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아버지의 장례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잘 치를 수 있었다.
정말 많은 사람이 빈소를 찾았다.
전·현직 대통령과 국회의원들 그리고 해외에서도 꽤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 찾아왔다.
더 놀라웠던 것은 칼리드 왕자의 깜짝 방문이었다.
“내가 너무 늦은 건 아닌가 모르겠군.”
“왕자님.”
“고인의 명복을 비네.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걸세.”
“고맙습니다.”
아랍 왕자의 등장으로 빈소가 술렁이기는 했지만, 금방 왕자의 사람들이 주변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그때 지태완이 칼리드 왕자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반갑습니다. 지태완 회장입니다. 저희… ‘구면’이죠?”
구면이란 것을 강조하면서 나를 슬쩍 보는 지태완.
이러면 내가 흔들릴 줄 알았나?
미안하지만 이미 나와 왕자의 관계는 그걸로 흔들릴 사이가 아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회장에게 볼일이 없어서 말이야. 이만 실례하지.”
“……!”
칼리드 왕자의 패싱에 지태완의 표정에 금이 갔다.
충격을 받아 멍하니 있는 그를 보며 속이 시원했다.
그렇게 장례를 끝내고 나니 A매치도 끝났다.
A매치에서 돌아온 장현우가 나와 마주치고 말을 걸었다.
“대표님. 죄송합니다.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국가대표 경기에 집중하셔야죠.”
“장례는 잘 치르셨나요?”
“네, 덕분에 잘 치렀습니다.”
“다행이네요.”
A매치 기간이 끝난 그 주 주말에 바로 리그 경기가 재개되었다.
4라운드 대결 상대는 수원 유나이티드였다.
K리그1에는 2개의 수원이 존재했다.
수원 블루와 수원 유나이티드.
같은 수원을 연고지를 두고 있는 두 팀의 분위기는 상당히 달랐다.
과거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까지만 해도 수원 블루가 레알 수원이라 불렀던 적이 있을 정도로 잘나갔었지만, 지금은 수원 유나이티드가 잘나가고 있었다.
수원 유나이티드는 이번 시즌 아시아챔피언스리그 티켓을 확보하기 위해 보강을 단단히 한 팀이었다.
그런 팀을 홈으로 불러들인 고양은, 이날 경기에서 검은 완장을 착용했다.
『고(古) 지종윤 회장님에 대한 추모가 있겠습니다. 모두 묵념.』
내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한때 이 팀의 구단주였던 사람이었다.
고양 유나이티드는 경기 시작 전에 추모행사를 기획했다.
수원 유나이티드에서도 협조를 해줬다.
양 팀 선수들과 팬들이 모두 경기 시작 전에 묵념하며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모했다.
경기장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에는 검은 바탕에 아버지의 얼굴이 비춰지고 있었다.
지종윤 (1954~2027) 향년 73세
전광판에 나타난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주먹을 쥐고 몸을 떠는 내 곁에 김 비서가 다가와 내 손을 잡아주었다.
중계 카메라도 그런 나를 잡아주었다.
『고(古) 지종윤 회장의 아들이기도 한 지태훈 고양 유나이티드 대표의 모습이 지금 화면에 나오고 있는데요. 지금 기분이 많이 복잡할 거예요.』
『그렇죠. 저도 예전에 아버님을 보내드릴 때, 정말 그 기분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슬펐거든요.』
추모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지 않은 추모에 많은 이들이 함께 해줘서 너무나 감사했다.
삐익!
『경기 시작합니다! 2027 더블은행 K리그 4라운드, 고양 유나이티드 대 수원 유나이티드의 전반전 경기가 시작됩니다! 화면 왼쪽 노란색 유니폼을 입은 팀이 고양 유나이티드고요, 오른쪽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쪽이 수원 유나이티드입니다.』
곧 주심의 휘슬과 시작된 경기.
경기는 시작부터 치열했다.
원정팀 수원 유나이티드가 빠르게 우리 진영으로 넘어와 공격을 주도했다.
시작하자마자 위태로운 상황을 맞이할 뻔했지만, 박지원 골키퍼의 선방과 라시모프의 파이팅 넘치는 수비 덕분에 위기를 잘 넘겼다.
이후 우리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이날 처음으로 선발로 출전한 한석원은 박형우를 대신해서 상당히 인상적인 플레이를 선보였다.
“석원아!”
후방에 있던 김지우의 긴 롱볼 크로스를 가볍게 받아낸 한석원이 개인플레이로 수원 유나이티드 선수들을 농락했다.
라리가 출신다운 플레이에 홈팬들이 환호했다.
팡!
기어코 슈팅까지 만들어 낸 한석원은 박수를 받았다.
그러자 같은 팀 동료들도 자극을 받고 투지 넘치는 플레이로 수원 유나이티드를 상대했다.
그렇게 전반전을 치르는 사이, 정규 시간이 27분을 가리킬 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짝짝짝짝짝짝.
갑자기 고양 유나이티드의 모든 홈팬들이 자리에서 기립하고 박수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고양 유나이티드 서포터스 측에서 27분에 고(古) 지종윤 회장을 추모하는 박수를 보내기로 했다고 하네요.』
『오, 지금 보니까 지태훈 대표가 깜짝 놀라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는데요. 몰랐던 모양인 거 같은데요?』
『어? 그런가 보네요. 지금 옆에 있는 비서분이시죠? 그분이 설명해주네요.』
“이게 무슨 일이야?”
“대표님을 위해 모두가 준비했어요. 회장님을 기리기 위한 추모 박수예요.”
“뭐?”
거짓말 안 하고 순간 눈물 나올 뻔했다.
나도 모르게 이런 일을 기획하다니.
“근데 왜 27분이야?”
“2027년에 돌아가셔서…… 처음에는 73분으로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너무 늦을 거 같다고 해서요.”
시간이 무슨 상관인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그때, 서포터스들이 힘차게 외쳤다.
지-종윤-!
지종윤! 지종윤! 지종윤!
서포터스 회장인 박태준의 선창에 힘입어 서포터스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후창했다.
지태훈-!
지-태훈! 지태훈! 지태훈!
이어 내 이름도 나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포터스들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린 다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 모습이 모두 중계 카메라에 고스란히 잡혔다.
『정말 아름답고 멋진 모습입니다. 서포터스가 보여 주는 믿음과 그 믿음에 감사히 인사하는 구단주의 모습. 제가 수십 년 동안 축구를 중계하면서 이런 광경은 처음 보네요.』
『그렇습니다. 해외 축구에서도 과연 이런 일이 있었을까 싶네요.』
그리고 그날 경기는 고양 유나이티드의 1:0 승리로 끝났다.
후반 3분, 한석원의 감각적인 킬패스를 받은 나탈이 수비 2명 사이를 뚫는 땅볼 슈팅으로 득점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득점이 곧 결승골이 되었다.
그렇게 득점 이후 펼쳐진 세레머니는 나를 또 한 번 감동하게 만들었다.
득점을 기록한 나탈을 포함해서 카메라 앞에 모인 선수들이 상의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흰 티셔츠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대표님 힘내세요!】
나는 정말 행복한 구단주가 맞을 것이다.
* * *
“솔직히 믿기지 않습니다.”
“네?”
“우리 팀이 지금 리그 1위라는 사실을요.”
“하하!”
4라운드가 끝났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리그 1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단독 1위다.
같은 날에 각각 경기가 있었던 전북과 울산이 나란히 비겨버린 덕분이다.
스마트폰 화면을 보며 믿을 수 없어하는 나를 향해 천지원 부장이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 덕분에 선수단 분위기도 좋습니다.”
“그렇겠죠.”
이 분위기가 시즌이 끝날 때까지 쭉 이어가면 좋겠지만, 아직 시즌 초반이다.
언제까지 이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시작이 좋다.
“지난 시즌에 승격했던 안양이 5연패 후 가까스로 1승 했던 것과 비교하면 우리는 상당히 좋습니다.”
그렇다.
최근 5년간 역대 승격 팀들의 상황이 썩 좋지 못했던 것을 보면, 지금 우리는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미디어에서도 그런 우리를 집중 있게 다루고 있었다.
“솔직히 저희 팀 스쿼드가 그렇게 부족하지도 않고요.”
“맞습니다. 게다가 지원도 이 정도면 K리그, 아니, 어지간한 유럽 팀들하고 비교해도 꿀리지 않고요.”
다른 부장급 인사들이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그들의 말이 맞긴 맞다.
상당한 양의 돈을 쏟아부어 만들었으니까.
돈이 없었으면 해보지도 못했을 일들이다.
그래도 너무 들떠있는 건 좋지 않다.
“여러분의 기분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아직 시즌 초반입니다.”
찬물을 끼얹을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있는 위치가 그런 자리니까.
“그건 그렇고 다른 일들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아, 넵. 안 그래도 보고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천지원 부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희 팀에 대한 홍보 효과는 최근의 이슈들로 인해 수직상승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잘됐네요.”
“특히 고양 시민들 사이에서 상당히 우호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습니다. 경기장을 방문하는 팬들이 늘어난 것 외에도, 구단에서 운영하는 구단 샵을 방문하는 인원들도 늘었습니다. 이 부분은 매출이 증명하고 있고요.”
구단 용품 판매율은 전년도 같은 월과 비교했을 때 무려 300% 이상 증가했다.
상당한 성과였다.
“현재 고양 특례시에는 3개의 프로스포츠팀이 존재합니다. 저희와 야구팀인 고양 버팔로, 농구팀인 고양 스낵스타 이렇게 있죠.”
“…….”
“이 3개의 프로스포츠팀 중에서 최근만 놓고 봤을 때 저희 팀에 관한 관심이 제일 높습니다.”
“훌륭하군요.”
천지원 부장에 이어 유지원 부장이 말을 받아서 덧붙였다.
“이러한 효과로 인해 저희에게 스폰을 문의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렇더군요. 올라오는 보고서만 봐도 문의하는 기업의 종류나 규모 모두 다르더군요.”
“그렇습니다. 이 상태가 얼마나 갈지 모르겠습니다만, 당분간 자금 걱정을 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구단의 자체 매출도 중요하지만, 외부 투자도 중요하다.
투자가 활발해야 구단 내에 도는 자금의 운용 폭이 커진다.
“지속적인 투자를 받을 수 있게 조치하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드러냈다.
“성과가 있는 만큼,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했습니다. 힘차게 저어보죠.”
“네!”
* * *
고양 특례시에는 꽤 많은 아시아 지역 외국인들이 자리를 잡고 살고 있다.
그중 중앙아시아 쪽, 즉 ‘~스탄’ 계열 쪽 사람들도 많았다.
당연히 우즈베키스탄 출신 사람도 있었는데, 라시모프는 그 사람들에게 있어 특급스타였다.
현역 국가대표 출신이면서 고양의 주축으로 활약하고 있는 라시모프의 활약 덕분에 그들은 낯선 타지 생활에서도 힘을 얻고 있었다.
“라시! 경기 매번 잘 보고 있다고! 이번에도 끝내주는 수비였어!”
“라시 덕분에 힘이 나! 하하하!”
똑같이 낯선 한국 땅에서 살아가던 라시모프도 같은 고향 사람들로부터 격려를 받으니 힘이 났다.
“이야~ 라시모프, 너 인기 많구나?”
같은 팀 외국인 동료들이나 한국 동료들도 라시모프의 인기에 놀랄 때가 많았다.
“한국 생활도 마음에 들어.”
처음 1년 정도는 적응하는데 고생을 좀 했었다. 하지만 같은 외국인 동료인 사무엘과 나탈의 도움과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무사히 잘 적응할 수 있었다.
라시모프에게 있어 한국 생활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그런 그에게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뭐, 뭐라고요!?”
어느 날, 고향에서 가족들로부터 전화를 받은 라시모프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됐다.
“어머니가 쓰러져?”
-라시모프. 한국까지 가 있는 너에게 이런 소식을 전해서 미안하다. 그런데 어머니의 상태가 좋지 않아.
“이, 이럴 수가!”
지금의 라시모프가 있을 수 있게 헌신적인 도움을 줬던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치료받으면 괜찮아지실까요?”
-그게…… 이곳에서는 치료가 어렵다는 연락을 받았어.
“……!”
우즈베키스탄의 열악한 의료시설로는 어머니를 치료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나왔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라시모프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아직. 아직 희망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