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가고 아버지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런 침묵을 아버지가 먼저 깨트렸다.
“깨어나고 박 팀장으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러시군요.”
“내가 의식을 잃은 사이에 태완이가 회사를 장악했더구나.”
아버지는 언뜻 담담한 듯 보였지만 씁쓸함이 느껴졌다.
아버지 말대로 지태완은 회장 대리로서, 영신 그룹 전체를 빠른 속도로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영신전자를 필두로 이미 대부분의 계열사가 지태완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보면 거의 잡아 먹히기 전에 아버지가 깨어난 상황이었다.
“아버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아버지?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이상하구나.”
“뭐, 어때요. 이상하면 아빠라 부르고요.”
“됐다. 그래, 궁금한 게 뭐냐?”
나는 살짝 호흡을 고른 다음 말했다.
“아버지는 회사를 큰형에게 물려줄 생각입니까?”
“…….”
궁금했지만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질문을, 아버지가 깨어나시자마자 직설적으로 물었다.
아버지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한 아버지는 나를 강렬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그 눈빛을 나는 담담하게 받아내었다.
“후우.”
아버지 입에서 짧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고는 예상과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너는 네 형이 회사를 물려받기를 원하더냐?”
“네?”
역질문에 순간 당황했다.
“너는 분명 야망이 있어 보인다. 그런 네가 정말로 네 큰형이 회사를 모두 집어삼키기를 바라느냐 말이다.”
“그건…….”
나는 살짝 주저하다가 이내 보이지 않게 주먹을 꽉 쥐며 대답했다.
“전혀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구나.”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었다.
그저 그는 특유의 포커페이스로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혹시나 이 대답이 악영향을 끼치는 것일까?
하지만 아버지의 대답은 내 생각을 넘어섰다.
“그렇다면 있는 힘껏 해봐라.”
“……!”
“네가 지금 큰형과 경쟁하기에는 크게 무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스스로 한계를 정하지 마라.”
“그 말씀은 저보고 형과 경쟁해서 이기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버지는 나의 참전을 승인해주었다.
직접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 또한 수많은 형제와 경쟁에서 결국 왕좌를 쟁취했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세상은 약육강식이다. 너희들에게 내가 겪은 것을 겪지 않게 해주고 싶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더구나.”
“아버지는 제가 형을 쓰러뜨려도 좋으세요?”
“열 손가락 중에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나만, 그게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지.”
“반대의 상황이 오더라도?”
“그래.”
그것으로 아버지는 대화를 끝내고 싶었는지 바로 축객령을 내렸다.
“피곤하구나. 너도 이만 나가보거라.”
“다음에 또 올게요.”
나는 별말 안 하고 병실 밖을 나갔다. 병실 밖에는 박준후 팀장과 김 비서가 있었다.
“끝나셨습니까?”
“도련님!”
김 비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슬쩍 미소를 보인 다음, 박준후 팀장을 보며 말했다.
“아버지를 부탁드립니다.”
“네.”
박준후 팀장이 고개 숙였다.
“가자, 김 비서.”
“네.”
김 비서는 박준후 팀장에게 살짝 인사하고 떠나가는 내 뒤를 따라왔다.
* * *
지태훈이 떠나고 박준후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그래. 조금 피곤하긴 해도 버틸 만해.”
회장을 바라보는 박준후 팀장의 얼굴은 잔뜩 굳어져 있었다.
지종윤 회장이 겉으로는 멀쩡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회장님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담당 주치의가 박준후 팀장에게 한 말이다.
대외적으로는 문제없다고 발표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회장의 상태는 심각할 정도로 좋지 않았고, 점점 죽어가고 있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박준후 팀장은 주치의에게 이 사실을 절대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부탁했다.
이 일이 알려지는 순간, 영신그룹에 닥쳐올 후폭풍이 엄청나다는 것은 굳이 예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특히 무서운 속도로 회사를 집어삼키고 있는 지태완 때문이라도 회장의 상태를 비밀로 해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회장이 깨어났을 때, 박준후 팀장은 당사자에게 진실을 전달했다.
허나, 지종윤 회장은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의 몸 상태를 비밀로 한 일을 두고 칭찬까지 했다.
“박 팀장, 자네가 보기에는 그룹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 같다고 보는가?”
“……더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박준후 팀장은 입을 다물었다.
“내가 태완이 그놈 머릿속을 모를 줄 알았나. 그놈이 가진 야망을 말이야.”
“회장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지종윤 회장은 잠깐 말을 흐렸다.
“이제는 선택해야겠지.”
* * *
영신전자.
“사장님께서 곧 정식 회장 자리에 오르실 날이 머지않았군요.”
민제국 YS텔레콤 사장이 지태완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지태완은 가볍게 웃기만 했다.
“대다수의 계열사 사장들이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사장단 사이에서 차기 회장으로 자연스럽게 지태완을 회장으로 올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요.”
“영신식품에 있는 강민수 사장은 어떻습니까?”
“음. 그 친구는 여전히 중립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워낙 고집 있는 친구라서 말이죠.”
“괜찮습니다. 제가 강 사장 성격은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어차피 제가 회장 자리에 오르면 알아서 따라올 자입니다.”
“그렇겠죠.”
“문제는 임정호 사장하고 김진철 이사 쪽인데…….”
임정호 영신증권 사장.
영신그룹 내 주요 계열사 중 하나인 영신증권.
그런 곳의 사장인 임정호는 지태완의 사장 지지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김진철 이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김유리 비서의 아버지이자 지종윤 회장의 오른팔로 익히 알려진 김진철 이사는 지태완을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회장님의 충실한 심복들이죠.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죠.”
“그런 상황에서 회장님께서 깨어나셨으니 더 하겠죠.”
민제국의 말에 지태완은 미간을 좁혔다.
회장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 상황에서 지태완은 본격적으로 총수에 오르기 위한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이미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준비했기 때문에, 굉장히 빠르게 진행시킬 수 있었다.
허나, 회장의 충실한 심복들이 반대하던 와중에 의식을 잃었던 회장이 깨어나면서 일단 프로젝트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민 사장님.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흐음.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회장님의 심복들을 최대한 끌어들인 다음 자연스럽게 회장직을 넘겨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겁니다. 허나, 현실적으로 어렵죠.”
민제국은 어떤 방법도 지금 상황을 이겨내기 어렵다는 뉘앙스로 말을 꺼냈다.
그러자 지태완이 충격적인 발언을 하였다.
“그럼 회장님이 돌아가시면 이 일이 해결될까요?”
“……네?”
“회장님의 심복들도 어차피 회장님이 사망하면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지태완 사장님. 지금 그 말씀은…….”
“어차피 회장님은 지는 해입니다.”
민제국 사장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를 향해 지태완이 눈을 번뜩였다.
“회장님이 어린 시절부터 내게 한 말이 있습니다. 무엇인 줄 아십니까?”
“자, 잘 모르겠습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스스로 쟁취하라.”
“……!”
“저는 그저 회장님으로부터 받은 교육을 실천할 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사장실에서는 싸늘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 * *
“도련님. 회장님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신 거예요?”
“아빠, 아니, 아버지가 큰형하고의 대결을 허락하셨어.”
“네!?”
운전하고 있던 김 비서가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다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급히 진정했다.
그런 그녀를 흘깃 보다가 정면을 보며 말을 이었다.
“뭔가 이상했어.”
“이상하다니…… 어떤 부분이요?”
“아버지 상태 말이야. 다시 깨어나서 기쁜데, 뭔가, 그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분위기가 있었어.”
담담하지만 초탈한 눈으로 내게 말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거슬릴 정도로 밟혔다.
“아무래도 상황이 좋지 않아.”
회귀 전, 사실 아버지가 이 시기쯤에 사망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큰형은 영신 그룹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그리고 주변에 걸림돌이 될만한 모든 이들을 제거했다.
나는 그때 아버지 임종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 불효자였다.
그랬기에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김 비서. 아버지 쪽에 사람을 붙여야겠어.”
“네? 갑자기요?”
“어. 형 때문에 그래.”
“지태완 사장 때문이요?”
김 비서는 이해하지 못할 표정을 드러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녀 입장에서 앞뒤 맥락도 없이 회장 쪽에 사람을 붙여야 한다고 말하니 이상하지.
하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가 깨어나면서 곤란해진 사람은 형이야. 안 그래도 형이 완벽하게 회사를 장악하지 못한 이유가 아버지 심복들이 반대해서라며.”
“그렇죠. 그런데 그게 왜…… 설마 지태완 사장이 회장님을 죽이기라도 한다는 뜻인가요?”
“맞아.”
“네!?”
“큰형은 마음만 먹으면 아버지를 죽일 생각으로 덤빌 수 있는 사람이야.”
“말도 안 돼요.”
“지금은 그렇게 생각이 들겠지. 하지만 곧 내 말이 맞게 될 거야.”
* * *
며칠 후, 회장이 머무는 병실에 낯선 사람 한 명이 등장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야구 점퍼를 입고 있는 정체불명의 남자는 회장의 병실 위치를 확인했다.
‘정보에 의하면 회장이 오늘 병실을 지키던 박준후 팀장을 휴식 차원에서 집으로 보냈다고 했어.’
그 말은 지금 병실에는 목표물 혼자 있다는 것.
‘여긴가.’
병실 문 앞에 선 남자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거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은밀하게 열린 문 사이로 남자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런 남자의 시선에는 깊은 잠에 든 회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빠르게 끝내고 약속된 보수를 받아야지.’
회장을 살해하면 엄청난 보수를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남자는 잠들어 있는 회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주머니 속에서 손수건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회장의 코를 틀어막으려고 했다.
그런데…….
“동작 그만.”
“……!”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남자는 이상한 감각에 휩싸였다.
갑자기 세상의 위아래가 뒤바뀐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누군가에게 매쳐진 것이다.
콰앙!
“커헉!”
강한 충격과 함께 바닥을 구르게 된 남자는 강렬한 고통에 비명조차 흘리지 못했다.
상당히 고통스러워하는 남자의 곁으로 누군가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누군가 회장님에게 사람을 보낼 거라고 하던데, 설마 진짜였을 줄이야.”
“히, 히익!”
“네놈이 감히 회장님을 건드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존재는 바로 김진철 이사였다.
야수 같은 인상을 지닌 그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곧 그는 남자에게 사형선고 같은 말을 꺼냈다.
“뒤졌다. 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