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할 일이 그렇게 없더냐.”
“에이, 그 무슨 섭섭한 말씀입니까.”
매주 최소 한 번씩은 병실을 찾아가고 있다.
아버지는 퉁명스럽게 반응해도, 사실 기분은 좋으셨다.
이걸 어떻게 아느냐?
박준후 팀장이 은밀하게 내게 전한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장님께서 도련님이 오시는 날을 기다리시는 것 같습니다.
그는 그저 이 한마디만 하고 사라져 버렸지만, 나는 저 말의 의미가 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개막전에서 대승을 거뒀더구나.”
“네. 경기 보셨어요?”
“그래. 보긴 봤다.”
“어떻던가요?”
“쯧. 이제 뭐 하나 해놓고 뭘 기대하는 거냐?”
“…….”
내가 실망스런 표정을 드러내자 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농담이다, 이 녀석아. 잘했다. 시작이 좋으니 다음에 진행할 일도 괜찮겠지.”
아버지의 말에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면서도 나는 점점 다가오는 아버지의 이별을 직감하고 있었다.
“아버지. 많이 야위셨어요. 식사는 챙겨드시죠?”
“먹기 싫은데 안 먹으면 박준후하고 김진철이가 아주 강제로 먹이려드니 안 먹을 수가 없더구나.”
“그렇게라도 드셔야 해요.”
날이 갈수록 아버지는 빠르게 살이 빠지고 기력이 없으셨다.
나는 알고 있다.
아버지가 회귀 전에 돌아가셨다는 걸.
그때도 병환으로 가셨다.
하지만 회귀 후에 그때보다 더 오래 살고 계셨다.
그래서 약간의 희망을 지니기도 했지만, 천명은 거스를 수 없었다.
“태훈아.”
“네, 아버지.”
“누구나 저무는 때가 있다. 그걸 거스를 수는 없다.”
“…….”
아버지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채신 모양이었다.
나는 아버지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아버지. 형은 제가 어떻게든 혼내겠습니다.”
“네가 그 정도 깜냥은 된다 생각하느냐?”
“냉정히 얘기해서 저 아니면 형을 혼내 줄 사람은 없을걸요?”
“글쎄다. 세상은 영원한 것이 없고, 무조건 답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더구나.”
“그러니 더더욱 제가 적임자겠네요.”
자신감 있게 이야기하자 아버지가 쿡쿡 웃으셨다. 뭐가 그렇게 즐거우신 건지.
안 그래도 지태완이 저지른 일들 때문에 여전히 내부에서는 이슈가 되고 있었다.
누군가는 ‘왕자의 난’ 또는 ‘정권 찬탈’이란 단어를 쓰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지태완의 세력이 거대하니 그것을 대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영신건설의 용 사장을 만난다는 얘기는 들었다.”
“어? 그걸 어떻게 아세요?”
영신건설 사장을 만나는 일은 극비에 해당하는 일이다.
누구도 모르게 은밀하게 진행하려던 일이 들켜버렸다.
“후후. 놀랐느냐?”
“…….”
“영신건설의 용준형 사장은 내가 회장에 오르기 전부터 함께했던 인물이다.”
“……!”
“김진철하고 입사 동기였지? 그 녀석도 말단부터 시작해서 사장까지 오른 인물이지.”
그랬구나.
그건 몰랐던 부분이다.
용준형 사장에 대한 조사를 맡겼던 김 비서도 보고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소신 있고 강단이 있는 인물이다.”
“네?”
“용준형, 그 녀석 말이다.”
“아아, 네.”
“네가 무슨 목적으로 그 녀석을 만날지 모른다만, 혹여 아군으로 끌어들일 생각이라면 꽤 든든한 지원군이 될 게다.”
아버지는 용준형 사장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 보였다.
안 그래도 용준형 사장을 만나서 영신건설을 인수할 생각이다.
사장까지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나직한 목소리로 뜻밖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영신건설의 용준형. 대한그룹 총수 석정원. 네 사촌인 시민당 의원 지태선. 그리고 현 대통령 후보 이현승.”
“……?”
“이 사람들 모두 내 사람들이다.”
“……!”
“이뿐이더냐. 김진철과 강민수. 이 둘도 모두 나의 사람이다. 밖에 있는 박준후도 마찬가지고.”
“……아버지,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글쎄…….”
아버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뒤늦은 후발주자인 너에게 최선의 선택지가 될 수 있는 카드를 쥐어 주는 것뿐이다.”
“……!”
“그걸 이용할지 안 할지는 네 몫이고.”
* * *
K리그1 2라운드 경기가 있는 날.
나는 그날 용준형 사장과 만났다.
“반갑습니다. 영신건설의 용준형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고양 유나이티드의 지태훈 대표입니다.”
용준형은 하얗게 물든 머리를 왁스를 발라 뒤로 넘긴 스타일에 상당히 강인한 인상을 지녔다.
안경 너머에 있는 단단한 눈동자는 마치 거대한 바위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그가 날 보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린 도련님께서 이토록 잘 컸으니 회장님께서 무척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 저 같은 노땅을 보자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노땅이라뇨. 아직도 한창이신 분이 그런 말씀 하시기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하하하.”
고급 한정식집에서 한 상 가득 음식들이 나왔지만, 솔직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태평하게 웃는 그의 반응 하나하나를 살피기 바빴다.
“회장님께서 건강이 악화하고 지태완이 회장직을 물려받으면서 회사가 위태롭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상당한 내부 구조조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도요.”
“그렇습니다.”
한숨을 내쉰 용준형은 내게 술을 따라주었다.
나는 그가 따라주는 술을 받은 뒤, 바로 이어서 술을 따라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손을 내밀며 거부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술을 먹을 분위기는 아니어서 말이죠.”
“음. 네.”
“저는 개의치 마시고 한잔 드시지요.”
“…….”
용준형의 태도는 무례했다.
하지만 그가 나를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술잔 속에서 은은하게 비치는 내 얼굴은 살짝 굳어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잠깐 눈에 담았다가 바로 술잔을 쥐고 마셨다.
꿀꺽.
그런 내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용준형이 눈을 빛냈다.
“술을 잘 드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이토록 잘 드실 줄은 몰랐군요.”
“술이야 없어서 못 먹었죠.”
“그렇습니까?”
“물론 지금은 다릅니다. 여유롭게 술을 마실 시간도 없고, 그렇게 하기에는 또 아깝습니다.”
“호오.”
용준형이 눈을 반짝였다. 그러다가 또 술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회장님께서 별말 없으셨습니까?”
그 한마디에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회장님께 보고한 사람이 용 사장님이셨습니까?”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저는 회장님의 사람이라 마땅히 보고를 드려야 하는 입장이라서요.”
여기서 말하는 회장은 우리 아버지 지종윤을 뜻하겠지.
아버지가 신뢰할 만하다.
허나,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다.
“용 사장님께서는 이 그룹의 미래를 어떻게 보십니까?”
“글쎄요. 저 같은 노땅은 그냥 남은 시간을 주어진 대로 잘 보내는 게 전부인지라. 아, 드시죠.”
나는 술을 또 한 잔 마셨다.
아까 처음 마셨을 때도 느꼈지만, 술이 상당히 독하다.
못해도 40도는 될 것 같았다.
목 안과 내장이 뜨겁다.
하지만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애썼다.
“저 같은 노땅보단 우리 젊은 도련님께서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겠군요.”
“제 생각이라…… 좋습니다. 그럼 말씀드리죠.”
“그럼 대답하기 전에 한잔 더 받으시죠.”
안주도 없이 2잔을 연거푸 비웠다.
이 잔이 3번째다.
말없이 잔을 받은 다음 마시지 않고 손에 쥐기만 한 상태에서 말했다.
“이 그룹은 이제 미래가 없습니다.”
“……!”
용준형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러다가 곧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되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미래가 없다니요.”
“영신그룹이 지태완의 손에 떨어진 이상, 이 그룹은 지태완을 위한 조직이 될 겁니다. 오로지 그가 가진 야망을 위해서만 부품처럼 돌아가겠죠.”
“어느 조직이든 수장으로 올라선 입장이라면 야망을 지녀야 정상이지 않겠습니까? 단순히 그런 이유로는 납득할 수 없군요.”
“정상적이지 못한 상황이니까요. 영신그룹은 대한민국을 넘어서 세계적인 기업입니다. 그런 기업이 누군가의 개인적 욕망으로 움직이게 둘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용준형은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칼날 같은 눈매로 나를 보며 물었다.
“그럼 우리 도련님께서는 어떤 생각으로 조직을 움직이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도련님도 개인적인 욕망으로 조직을 이끌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정말 날카롭다.
날카로운 대도로 베는 수준이 아니고 거의 찢어발기는 수준이다.
예전 같으면 이 기세에 짓눌려 찢겨 졌을 것이다.
나는 씨익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맞습니다. 저는 개인적인 욕망으로 조직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럼 대표님도 지태완 회장과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죠.”
“허허.”
“그런데 말입니다.”
“……?”
“저도 욕망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적어도 누구처럼 사람을 소모품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
“영신그룹의 창업자이자 저에게 있어 친할아버지인 지유환이 회사를 창립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용준형의 눈이 떨렸다.
“재물을 우선시하는 자는 재물에 의해 반드시 피를 볼 것이다. 명예만을 생각하는 자는 명예로 인해 피를 볼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
“사람도 배신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가야 의미가 있다. 사람과 사람을 위한 기업이 되자.”
“……그것이 우리 영신의 뿌리요, 최대 가치가 될 것이다.”
“맞습니다.”
지유환이 살아생전 직원들을 모두 모아놓고 얘기했던 연설이다.
이 말은 영상으로 찍혀 훗날 광고 영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전에 나왔던 광고다.
지금 이 말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영(煐)신(信).
밝게 빛나는 믿음.
그 믿음은 사람을 향한 믿음을 뜻했다.
“저는 그 가치를 지킬 생각입니다.”
용준형은 말이 없었다.
그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나?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 나도 무표정하게 있었다.
그런데 그때, 용준형이 아주 크게 웃어 젖혔다.
“으하하하하하!”
“…….”
뭐지?
왜 저렇게 웃어?
용준형은 눈물까지 보일 정도로 웃다가 겨우 진정하더니 내게 잔을 내밀었다.
“한잔 따라 주시죠.”
“네?”
“아무래도 한잔 마셔야겠습니다.”
“아, 넵.”
나는 공손한 자세로 술을 따라주었다. 용준형도 두 손으로 내 술을 받았다.
그리고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한잔하시죠.”
“네.”
짠.
잔과 잔이 부딪쳤다.
우리는 바로 술을 비웠다.
“도련님. 아니, 이제는 지태훈 대표님이라고 불러야겠군요.”
“편하게 불러 주세요.”
“아닙니다. 지태훈 대표님.”
아까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는 용준형이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눠 보죠. 원래 하시려던 이야기는 이게 아닐 거 아닙니까.”
“음. 그렇죠.”
적극적으로 나오는 용준형의 태도에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래도 잘 풀린 것 같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숨을 고른 다음 말했다.
“저는 영신건설을 인수하고자 합니다.”
“……!”
* * *
K리그1 대구 스카이FC 대 고양 유나이티드의 경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경기 전 전문가들은 호각 또는 대구의 우위를 점쳤다.
아무리 고양이 파주를 꺾었다고 한들, 대구는 지난 시즌에 리그 3위로 아시아챔피언스리그 티켓을 따낸 강팀이었다.
그런 팀을 상대로 고양이, 그것도 원정에서 상대하는 일은 쉽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경기는 모두의 예상을 깨는 결과로 흘러가고 있었다.
『박형우가 기어코 해트트릭을 기록합니다! 이번 시즌 K리그1 1호 해트트릭은 고양 유나이티드의 박형우가 만들어 냅니다!』
하프타임도 되기 전, 전광판은 3:0을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