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안녕하십니까. 저는 도르트문트 CEO 미하엘이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고양 유나이티드의 지태훈 대표입니다.”
갈색 머리에 턱수염을 기른 독일 남자가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그 남자는 도르트문트 경영을 맡은 미하엘이었다.
“저희 도르트문트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감사는 저희가 더 감사하죠.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미하엘의 안내를 받으며 구단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이곳저곳 내부를 둘러보던 나는 곧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는 저희 팀을 거쳐 간 수많은 전설을 기록한 곳입니다.”
오랜 세월 활약한 선수들의 사진과 그들이 사용한 물건과 우승 트로피 등이 있었다.
그걸 본 나는 감탄하며 말했다.
“레버쿠젠도 그렇지만, 도르트문트도 기록을 잘해두셨네요.”
“기록을 남기는 건 우리의 의무이자 자산입니다. 과거의 자산이 남긴 자취를 우리가 계승하고 발전시키면서 팀을 존재하게 만들죠. 그리고 팀 안에 있는 모두가 정신적으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고요.”
“분명 그건 본받을 만한 일이네요.”
구단 대표를 하면서 느낀 점은 K리그는 기록하는 것에 약했다.
과거보다 많이 보완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유실된 자료들이 많았다.
그에 반해 분데스리가는 체계적으로 기록을 잘 관리해두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사실 이게 다 돈이 됩니다.”
“네?”
갑자기 내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드는 한마디였다.
미하엘은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앞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런 자부심을 느끼는 팬들이, 자부심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를 위해 많은 돈을 지불하죠.”
“……!”
“우리는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축구와 관계된 모든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고요.”
“엄청나군요!”
몰랐다.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부분이었다.
그런데 미하엘의 말을 듣고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어쩌면 우리도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겠지?
“보아하니 대표님께서도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이쪽으로 오시죠.”
미하엘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팝업스토어였다.
도르트문트 구단이 운영하는 팝업스토어에는 다양한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우리는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습니다. 팬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물건에는 우리 팀 로고가 붙어 있죠. 그렇게 해서 우리는 돈을 벌고, 벌어들인 수익으로 선수를 영입합니다.”
“이렇게 벌어들인 수입은 어느 정도입니까?”
놀란 내 물음에 미하엘은 싱긋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축구는 그저 그런 공놀이에 불과합니다. 그런 공놀이가 어떻게 이렇게 세계적인 스포츠가 되었을까요?”
“그건…….”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판을 깔고 수익을 만드는 존재들입니다. 공놀이를 통한 슈퍼스타도 우리의 손을 거쳐 탄생하는 거죠.”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제게 하시는 거죠?”
“그건…….”
미하엘은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제 작은 취미 중 하나가 자라나는 유망주의 성장을 보는 겁니다. 그것이 선수가 아니라도 말이죠.”
“…….”
“제 사업적인 감각이 말해 주는군요. 대표님이라면 향후 이 업계에 꽤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거라고.”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 * *
도르트문트와의 친선경기를 앞두고 조금 달라진 부분이 있었다.
그건 바로 팬들의 등장이다.
“멀리 독일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대표님. 덕분에 저희도 독일 여행할 수 있게 됐네요. 하하하!”
고양 유나이티드 서포터스들이 대거 독일 원정 응원을 온 것이다.
레버쿠젠 전에서는 시간과 비행기 표가 제대로 확보되지 못해서 팬들이 오지 못했다.
하지만 도르트문트 전은 달랐다.
약 100명에 이르는 고양 유나이티드 팬들이 팀을 위해 기꺼이 독일까지 날아왔다.
팬들이 방문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선수단도 분위기가 잔뜩 올랐다.
“팬들 응원을 받을 수 있다니!”
“이야, 진짜 저번에는 너무 일방적으로 야유받고 해서 힘들었는데, 그래도 이번에는 좀 낫겠다!”
“1명이라도 어디겠냐 싶었는데 100명? 못 할 게 없지!”
선수들의 사기가 오르며 친선경기 준비를 원활하게 진행했다.
그런 와중에 나는 독일에서도 구단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다.
“잘 들리십니까?”
-네, 잘 들립니다!
미리 준비해 둔 노트북을 세팅했기에 화상 회의는 어렵지 않았다.
-대표님! 독일은 어떠십니까?
천지원 부장의 물음에 나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쁘지 않더군요. 배울 것도 많았고요.”
-그렇습니까? 잘됐네요.
“안 그래도 새로운 사업 계획이 떠올라서 여러분을 불렀습니다.”
-사업 계획이요?
“네.”
나는 김 비서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김 비서가 미리 준비한 PPT를 화면에 틀었다.
화상 회의에 참여한 인원들의 시선이 모두 PPT 화면으로 향했다.
“이번에 새로 계획할 사업은 바로 이겁니다. [전설의 귀환], 영어로는 백 투 더 레전드.”
-전설의 귀환?
-이게 뭐죠?
부장급 인사들이 어리둥절했다.
나는 그런 그들을 향해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설명을 이어갔다.
“문자 그대로 전설들의 귀환입니다. 그동안 우리 구단에서 오랜 시간 뛰었다가 은퇴한 선수 또는 감독과 코치들을 위해 홈 경기마다 행사를 진행할 겁니다. 또한 관련 기념 물품을 함께 제작하고, 전설들을 위한 명예의 전당을 제작할 겁니다.”
-……!
“그리고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내 설명이 이어질수록 그들의 표정은 놀람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말에 그들은 경악했다.
“이 전설의 귀환에는 단순히 ‘선수’와 ‘코칭스태프’만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팬’도 포함할 겁니다.”
* * *
“대표님, 나중에 한국에서 뵙겠습니다.”
“네. 건승을 빌겠습니다.”
“넵. 실망하는 일 없도록 좋은 경기하고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업무 일정상 어쩔 수 없이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기 전 선수단에 방문해서 감독과 선수들 모두 인사를 한 것이다.
한 사람씩 인사를 하다가 나는 문득 장현우와 눈이 마주쳤다.
장현우의 묘한 시선을 느낀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좋은 경험이 되겠네요.”
“그럴 것 같습니다.”
“미래를 위한 좋은 자극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선수들과 모두 인사를 마친 나는 김 비서와 함께 먼저 한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에 도착한 나는 바로 구단으로 향했다.
“쉬지 않으셔도 됩니까?”
“쉴 만큼 쉬었죠. 이제는 다시 일해야죠.”
구단에 도착하자 천 부장을 비롯한 인사들이 나를 기다렸다.
그들은 나를 보자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반가움은 뒤로하고 나는 바로 회의를 진행했다.
“요청했던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네. 지금 하나씩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표님께서 구상한 사업계획에 필요한 물품 제작은 ‘라 르 테일’에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라 르 테일?”
“아, 그 벽수그룹의 손지영 본부장이 이번에 대표로 취임한 곳입니다.”
“아아.”
새롭게 용품 계약을 체결한 벽수그룹의 자회사였다.
‘라 르 테일’은 우리와 첫 계약을 진행하면서 본격적인 용품 개발에 착수했다.
“요청했던 물건 디자인들 보냈고, 샘플이 나오는 대로 바로 회신하겠다고 합니다.”
“기대하죠.”
벽수그룹은 인테리어 분야에는 세계 최고 수준.
그들이 보유한 예술적인 감각으로 과연 어떤 용품들이 탄생할지 기대가 됐다.
“‘요를’하고도 연락됐나요?”
“네. 신성한 대표 측에서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조만간에 사업 계획 정리해서 대표님께 직접 연락하겠다고 했습니다.”
“좋습니다.”
좋다.
판은 다 깔렸다.
이제 이 판을 채워줄 사람들을 구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판을 채워줄 사람이 왔다.
“도련님. 손님 오셨습니다.”
“응.”
파마머리를 한 중년 남자가 등장했다.
그는 나를 보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전인호입니다.”
“이렇게 모실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아닙니다. 잊혀졌다고 생각했던 저를 불러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전인호.
고양 유나이티드에서 오랜 시간 골키퍼로 활약했던 전설.
2000년대 초반에 전인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매 경기 보여준 안정감 있는 플레이와 보는 이로 하여금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슈퍼세이브 등.
그로 인해 국가대표 경험도 몇 번 했었다.
“제가 알기로 팀 통산 300경기 이상 뛰셨다고…….”
“네. 정확히는 322경기 뛰었습니다.”
“그렇군요. 정말 대단하세요.”
“아유, 뭘요. 이미 지난 일인데요.”
말로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얘기하지만, 전인호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저를 찾으셨나요?”
“저희가 사실 사업 하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
“바로 ‘전설의 귀환’이라는 사업입니다.”
사업 내용을 들은 전인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내가 티슈를 뽑아 건넸다.
그는 티슈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제가 은퇴하고 팀이 어려운 상황을 겪는 소식을 들었지만, 아무런 도움을 못 드려서 너무 속상했거든요. 그런데 이번 일은…… 정말 감동이네요.”
“전설이 괜히 전설이 아닙니다. 존재만으로도 우리의 정신을 지탱해주죠. 곁에 있어만 주셔도 저희는 힘이 됩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너무 감사하네요.”
전인호는 상당히 순박만 면모가 있는 인물이었다.
스페셜 영상을 봤을 때는 상당히 카리스마 넘쳤는데 말이다.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전인호는 나에게 충분히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그런 그에게 나는 웃으며 말했다.
“도울 일이 있죠. 그것도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어떤……?”
“저희 팀에 계셨던 연락 가능한 전설들에게 모두 연락해 주세요. 저희가 찾고 있다고요.”
“……!”
* * *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러는 와중에 도르트문트와 친선경기를 치른 선수단이 복귀했다.
나는 직접 공항으로 가서 선수들을 맞이했다.
“고생 많았습니다.”
귀국한 선수들은 피곤해 보였지만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설마 도르트문트 상대로 그토록 좋은 경기를 펼칠 줄은 몰랐습니다.”
“설마 저희를 의심하셨습니까?”
“앗,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하하. 농담입니다. 사실 저희도 기대 이상 성과라서 기분이 좋네요.”
도르트문트와의 친선경기.
레버쿠젠을 상대로 고전했기 때문에 도르트문트에게 대패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는다는 여론이 컸다.
실제로 구단 내에서도 대패를 각오하고 친선경기를 임했다.
그런데 막상 친성경기를 치르면서 전혀 다른 경기 결과가 나왔다.
[2:2] 무승부.
전반전에 도르트문트에게 먼저 2골을 내주었다.
이때만 해도 예상대로 흘러가나 싶었다.
하지만 레버쿠젠처럼 후반전 들어서 선수단은 투혼을 불태웠다.
그 결과 후반전에 2골을 기록하며 무승부라는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허점이 있었다.
우선 도르트문트는 레버쿠젠과 달리 1군을 모두 내세우지 않았다.
대부분 비주전 선수들도 선발 스쿼드를 구성했다.
하지만 후반전에 밀리기 시작한 도르트문트가 위기를 느끼고 주전 선수들 일부를 투입했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은 짧았고 결국 경기는 무승부로 끝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두 번의 친선경기를 통해 고양 유나이티드는 독일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제는 1부 리그입니다.”
“그렇죠. 이제 시작입니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친선경기를 마친 우리의 다음 시선은 ‘K리그1’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