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대표님. 지태완 회장이 이사회를 연다고 합니다.”
“이사회요?”
급하게 진행한 용준형 사장과의 화상 회의에서 그가 전한 소식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 정기 이사회에서 영신건설 매각과 관련된 이야기가 진행된다고 합니다.”
“흐음. 사장님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아무래도 지태완 회장이 쉽게 영신건설을 넘겨줄 생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지니고 갈 수도 없고요.”
“계륵이죠.”
“맞습니다. 어차피 이사회에 나온 의견에 맞춰 영신건설의 매각 여부를 결정할 겁니다.”
나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이사회에서 영신건설의 매각을 반대할 사람이 있을까요?”
“거의 없을 겁니다. 애초에 이사회 일원 사이에서 영신건설에 대해 좋은 시각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사장인 저마저도 매각을 찬성한다면, 큰 문제 없이 매각 결정에 동의할 겁니다.”
“그래도 혹시 모를 변수에 대비하죠.”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용준형 사장과 화상 회의를 마쳤다.
“후우. 건설사 인수는 그래도 어떻게든 되는 것 같군.”
여차하면 김진철 이사의 도움까지 받으면 문제없이 영신건설을 인수할 수 있을 것이다.
“설마 칼리드 왕자는 이런 상황마저 예측하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칼리드 왕자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인물일 것이다.
“아니야. 칼리드 왕자가 되게 똑똑한 것처럼 보여도 묘하게 허술한 부분도 있었어.”
나는 애써 부정했다.
그때, 유지원 부장이 대표실로 들어왔다.
“대표님.”
“아, 부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레버쿠젠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혹시 저희와 레버쿠젠 간에 유소년 교류를 진행하지 않겠냐고요.”
“네?”
“자세한 내용은 조금 전에 제가 메일로 보냈습니다.”
“잠시만요.”
나는 바로 메일함을 열었다.
그러자 유지원 부장이 전달로 보낸 메일이 하나 들어왔다.
독일어로 된 원문과 한글로 번역된 2개의 내용이 함께 있었다.
내용을 쭉 읽어보던 나는 살짝 감탄했다.
“그러니까 메일 내용에 따르면 저희 쪽에서 키우고 있는 유소년 팀들 중에서 프로 데뷔를 앞둔 고등학생들을 레버쿠젠 유소년팀과 친선 대결을 하자?”
“네, 맞습니다.”
“괜찮네요. 보니까 항공권하고 숙박비 모두 지원해준다고 하고.”
“네. 친선 경기는 총 2번에 걸쳐서 진행하자고 하더군요. 첫 번째 경기는 독일에서 진행하고, 두 번째 경기는 한국에서 진행하자고 하고요.”
“유소년들의 성장도 중요하니, 이런 교류는 오히려 우리 쪽에서 환영이죠.”
“그럼 진행할까요?”
“네. 이건 따질 것도 없네요. 레버쿠젠에 연락해서 진행하자고 말하세요.”
“알겠습니다.”
유지원 부장이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밖으로 나갔다.
급한 업무를 끝낸 김에 잠깐 숨을 좀 돌리고 있는데, 갑자기 김 비서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도련님!”
“무슨 일이야?”
다급하게 내 앞으로 뛰어온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나는 순간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불길함은 그녀의 입을 통해 현실로 드러났다.
“회장님께서…… 회장님께서……!”
“젠장!”
나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서둘러 아버지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 * *
“아버지!”
병실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 곁에는 박준후 팀장과 담당의와 병원장이 함께 있었다.
“도련님.”
박준후 팀장이 전과 달리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소 표정에 변화가 없던 그의 슬픈 얼굴이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회장님과 도련님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저희는 잠시 물러나 있겠습니다.”
박준후 팀장은 그렇게 말하고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
함께 따라 들어온 김 비서도 머뭇거리다가 나가려고 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김 비서는 가지 마.”
“도, 도련님.”
“제발.”
무섭고 두려웠다.
이미 한번 겪은 일이지만, 이 일을 또 겪는 것은 정말 무섭고 두려웠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막상 또 겪으려니 도저히 이 상황을 혼자서 감당할 수 없었다.
“알겠어요. 여기 있을게요.”
결국 김 비서가 남았다.
그 상황에서 나는 천천히 아버지 곁으로 다가갔다.
창백한 얼굴.
점점 가빠져 오는 숨.
누가 봐도 점점 생명의 끈이 다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왔느냐.”
천천히 눈을 뜬 아버지가 나를 바라봤다.
“면목이 없구나. 너에게 많은 것을 해주지 못했는데.”
“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일어나셔야죠. 일어나서 저하고 같이 식사하셔야죠. 네?”
“……미안하구나.”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에는 슬픔과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손을 꽉 잡은 나는 눈물이 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아버지. 제발.”
아버지의 손에 얼굴을 묻고 나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흐느꼈다.
그런 나를 향해 아버지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태훈아. 내가 가장 믿고 있는 나의 막내아들아.”
“네, 아버지.”
“영신의 미래가…… 너에게…… 달렸다.”
“……!”
점점 숨이 끊어져 가는 아버지는 나에게 영신그룹의 미래를 부탁했다.
“유리야.”
“네, 회장님.”
뒤에서 나와 함께 흐느끼고 있던 김 비서가 아버지의 부름에 즉각 반응했다.
“내 아들을…… 부탁한다.”
“네, 회장님. 걱정 마세요.”
그 말을 끝으로 아버지가 눈을 감으셨다.
삐이이이---.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빠! 아빠아아아!”
“회장님!”
심장박동 수치가 ‘0’이 되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부르짖었다. 내 목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병실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급하게 심폐소생을 하며 아버지의 상태를 살피던 담당의가 얼마 안 가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운명하셨습니다.”
“아아!”
“회장니이이임!”
지종윤 회장.
향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크흐으윽!”
회장의 사망에 박준후를 비롯한 최측근들은 목놓아 울었다.
나도 눈물과 콧물을 쏟아내며 울었다. 그런 나를 김 비서가 품에 안고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그날, 세상 사람들은 영신 그룹 2대 회장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 * *
나는 상복을 입고 있었다.
국내에 내로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조문을 왔다.
“힘내시게. 지 대표.”
석정원 회장이 멍한 얼굴을 하는 나를 안타까워하며 위로했다.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자마자 제일 먼저 달려온 이가 바로 석정원 회장이었다.
이후 김진철과 용준형이 나를 위로했다.
“애송이. 아니, 지태훈 대표. 회장님은 너를 믿었다. 슬픔을 오래 갖지 마라. 회장님도 그걸 바라지 않으실 거다.”
김진철은 처음으로 내게 애송이가 아닌 지태훈 대표라는 직함을 불러주며 말했다.
걱정이 담긴 그의 진심이 내 마음을 울렸다.
이어 용준형이 말했다.
“비록 회장님은 떠나셨지만, 회장님이 남기신 유산이 바로 저희입니다. 부디 힘내시지요. 대표님.”
“두 분 다 고맙습니다.”
진심을 다해 고마움을 표하자, 김진철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나와 용 사장이 네 곁에 있을 거다. 혹시나 저 망할 자식이 무슨 짓이라도 걸어오면 안 되니까.”
김진철은 눈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상복을 입고 상주 노릇을 하는 지태완이 있었다.
그는 슬퍼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상당히 소름 끼치게 다가왔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그의 행동에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의 지태완은 그 누구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누구도 알지 못하게 조용히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아, 천 부장님.”
“소식 듣고 바로 왔습니다. 제가 제일 먼저 선발대로 왔고, 다른 직원들도 업무가 끝나는 대로 바로 이곳으로 올 겁니다.”
“고맙습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힘내십시오. 대표님.”
천지원은 내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위로했다.
이 외에도 많은 이들이 왔다.
“설마 자네가 먼저 갈 줄이야. 가더라도 내가 먼저 갈 줄 알았건만.”
백우진 천산 그룹 명예 회장이 휠체어를 타고 등장했다.
그는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보고 황망해 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곁에는 백태현이 있었다.
“브로.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괜찮아?”
“…….”
내가 말없이 씁쓸한 표정만을 드러내자, 곁에 있던 백우진이 백태현을 향해 한마디 했다.
“호들갑 떨지 마라. 이것아.”
“아, 아버지.”
“이보게, 지태훈이. 아니, 지 대표.”
백우진이 휠체어를 탄 채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며칠 전에 네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네? 아버지가요?”
“그래.”
아버지가 백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니. 무슨 이유인 걸까.
그런데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천산그룹은 너의 편이 될 게다.”
“……!”
“네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이더구나.”
아.
나는 또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래, 아버지는 남모르게 나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셨다.
그걸 뒤늦게 깨달은 나는 울컥한 것이다.
“힘내거라. 지 대표.”
“감사합니다.”
백우진에게 감사를 표한 뒤, 옆에서 뻘쭘하게 있던 백태현에게도 고마움을 표했다.
“너도 와줘서 고맙다.”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친구잖아. 당연히 와야지. 진짜, 너 힘내라. 힘들면 연락하고.”
“그래. 고맙다.”
같은 망나니였던 백태현은 어느샌가 철이 들어, 이제는 한 기업을 이끄는 대표가 되어 있었다.
확실히 회귀 후에 많은 변화가 있던 것은 사실이다.
“태훈아!”
얼마 안 가 손지영도 찾아왔다.
그런 그녀의 곁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쪽이 지태훈 대표인가.”
“맞습니다. 근데 누구시죠?”
“나는 지영이 애비 되는 사람이네.”
“……!”
그제야 나는 이 눈앞에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됐다.
포마드를 발라 뒤로 넘긴 백발에 꼬장꼬장한 얼굴 그리고 다부진 체격을 지닌 이 남자가 바로, 현재 벽수그룹을 이끄는 손철 회장이었다.
명예 회장인 손건효의 뒤를 이어 그룹을 이끌고 있었다.
그런 그가 몸소 조문하러 온 것이다.
“소식은 들었네. 자네가 우리 딸하고 비즈니스적으로 아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아, 네.”
“흐음. 자네를 보니, 젊은 시절에 뵙던 지유환 회장님의 모습이 보이는구먼.”
“할아버지를 아세요?”
“알다마다. 사실 내가 종윤이하고 같은 고향이거든. 어린 시절에 종윤이하고 같이 몰래 지유환 회장님이 담가놓은 술을 꺼내 먹다가 들켜서 혼나기도 했지.”
“…….”
“물론 그때는 회장님도 지금처럼 큰 기업을 운영하던 때도 아니었지만, 돌이켜 보면 상당히 즐거운 추억이야.”
생각지도 못한 아버지의 옛날이야기였다. 그런 과거를 지니고 계셨구나.
“모쪼록 힘내게. 나중에 식사 한번 하지.”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계속 조문객을 받던 중, 김 비서가 등장했다.
그녀 또한 검은 상복을 입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응. 김 비서야말로 괜찮아? 괜히 나 때문에 힘들게 고생하고.”
“고생은 이미 도련님을 모실 때부터 시작했는걸요.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
“저는 도련님이 걱정이에요. 회장님이 돌아가신 후 한숨도 안 자고 계속 있으셨잖아요. 끼니도 잘 안 챙겨드시고.”
들켰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던 걸 김 비서는 당연하게도 꿰뚫고 있었다.
“알고 있었어?”
“제가 도련님 곁에 얼마나 있었는데요. 그걸 모르겠어요? 자, 이거 받으세요.”
그녀가 따뜻한 음료수 캔을 건넸다.
“일단 이거라도 드세요.”
“고마워.”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김 비서로부터 받은 음료수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