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아우, 죽겠다.”
술을 꽤 거하게 마셨다.
용준형 이 양반, 생각보다 술을 잘 마셨다.
애초에 낮술이다. 낮술에 독한 술은 더 확 취할 수밖에 없다. 그저 인사불성이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어으. 힘들어. 숙취해소제라도 먹어야겠어.”
“잠깐 편의점에 들를게요.”
“으응.”
김 비서가 가까운 편의점 앞에 차를 세우고 후다닥 뛰어갔다.
여전히 독한 취기에 빠져 허우적대던 나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끄응. 경기, 경기는 어떻게 됐지?”
아마 지금쯤이면 경기가 끝났을 텐데…….
“으, 졌나?”
눈앞이 흐릿하다.
글자와 숫자가 여러 개로 보였다.
눈에 잔뜩 힘을 줘서 화면을 보자 그나마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어?”
뭐야, 이거?
지금 내가 제대로 본 거 맞아?
그때 문이 열리고 김 비서가 차에 탔다.
덜컥.
“도련님. 여기 해소제 드세요.”
“으응.”
김 비서가 친절하게 뚜껑까지 열어준 해소제를 마셨다.
해소제를 마시니 속이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후우. 진짜, 이렇게 술 먹는 건 힘들어.”
“고생하셨어요.”
“근데 말이야. 김 비서.”
“네?”
“오늘 경기 어떻게 된 거야?”
“경기요?”
“응. 방금 내가 스코어를 봤는데, 믿을 수 없는 스코어를 봤거든?”
“잠시만요.”
김 비서가 황급히 스마트폰을 꺼내서 경기 결과를 확인했다. 곧 그녀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6:1?”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네?”
처음에 우리 팀이 대패한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확인해 보니 우리가 6:1로 이겼다.
“누가 골 넣은 거야?”
“박형우 선수가 전반 30분 만에 해트트릭을 했고, 후반에 사무엘, 라시모프, 박요한 선수가 골을 넣었네요. 중간에 대구한테 PK 실점을 당하긴 했지만요.”
“미쳤네. 왜 이렇게 잘해?”
보고도 믿기 어려운 결과다.
물론 우리 팀이 이긴 것은 기쁜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목표는 잔류였다.
근데 시작부터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이러다가 우승하는 거 아냐?”
“아직 시즌 초반이잖아요. 설레발은 금물이래요.”
“그렇긴 하지.”
김 비서 말대로 스포츠에서 설레발은 금물이었지만,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으~ 일단 술 깨고 하이라이트 봐야겠다.”
“네, 그렇게 하세요.”
김 비서는 다시 차를 움직였다.
운전하던 그녀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도련님. 하시던 일은 어떻게 됐나요?”
“응? 그거? 잘 됐어.”
“정말요?”
“어. 용준형 사장이 협력하겠데.”
“다행이네요.”
영신 건설을 인수하고 그 뒤, 칼리드 왕자로부터 받은 수주권으로 UAE 신도시 사업을 진행할 계획을 전달했고, 용준형은 우리에게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그 과정에서 용준형 사장의 사장 자리를 보전해 주기로 했어.”
“가능할까요?”
“뭐, 안 될 게 있나. 그렇다고 지금 당장 용준형 사장을 내치고 앉힐 만한 인물도 없고.”
“그렇긴 하죠.”
“그리고 아버지가 믿어보라고 한 사람이야. 막상 만나 보니까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인 것 같고.”
한번 믿음을 주고받으면 변하지 않을 인물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다.
중요한 사업을 진행하는데 이런 사람이 내 아군이 된다면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
“우욱.”
“앗! 토하시면 안 돼요!”
“으으으!”
일단 집에 가는 게 중요하다.
* * *
대구전 대승의 주역인 박형우가 경기가 끝난 이후 스포츠 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번 대구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면서 2경기 연속골에 2경 4골을 기록하셨는데요. 비결이 있을까요?”
“K리그1 수준이 높기는 하지만, 저희는 K리그2에서도 잘해왔습니다. 동료들도 옆에서 많이 도와줬고요. 그래서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요?”
박형우는 겸손한 자세로 동료들에게 공을 돌렸다.
기자도 그런 박형우에게 미소를 보였다.
“항간에 아시안컵에 대한 아쉬움으로 각성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박형우는 자신의 마지막 대표팀 경기였던 아시안컵 대회를 떠올렸다.
파죽지세로 결승까지 진출했던 대한민국 대표팀.
하지만 결승전에서 이란을 만나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했다.
“그때 일은 아쉬운 결과였죠. 맞는 말이겠네요. 비록 대표팀에서 은퇴하기는 했지만, 그때 제가 더 좋은 모습을 보였다면 반대의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르죠.”
“대표팀에 대한 미련은 없으십니까?”
“없습니다. 이미 저는 후회 없이 다 뛰었습니다.”
“그렇군요.”
“앞으로 저는 소속팀에 집중하며 선수 생활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집중할 것입니다.”
“좋은 모습 기대 하겠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 * *
용준형은 지종윤 회장과 만났다.
“그래, 내 아들내미는 만났다고?”
“네, 회장님.”
“막내아들이 자네를 불편하게 만든 건 아니고?”
그 말에 용준형이 고개를 저었다.
“불편이라니요. 오히려 막내 도련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
“네, 막내 도련님이 아주 훌륭하게 자라셨더군요.”
지종윤은 기분 좋은 미소를 드러냈다. 자식 칭찬 듣는데 기분 나빠할 부모는 거의 없다.
“근데 막내하고 무슨 얘기를 나눴는가?”
“그건…….”
“흠?”
수십 년간 자신에게 어떤 이야기도 숨기지 않았던 용준형이 처음으로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걸 본 지종윤이 눈썹을 꿈틀거렸다가 곧 화끈하게 웃어 재꼈다.
“설마 그 잠깐 사이에 평생을 함께하던 나를 버리고 막내 아들놈에게 갈아탔단 말인가! 으하하하!”
“회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치도 않습니다! 당장 회장님께서 명령하시면 이 자리에서 죽을 수 있습니다!”
용준형이 깜짝 놀라서 반응하자 지종윤이 웃으며 그를 말렸다.
“농담일세. 농담이야. 이거 자네한테 농담도 제대로 못하겠구만.”
“…….”
용준형은 얼굴을 붉히며 머쓱해했다.
“근데 무엇이 자네를 그렇게 만들었나?”
“그것이…… 막내 도련님에게서 초대 회장님의 모습을 봤습니다.”
“……!”
지종윤의 눈이 커졌다.
“정말인가?”
“네. 저도 처음에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초대 회장님께서 연설하신 이야기를 꺼내더니…….”
“허허허!”
지종윤은 허허 웃음을 흘렸다.
초대 회장이라니.
자신의 아버지를 닮았다고?
지종윤은 평생 아버지의 그늘을 쫓았던 사람이다.
그만큼 영신그룹 초대 회장 지유환은 신화적인 존재였다.
무일푼에서 시작해서 영신그룹을 만들어가는 것을 지종윤은 7살 때부터 보고 자랐다.
매일 변화하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빠르면서도 견고하게 변화하면서 성장하는 영신그룹, 그것을 이끄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였다.
평생 존경의 대상이 아버지였고, 어떻게든 아버지 같은 인물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수많은 형제 중에 회장의 자리를 물려받은 사람은 바로 지종윤이었다.
그렇기에 용준형이 하는 말은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를 닮았다니.”
확실히 그도 점점 달라져 가는 지태훈의 모습을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았다.
“용 사장. 아니, 준형아.”
“네, 회장님.”
“내가 살날이 머지않았다.”
“회장님!”
깜짝 놀라는 용준형과 달리 지종윤은 차분했다.
그는 용준형을 바라보며 묵직하게 말을 이었다.
“막내아들을 잘 부탁한다. 너에게 하는 내 마지막 부탁이다.”
“……!”
용준형은 지종윤의 단단한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 눈빛을 통해 생각을 읽은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을 꿇었다.
“저, 용준형이! 회장님의 부탁,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 * *
시즌 초반 고양 유나이티드는 돌풍의 팀이었다.
비록 2경기를 치렀지만, 디팬딩 챔피언 전북과 울산을 누르고 리그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물론 시즌이 이제 시작했기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2경기에서 9골을 쏟아내는 파괴력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런 상황에서 리그 3라운드에서 정말 막강한 상대를 만나게 됐다.
『고양 유나이티드가 전북 모터스를 만나게 됐습니다.』
『현재 전북 모터스를 다득점으로 누르고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고양인데요. 오늘 경기 결과에 따라서 1위 팀이 바뀔 수 있습니다.』
『고양의 기세가 상당히 대단한데요. 전북이 아무리 디펜딩 챔피언이라고 해도 얕봐서는 안 됩니다.』
고양 유나이티드는 원정에서 전북을 상대하게 됐다.
팬들 사이에서 ‘전주성’이라 불리는 전북의 홈경기장에는 초록 물결과 노란 물결이 서로 맞서 출렁이고 있었다.
양 팀 모두 승리 하나만 보고 맞대결을 펼쳤다.
그 결과, 모두의 예상을 깨는 상황들이 속출했다.
『전북의 브라질 듀오가 상당히 매서운데요. 산드루와 더글라스, 이 두 선수가 지난 시즌에 만들어 낸 공격포인트는 무려 37개나 됩니다.』
『역대 최강 듀오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오늘도 이 두 선수가 고양의 골문을 위협합니다!』
지난 시즌 전북의 득점왕 더글라스와 도움왕 산드루.
이 두 선수가 고양을 위협했다.
고양 유나이티드 선수들도 이 두 선수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선수는 생각보다 더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아! 김지우 선수에게 걸려 넘어진 산드루입니다!』
『주심이 VAR 체크를 진행하는데요! 아! 온 필드 리뷰까지 진행하는군요!』
『오! PK입니다! 주심이 찍었습니다!』
『시작하자마자 좋은 기회를 맞이하는 전북입니다!』
전반 5분 만에 PK 기회를 얻은 전북. 시작하자마자 앞서 나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얻었다.
PK 키커로 더글라스가 나섰다.
그런 더글라스를 박지원이 자세를 잡고 매의 눈빛으로 살폈다.
팡!
『더글라스 때리는데요! 아! 박지원이 막아냅니다!』
『박지원! 역시 고양의 수호신답습니다!』
『포효하는 박지원! 동료들이 다가가 박지원을 격려합니다!』
수호신 박지원이 더글라스의 슈팅을 정확히 예측하고 깔끔하게 잡아냈다.
이 한 방이 주는 영향은 대단했다.
자신감이 붙은 고양 유나이티드 선수들이 전북을 상대로 엄청난 역습을 펼쳤다.
『상당히 빠른 역습인데요! 박형우가 뛰어갑니다! 박형우! 박형우인데요! 박형우가 짧게 앞으로 패스합니다! 장현우인데요! 장현우 슈웃-!』
『우와아아! 골이에요!』
『득점하는 장현우입니다! 고양이 전북의 홈에서 1:0으로 앞서 나갑니다!』
모두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지난 시즌 FA컵에서 전북에게 처참하게 깨졌던 고양 유나이티드가 원정에서 선제골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전북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더글라스 슛! 들어갑니다!』
『와! 엄청난 중거리 슈팅인데요! 이건 아무리 박지원 선수라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페널티 박스 외곽에서 때린 더글라스의 중거리 슈팅이 그대로 고양의 골대 구석으로 빨려들어 갔다.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골이었다.
『전반 10분 만에 1:1이 됐는데요.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스코어는 1:1이 됐지만, 양 팀 선수들은 서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렇게 양 팀이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촤악!
“아악!”
동료로부터 공을 받은 박형우가 전북의 하프스페이스를 깊게 들어가다가 전북 선수에게 강한 태클을 당하고 바닥을 뒹굴었다.
“아아아!”
박형우가 다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뭐 해! 어서 들어가! 의무팀!”
“네, 넵!”
깜짝 놀란 곽찬구 감독이 의무팀에게 빨리 들어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주심도 경기를 중단하고 바로 의무팀을 투입하게 했다.
고양에게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