이어가고는 있지만, 지금 영신건설 내부에서는 굳이 영신이란 이름을 쓸 필요가 있냐는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고 해요.”
“엥? 그래? 왜?”
“애초에 영신건설은 그룹 내에서도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었고, 이제 더는 영신그룹 소속도 아닌, 도련님이 운영하는 TH투자회사 계열사란 말이죠.”
“아, 이해했어. 어차피 내부에서도 충성심을 가질 만한 타이틀이 아니었으니 바꾸자 이 말인거지?”
“네. 맞아요. 자세한 이야기는 용 사장님이 귀국하면 직접 만나서 도련님하고 이야기하겠다고 말했고요.”
“흐음. 고민 좀 해봐야겠네.”
나도 영신건설의 이름을 바꾸는 부분에 있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영신건설을 인수할 때, 어느 정도 인지도가 쌓이면 회사명을 바꿀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 일이 빠르게 진전될 것처럼 보였다.
영신건설 내부에서 인수 이후 우려보다는 긍정적인 반응들이 오고 갔고, 최근 UAE 신도시 사업이라는 큰 프로젝트까지 따면서 내부 분위기는 상당히 좋았다.
어떻게 보면, 영신건설이 우리에게 가지는 충성도가 높아졌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스스로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느 것이겠지.
“아버지가 그러셨지.”
“네? 회장님이요?”
“어. 돌아가시기 전에 병실에서 나한테 사업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 ‘사업은 돈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셨어.”
“…….”
“이제 그 말이 조금씩 이해가 돼.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김 비서나 용 사장 같은 사람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올 수 없었겠지.”
예전 같으면 스스로 혼자 고립되어 생활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달랐다.
사람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나 혼자 잘났다고 해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다.
모든 일은 ‘신용’을 통해서 진행된다. 그런데 그 신용은 결국 ‘사람’을 통해서 나오는 법이다.
그러니 사람을 중요시 여길 수밖에 없다.
아버지도 그것 때문에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겠지.
“도련님.”
“응?”
“이제 회장님을 원망하거나 하지는 않으세요?”
원망하냐는 그녀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었다.
“과거의 나는 엄청나게 원망했겠지. 출신도 미천하고 집안 정치도 참여하지 못해서 혼자 고립되었으니까.”
“…….”
“하지만 지금은 달라. 아버지를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존경하고 있어.”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좋은 이야기도 있지만, 부정적인 이야기도 있었다.
사업적으로 탁월한 분이시지만, 집안 관리는 제대로 못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 부분에 있어서 나도 인정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국내를 넘어 세계적인 기업의 오너이면서도, 장남의 무시무시한 계획도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이다.
심지어 내부에서 큰형으로 인해 사람이 죽었는데도, 누가 죽였는지도 몰랐다.
대기업 오너가 어떻게 그거 하나 모를 수 있냐, 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나는 한편으로 이해가 됐다.
“신경 쓸 게 너무나 많았던 거지. 아버지가 여느 평범한 가장이라면 포용적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아버지는 그룹의 총수라는 역할을 하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던 거야.”
아버지가 무너지면, 아버지를 믿고 따르는 수많은 사람도 함께 휘청이게 된다.
그 무게와 책임.
겪어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다.
“사람 하나 책임지는 것도 정말 어려운 일인데, 수백, 수천, 수만을 책임져야해. 그뿐이야? 영신그룹이 흔들리면 나라 경제가 휘청여.”
아버지의 선택 하나로 자칫 영신그룹에 악영향을 끼친다면, 그것은 곧 기업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에도 영향을 끼쳤다.
“정말 많이 성장하셨네요.”
김 비서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담담함 속에 나는 여러 감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마워.”
“네?”
“김 비서도 나를 많이 도와줬어. 그래서 나도 성장할 수 있었던 거야.”
회귀 전에도 김 비서는 나를 떠났음에도 기어코 옥중 편지를 써서 진실을 알게 해줬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평생 진실을 모르고 살다가 죽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정말 죽을 때까지 그녀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
비록 지금은 부족할지언정, 그 부족함을 평생에 걸쳐 갚아나갈 생각이다.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저도 도련님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요.”
“음?”
“어느 날, 갑자기 도련님이 변하신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어요. 하지만 도련님이 정말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저도 도련님에게 기대를 걸게 됐어요.”
“나에게 어떤 기대를 걸었다는 건지 말해줄 수 있을까?”
“미래요.”
“미래?”
“네.”
처음 듣는 그녀의 고백이다.
그래서 더욱 흥미가 돋았다.
그녀는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통해서 그룹을 봐왔어요. 영신그룹은 거대하지만 고여있는 곳이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
“지태완이 싫었어요.”
“……뭐?”
그녀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더니 어렵게 힘을 주어 말했다.
“지태완이 저를 원했거든요.”
“……!”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말에 내 두눈이 부릅떠졌다.
이게 무슨 소리야?
지태완이 김 비서를 원했다니?
“그 사람은 제가 어릴 때부터 지켜봤어요. 그리고 자신의 계획에 저를 포함하려고 했죠.”
“…….”
“저는 거절했어요. 하지만 점점 정도가 지나치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도련님이 엄청난 성장을 이룬 거예요.”
“김 비서.”
“무엇보다 도련님을 두고 저를 협박했어요. 제가 그 사람의 제안을 받지 않는다면 도련님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저는 도련님을 지키고 싶었어요!”
그제야 나는 김 비서가 남모르게 받아왔던 고통을 알게 됐다.
그녀가 받아왔던 고통을 생각하니 지태완을 정말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도련님.”
“…….”
“저는 도련님의 사람이죠?”
담담하지만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본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러다가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도, 도련님……?!”
“걱정마. 내가 어떻게든 지켜줄 거니까. 앞으로 누구라도 김 비서를 건드는 놈이 있다면, 그놈은 사는 것 자체가 두렵게 만들어줄 거야.”
“……도련님.”
“반드시 약속할게.”
그녀가 내 등에 손을 올렸다.
따뜻한 그녀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런 그녀를 나는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눈앞에 영상이 하나 펼쳐졌다.
-드디어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군. 현명한 선택이야.
-당신과 결혼하면, 도련님, 아니, 지태훈을 석방해 준다는 약속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물론이지. 그 대가로 우리가 힘을 합치는 거니까.
짧지만 강렬한 영상이 사라졌다.
‘이게 무슨……!’
지난번 이태수를 만났을 때 겪었던 일을 또 겪었다.
그리고 눈앞에 영상은 그 어느 때보다 충격을 줬다.
‘그러니까, 회귀 전에 김 비서가 나를 떠났던 이유가 설마……!’
나를 살리기 위해, 그녀는 지태완과 원치 않은 결혼을 했던 것이다.
그동안 궁금했던 이유가 단번에 풀렸다.
이 영상이 진실이라면, 그녀가 왜 나를 떠났는지 보여준 것이다.
“크윽.”
“도련님?”
“형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나는 더욱 지태완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가 생겨 버렸다.
* * *
“자, 다시 한 번!”
“크으윽!”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이태수는 이를 악물고 재활훈련에 힘쓰고 있었다.
이태수는 더 이상 선수 생활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우울증에 자살시도까지 했었다.
하지만 미리 알아차린 지인의 도움을 받은 그는 다시 힘을 내서 재활에 힘쓰기 시작했다.
“점점 좋아지고 있어요.”
“다행이네요.”
나는 재활하는 이태수를 멀리서 몰래 지켜보며 담당의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 실례가 안 된다면, 이렇게까지 환자를 위해 해주시는 이유가 뭔지 궁금합니다만.”
“그건…….”
“아! 말하고 싶지 않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그저 개인적인 궁금증일 뿐, 굳이 답변을 들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이태수의 치료비용은 내가 다 지원하고 있었다.
물론 이 사실을 이태수는 알지 못했다.
‘그는 장래에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를 강타할 엄청난 인재야. 그가 제대로 설 수 있도록 도와줘야해.’
망할 큰 형이 저지른 일 때문에 사람 인생이 꼬였다.
하지만 내가 본 영상 속에서 이태수는 이 일을 계기로 엄청난 인재로 성장한다.
하지만 이걸 이태수 혼자 다 감당할 수 없었다.
그가 제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나는 비밀 후원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석 회장님.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말하게. 자네 부탁이라면 최선을 다해 들어줘야지.”
차기 시즌 메인스폰서 자격을 취득한 이후로 석정원 회장은 완벽하게 나에게 호의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이태수의 미래를 부탁했다.
“저는 청탁 같은 거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만, 처음으로 회장님께 청탁이란 걸 해보네요.”
“……혹시 이태수 때문인가?”
“네. 그가 재활 이후에 코치직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세요.”
“코치 자리 하나 만드는 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네만…… 이렇게까지 자네가 뒤에서 챙겨주는 이유가 궁금하네.”
석 회장도 궁금하겠지.
나는 모든 걸 말할 수 없지만, 약간의 이유만을 말했다.
“제가 봤을 때, 그는 향후에 대한민국을 넘어 엄청난 인재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말인가?”
“네. 제가 가진 신용을 걸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허어.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알겠네. 자네 부탁을 들어주겠네.”
그렇게 이태수의 코치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일은 많은 변화를 일으키는 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그게 얼마만큼의 큰 변화로 다가올지 잘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