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강현수가 자리를 박차고 나간 뒤, 우리는 잠깐이지만 침묵에 휩싸였다.
하지만 침묵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대표님. 현수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침묵을 깬 주인공은 바로 박춘식 교수였다.
“현수를 축구 선수로 이끈 건 다름 아닌 저였습니다.”
“……!”
“참으로 축구를 좋아하고 재능이 넘치던 아이였죠.”
박춘식은 젊은 시절 우연히 알게 된 강현수를 축구 선수가 될 수 있게 옆에서 힘을 줬던 인물이었다.
“고양 유나이티드에서 현수는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죠. 그놈들이 오기 전까지.”
“그놈들이라면… 혹시 허재우하고 임태무인가요?”
“그렇습니다. 그 두 놈이 우리 현수의 선수 생명을 끊어놨죠.”
세계적으로 축구 산업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에 맞춰 국내 축구도 덩달아 같이 성장했다.
2002 한일 월드컵을 기점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해온 국내 축구는, 2011년 승부조작 사건으로 크게 한번 흔들리기는 했지만 이후 수많은 변화와 개혁을 시도하면 현재에 이르렀다.
하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은 곳에서 벌어지는 불합리한 일들이 존재했다.
강현수도 그런 보이지 않은 사각지대 속에서 당한 피해자인 셈이다.
“저도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
“현수의 부모님이 허재우와 임태무 때문에 직장을 잃었습니다. 가세가 크게 기울었죠.”
“……!”
“현수의 집안은 그리 좋지 않아요. 사실 축구 같은 운동을 하기에 형편이 좋지 않죠. 그럼에도 스스로 자수성가해서 프로 데뷔까지 한 건데…….”
제대로 꽃을 피우기 전에 허재우와 임태무라는 쓰레기들이 싹을 잘라버렸다.
이야기하는 박춘식은 두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교수님. 지금 이게 다 무슨 말씀이세요?”
함께 있던 박이연 교수가 상당히 놀란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 이런 속사정을 처음 안 모양이었다.
“본래 현수는 축구계를 완전히 떠날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현수가 가진 재능이 아쉬워서 어떻게든 제가 설득해서 다시 잡았죠.”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정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대표님께서 정말 현수를 위하신다면, 현수를 내버려 두세요. 그게 서로를 위한 길입니다.”
작정한 듯,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는 박춘식 교수의 말에 나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 * *
K리그는 여전히 겨울 이적 시장이 진행되고 있었다.
지난겨울 이적 시장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던 고양 유나이티드.
이번에도 많은 팬과 관계자들이 기대를 모으고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작년과 달리 고양의 겨울 이적 시장은 조용한 편이었다.
1월 초에 장현우를 전북에서 완전영입한 것이 전부였다.
점차 팬들의 기대가 꺼져갈 무렵, 고양 유나이티드에서 놀랄 만한 영입 소식이 들려왔다.
“대표님. 쓸 만한 수비형 미드필더 하나가 필요합니다.”
“수비형 미드필더요?”
“네. 저번에 드렸던 영입 목록에도 적혀 있지만, 수비형 미드필더가 필요합니다.”
“아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곽찬구 감독은 팀의 중심을 잡아줄 단단한 수비형 미드필더의 필요성을 어필했다.
“현우와 지우 모두 수비보단 공격적인 성향이 강한 선수들입니다. 그렇다고 종호 혼자 수비를 맡기기에는 1부 경험이 부족해서 위험합니다.”
“흐음.”
“다른 포지션은 영입을 미룬다고 해도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를 확실하게 보강해야 합니다.”
감독의 적극적인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다.
곽찬구 감독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다가올 1부리그를 치를지 알고 있었다.
영입 자금은 아직 넉넉하게 있었다.
“혹시 감독님께서 봐둔 선수들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저번에 제게 전달해주신 영입 목록 선수 명단에는, 영입할 수 없는 선수들이 있었거든요.”
곽찬구 감독은 처음에 외국인 선수를 요청했었다.
호주 국적의 라이언이라는 선수였는데 멜버른에서 뛰는 선수였다.
바로 이적을 진행하기 위해 문의를 넣었지만 대차게 까였다.
팀의 핵심 선수이기 때문에, 얼만큼의 돈을 주더라도 팔지 않겠다고 답했다.
“이번에는 어떤 선수죠?”
“유명한 선수입니다.”
“유명한 선수요?”
나는 순간 축구 선수 이름이 유명한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스즈키’라는 선수를 아십니까?”
“스즈키? 일본 선수입니까?”
“네. 맞습니다. 일본 청소년 대표 출신이고, 국가대표 경기는 3경기 정도 뛰었을 겁니다.”
“그래요?”
“지난 시즌까지 J리그 우라와 레즈에서 뛰었고, 과거 유럽 경험도 있습니다. 레버쿠젠에서 뛰었죠.”
“오. 대단하네요. 그런데 그런 선수면 되게 비싸지 않을까요?”
“그게…… 현재 무적상태입니다.”
“엥?”
“지난 시즌을 끝으로 계약 만료로 풀렸습니다.”
“……!”
“이걸 한번 보시겠습니까?”
곽찬구 감독이 내게 종이를 하나 건넸다.
확인해 보니 선수 프로필이었다.
[스즈키 안도]
나이 : 30세 (만29세)
국적 : 일본
키&몸무게 : 182 / 78
포지션 : 수비형 미드필더(主), 중앙 수비수
경력 : FC도쿄 유소년 출신.
FC도쿄 110경기 5골 14도움
레버쿠젠 15경기 0골 0도움
우라와 레즈 220경기 10골 30도움
국가대표 : U-17, U-20, 성인 국가대표 경험 있음.
“체구가 단단하고 발기술이 좋습니다. 팀을 위한 결정적인 한 방이 존재하고요. 3년 전 우라와 레즈의 우승 주역 멤버입니다.”
“흐음. 근데 이런 선수가 팀이 없다고요?”
“네. 팀에서는 재계약을 추진했는데, 선수 본인이 새로운 도전을 원한다고 재계약을 하지 않았습니다.”
“프로필만 봤을 땐 괜찮아 보이네요.”
선수로서 30대면 진로에 고민이 될 시기다.
20대 마지막을 보내고 있는 스즈키 입장에서 아마 마지막으로 새로운 도전을 해볼 곳을 찾는 것이겠지.
“그런데 이 정도 커리어를 지닌 선수가 우리 쪽으로 올까요?”
자신이 없다기보단 순수한 심정으로 궁금했다.
어딜 가도 될 만한 선수가 2부에서 갓 올라온 우리 팀에 과연 관심조차 줄까?
그런데 곽찬구 감독이 의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아마 가능할 겁니다.”
“네?”
“스즈키 안도가 친한파거든요.”
“잉?”
“별그램 한번 보시겠어요?”
나는 스즈키 안도가 운영하는 SNS로 접속했다. 내용을 확인한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후후후.”
내 반응을 본 곽찬구 감독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럴 만도 했다.
별 그램에는 익숙한 만화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그건 바로,
“뭐야? 이거 유리구슬이잖아?”
요를에서 유통하는 유리구슬이었다.
일본어로 뭐라뭐라 적혀 있는데, 자동 번역기를 돌려보니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역시 한국 웹툰은 최고야www 얼른 다음 편을 달라구!(˚∀˚)/]
와, 이게 뭐냐.
황급히 다른 게시물들을 확인해봤다.
다른 게시물도 비슷했다.
한국 음식을 먹고 인증을 한다던가, 한국 가수의 어떤 노래가 좋다던가.
한국 관련 게시글들이 상당히 많았다.
“국내 축구팬들 사이에서도 유명합니다. 오죽하면 실력 대비 대표팀에 뽑히지 못하는 이유가 친한파라는 말이 있을 정도죠.”
“허어.”
“어쨌든 저희 쪽에서 적당한 금액만 제시하면 바로 합류해 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상황은 완벽하게 이해했다.
이런 선수를 놓칠 수 없다.
“참, 우리 팀 외국인 선수들 자리는 남아 있죠?”
“네. 지금 나탈, 사무엘, 라시모프 이렇게 3명입니다. 연맹에서 규정하는 외국인 선수 보유 숫자가 3+1+1이니까요.”
“국적 상관없이 3명에 아시아쿼터 1명은 알겠는데, 나머지 +1은 뭐죠?”
“동남아쿼터입니다.”
“아하.”
동남아 시장 확대를 위해 연맹은 동남아쿼터를 만들었다.
문제는 이를 제대로 활용하는 팀이 거의 없었다.
“뭐, 좋습니다. 바로 영입을 시도해 보죠.”
* * *
결론부터 말해 보자면, 영입 과정은 굉장히 순조롭다 못해 상당히 빠르게 진척되었다.
우리 쪽에서 영입 제안을 넣자마자 선수측에서 바로 답장을 해줬다.
조건도 많이 따지지 않았다.
연봉과 성과급은 적당한 수준에서 원만하게 합의를 봤다.
이렇게 진행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입니다! 나는 스즈키입니다.”
“오, 한국말 좀 하시네요?”
“한쿠거 조금 배워스므니다. 아지크 부조크 합니다.”
“아, 네. 그래도 잘하시는데요?”
“가무사합니다.”
실제로 만난 스즈키는 깔끔한 인상과 다부진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운동하는 순박한 청년 느낌?
그래, 이게 맞다.
그런 그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정말 작가님을 만날 수 있는 겁니까?”
스즈키가 일본어로 묻자, 옆에 있던 에이전트가 통역을 해줬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날 수 있죠. 저희가 요를하고 협업 중인데, 스즈키 선수가 유리 구슬 작가님을 뵙고 싶다고 하니까 그쪽 작가님도 상당히 흥미 있다고 답변을 주셨어요.”
“오! 오오오!”
대단하다! K-콘텐츠!
한국 문화에 열광하는 스즈키는 두 눈을 빛내며 콧바람을 만들어냈다.
잔뜩 흥분한 그의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저희 팀으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스즈키 선수.”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스즈키를 영입하는데 합의했다.
그리고 곧 언론을 통해 이 소식이 축구팬들에게도 전했다.
[오피셜] 고양UTD, 일본 국가대표 출신 스즈키 영입!
기사를 본 국내 축구팬들의 눈이 동그랗게 떴다.
-헐, 스즈키? 그 우라와에 있는 스즈키 아냐?
-스즈키가 누군데 그러누?
-스즈키 모름? 우라와 레즈 에이스임. 예전에 레버쿠젠에서 잠깐 있었고.
-맞아, 그 3년 전인가? 아챔에서 ㅈㄴ잘하던 놈임. 막 일본의 가투소, 캉테 이렇게 불렸던 놈임.
-와, 고양 조용하더니 이거 한방 터트리네!
-갑자기 고양 스쿼드 급 단단해지네.
-공격에 박형우, 장현우, 수비에는 스즈키, 라시모프. 와 든든하네.
-고양 부럽다.
프로축구 관계자들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
“이 새끼들 돈 많나 봐.”
“FA영입이던데? 이적료는 안 썼더라도 연봉 꽤 많이 줘야 할 텐데.”
“고양 돈 많잖아.”
“부럽네. 누구는 돈지랄하고. 누구는 한 푼이 아쉽고.”
“뭐 어떻게 하겠어.”
그런데 관계자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생각보다 저렴한 연봉으로 스즈키를 영입했다는 사실이다.
대다수의 프로축구 관계자들은 비싼 돈을 주고 커리어 있는 스즈키를 데려왔을 것이다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이게 다 전략이지! 하하하!”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을 향해 나는 크게 웃을 뿐이었다.
* * *
프로축구연맹 본부.
석정원 회장을 포함한 이사회 인원들이 모두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그럼 해당 안건들에 대해 의견이 없는 것으로 알고, 이만 오늘 회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정기 회의가 끝났다.
회의가 끝나고 삼삼오오 모여 회의장을 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나가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석정원 회장 곁에 몇 명의 이사들이 모였다.
“회장님. 이번 일정을 이렇게 진행해도 괜찮을까요?”
“문제 될 게 뭐 있겠습니까? 적당히 잘 짜여졌다고 보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문제가 있다면 아까 본회의 때 이야기하지 그러셨습니까.”
“…….”
“이에 대해서 별로 하고 싶은 말이 없군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석정원 회장은 자신을 붙잡는 이사들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길에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오, 지 대표. 잘 지내고 있나?”
그가 전화를 건 상대는 바로 지태훈 대표였다.
“지 대표, 내 전할 말이 있는데 지금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