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대표님. 모시러 왔습니다.”
두바이에 도착한 나를 용준형 사장이 마중을 나왔다.
나는 그런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칼리드 왕자가 사람을 보내준다고 들었는데 왜 사장님께서 오신 거죠?”
“사람 보내준다고 하는 걸, 그냥 제가 가겠다고 해서 왔습니다. 그게 좀 더 모양새가 나을 것 같아서 말이죠.”
“그렇군요. 그런데 여기 사장님만 계신가요? 분명…….”
“김 이사도 곧 올 겁니다. 잠깐 화장실을 간다고 해서요.”
“아아.”
나보다 이틀 먼저 두바이에 도착해서 칼리드 왕자를 만난 용준형이었다. 그런데 용준형 말고도 한 사람이 더 함께했다.
“왔나.”
“아. 이사님.”
“기다리느라 지쳐 죽을 뻔했다.”
“아하하.”
화장실에 갔다가 뒤늦게 나타난 김진철 이사였다.
정확히 말하면 영신전자 이사가 아닌, TH투자 회사의 이사로 영입된 김진철 이사님이시다.
영신건설의 매각이 확정된 이후 김진철은 이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대외적인 사퇴 이유는 전대 회장의 사망 이후 세대교체라는 명분을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내가 운영하는 법인 회사에 합류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영신건설과 함께 넘어온 용준형 사장까지 합류하면서 나는 아버지의 왼팔과 오른팔을 모두 흡수했다.
그런 다음 우리의 첫 공식 업무가 바로 이번 UAE 건설 수주였다.
영신건설 인수를 확정 짓자마자 칼리드 왕자가 공식적으로 우리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우리는 일을 마무리 짓고 최대한 빠르게 이곳 두바이로 온 것이다.
“아빠. 이제는 도련님이 아빠 상관이야. 태도가 그게 뭐야?”
“끄응. 너는 아빠보다 저 녀석이 먼저냐?”
“아빠!”
“끙. 알았다. 알았어. 대표님, 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김 비서의 잔소리에 김진철 이사는 마지못해 태도를 바꿨다.
그렇게 우리는 칼리드 왕자 측에서 마련해준 고급 승용차를 타고 이동했다.
직접 운전하던 용준형 사장이 말했다.
“대표님께서는 어떻게 칼리드 왕자하고 알고 지내시게 된 겁니까?”
“으음. 사연을 말하자면 조금 긴데, 간단하게 말하면 장문의 메일을 보냈죠.”
“……?”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두 사람은 어리둥절했다.
“도련님의 말씀이 사실이에요. 처음에 메일을 보냈더니 칼리드 왕자가 두바이로 초대를 해줬어요. 그게 이렇게까지 온거구요.”
“믿을 수가 없군. 그 대단한 두바이 왕자가 고작 메일 하나로 보자고 하다니.”
김진철 이사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드러냈다.
아마 전후 사정을 모르는 내가 들어도 믿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회귀를 경험했던 나는 칼리드 왕자가 원하는 니즈를 정확하게 파악했고, 거기에 맞춰 메일을 보냈을 뿐이다.
실제로 그렇게 빠르게 반응을 보여줄 거라고 예상 못 했지만.
“다 왔군요.”
칼리드 왕자의 저택에 도착했다.
지난번에 봤던 그 웅장한 대저택을 다시 본 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때,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는 칼리드 왕자와 그 일행들이 눈에 들어왔다.
차를 멈추자 칼리드 왕자의 수행원이 내가 탄 차문을 직접 열어주었다.
차에서 내리자 칼리드 왕자가 상당히 밝은 얼굴로 나에게 다가와 포옹하며 말했다.
“오! 나의 형제여! 어서 오게! 자네를 만날 날을 무척 기다렸네!”
“잘 지내셨습니까?”
“물론이네. 자네도 잘 지냈는가?”
“잘 지냈습니다.”
“하하하! 이러지 말고, 들어가지. 자네를 위해 준비한 것들 있네!”
“네. 가시죠.”
* * *
밝은 얼굴로 대화를 나누며 안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용준형이 감탄했다.
“저렇게 웃는 얼굴로 이야기하던 사람이었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을 듣게 된 김 비서가 반응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장님?”
“저하고 김 이사님이 왔을 때, 칼리드 왕자는 무척 얼음장처럼 차가웠습니다. 괜히 아랍 왕자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
“근데 우리 대표님을 만나고 사람이 저렇게 바뀌는군요. 허. 정말이지. 두 분 사이가 대단하군요.”
용준형의 말에 김 비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랍 왕자가 저렇게 친근하게 대할 정도로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새삼 지태훈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도련님이 점점 크게 보여.’
언제부터였을까?
지태훈의 존재가 크게 느껴졌다.
마치 하나의 산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산이 그녀에게는 마음의 안식처처럼 다가왔다.
그런데 그런 기분을 그녀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고양 유나이티드 사람들도 그녀처럼 느끼고 있었다.
“제법이군.”
“네?”
김진철의 중얼거림에 김 비서가 반응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도 들어가자.”
“가시죠.”
그렇게 세 사람도 뒤따라 들어갔다.
* * *
우리는 칼리드 왕자로부터 성대하게 대접받았다.
온갖 산해진미로 가득한 음식과 술을 먹고 마셨다.
그뿐만 아니라 멀리서 온 여독을 풀 수 있게 마사지도 받았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칼리드 왕자와 단둘이 만났다.
야심한 시각에 남자 둘이 만나는 모습이 이상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업무적인 이유로 만났다.
“자네가 먼저 보낸 사람들과 앞서 이야기는 나눴네. 제법 준비를 잘 해왔더군. 아주 만족스러워.”
“만족스러우셨다면 다행입니다.”
“솔직히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였어. 누구의 기획인가?”
“제가 기획에 참여했습니다.”
“호오. 역시 아우님이구만.”
칼리드 왕자가 웃었다가 곧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번 UAE 신도시 건립 사업에 들어가는 금액이 얼마인지 아는가?”
“어느 정도입니까?”
“8억 달러가 조금 넘네.”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8억 달러면 한화로 약 100조 정도 된다.
“이것도 기본 액수일 뿐이네. 언제든 추가 투자를 진행할 여지가 있지.”
역시 기름국은 규모가 다르구나.
도시 하나 만드는데 100조나 투자한다니.
“일전에 말했듯, 나의 형인 나바드가 끌고 온 기업이 이 사업에 동참하네.”
“알고 있습니다. 그 기업이 태조건설 아닙니까?”
“……그걸 어떻게 알았는가?”
칼리드 왕자는 정확히 어떤 기업이 들어올지 나한테 말하지 않았다.
“다 아는 방법들이 있죠.”
내가 이걸 알 수 있었던 것은 용준형 사장 덕분이었다.
용준형 사장은 자신의 모든 인맥을 이용해서 UAE 신도시 사업을 진행하는 건설사가 어디인지 알아냈다.
워낙 이 사업이 극비로 진행되다 보니 알아내기 어려웠지만, 결국엔 알아냈다.
그렇게 알아낸 곳이 태조그룹에서 운영하는 태조건설.
현재 대한민국 부동의 1위 건설사였다.
중동에서 건설 대박을 일으켜서 대기업까지 간 건설사다.
‘그러고 보니 그 회사 회장의 첫째 아들이 축구 선수 출신이었다고 했나?’
용준형 사장이 전달해준 정보에 그런 기록이 있었던 걸로 기억했다.
“기본적으로 한국의 건설사들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편이야. 그중에서도 태조건설은 다른 한국 건설사들보다 훨씬 더 높은 신뢰를 받고 있지.”
“어째서 그렇습니까?”
“태조건설의 회장이 만들어 낸 업적들 때문이지.”
나는 태조건설이 그냥 건설 대박을 일으켰다 정도로 알지 자세한 상황까지 알지 못했다.
“태조건설이 우리에게 절대적 신뢰를 얻었던 계기는, 과거 내전으로 파괴된 시리아의 도시를 완벽하게 재생시켰기 때문이야.”
“그런 일이 있었군요.”
“우리에게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지. 한국의 건설사들이 훌륭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전쟁으로 없어진 도시를 새것으로 만들었으니 말이야.”
아아, 기억났다.
내가 아직 어렸을 적, 태조건설이 중동에 어느 지역을 완벽하게 바꿨다는 말을 들었었다.
덕분에 시리아는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할 수 있었고, 복구된 도시는 시리아의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는 게 떠올랐다.
“내일 나바드와 태조건설의 회장이 직접 국왕을 알현할 예정이야. 우리도 함께 참여할 예정이고.”
“……!”
이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지금 알려주는 걸까?
“자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네.”
“괜찮습니다. 상대가 누구든 어차피 경쟁은 불가피하니까요.”
우리도 만반의 준비를 했다.
상대에 밀리지 않게 진행할 자신이 있다.
“내가 이래서 우리 아우님을 좋아할 수밖에 없어.”
칼리드 왕자가 미소를 지었다.
“내일 잘 부탁하지.”
* * *
다음날, 우리는 칼리드 왕자와 함께 알 나흐 국왕을 알현하기 위해 왕궁으로 향했다.
“여기가 두바이 왕족들이 사는 왕궁인가. 대단하군.”
“대단하군요. 중동에 몇 번 온적은 있지만 왕궁을 온 적은 처음입니다.”
김진철과 용준형이 왕궁을 보고 감탄했다.
나와 김 비서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왕궁의 위용에 감탄했다.
삼엄한 경비를 통과한 우리는 알 나흐 국왕이 있는 건물 앞에 내렸다.
건물을 지키는 병사들이 칼리드 왕자를 보고 반응했다.
“왕자님! 어서 오십시오!”
“수고가 많군.”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있었다.
“칼리드.”
“나바드.”
“칼리드, 형이라 불러야지.”
나바드는 전체적으로 길쭉했다.
그는 키도 크고 얼굴도 길었고 콧수염도 길었다.
풍채가 좋은 칼리드 왕자하고는 비교가 됐다.
잘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땐 두 사람이 형제가 맞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런 나바드 옆에 50대 정도로 보이는 한국인이 있었다.
중절모에 정장을 갖춰 입은 중년의 한국인이 나를 보더니 눈썹을 꿈틀거렸다.
우리가 서로를 쳐다보고 있자, 나바드가 그를 소개했다.
“여기는 우리의 사업을 위해 모셔온 태조건설의 이진호 회장이라네.”
꼿꼿한 인상을 지닌 이 한국인은 바로 태조건설을 이끄는 이진호 회장이었다.
“태조건설 회장 이진호입니다.”
“저는 고양 유나이티드의…….”
이진호가 내 말을 끊고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지태훈 대표 맞죠?”
“아, 넵. 저를 아십니까?”
말을 끊는 그의 행동이 조금 불쾌했지만,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은 행동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러자 그는 여전히 꼿꼿한 인상으로 말했다.
“알다마다요. 내 아들 녀석이 지금 축구 선수 하겠다고 있으니 말이죠.”
“…….”
“그깟 공놀이가 뭐 좋다고 그러는건지.”
그깟 공놀이?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김진철 이사가 나섰다.
“회장님. 말씀이 조금 지나치시군요.”
“아, 실례했습니다. 그쪽은…….”
“김진철입니다.”
“김진철? 설마 영신그룹의 김진철 이사?”
“그렇습니다만?”
“허어. 소문이 자자한 거물을 여기서 뵙는군요.”
“저에 대해 아십니까?”
“모를 수가 있나요.”
이진호는 김진철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그는 어떤 행동을 해왔기에 만나는 사람마다 저렇게 놀라는 걸까?
곁에 있던 김 비서가 머쓱해하는 것이 보였다.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거겠지.
“서로 다 아는 사이들인 것 같군?”
“그건 아닙니다.”
나바드 왕자의 물음에 이진호가 단칼에 아니라고 대답했다.
와, 말로 베이겠다.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데, 이진호가 나바드에게 말했다.
“가실까요. 왕자님.”
“그렇게 합시다. 계속 이러고 있으면 아버님이 기다릴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나바드가 고개를 돌려 칼리드 왕자를 향해 말했다.
“너도 계속 그러고 있을 텐가?”
“흠.”
칼리드 왕자가 미간을 좁히더니 고개를 돌려 우리에게 말했다.
“우리도 가세.”
“네.”
그렇게 우리는 왕이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