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레버쿠젠의 홈구장 바이아레나.
3만석 규모의 관중석은 거의 꽉 찼다고 해도 될 정도로 사람들로 북적였다.
경기를 기다리는 팬들은 이번 경기를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 경기가 무슨 아시아에 있는 팀이라지? 한국에 있는 팀이라고 했나?”
“한국에 있는 K리그 팀이래. 옛날에 코로나 터져서 분데스리가 멈췄을 때 중계로 잠깐 본 적이 있어.”
“그래?”
“응. 그때 꽤 못하던 팀이었던 걸로 기억했는데 말이야.”
“엥? 그럼 뭐하러 그 멀리 있는 팀을 초청해서 데려왔데?”
“나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작년에 스페인 팀하고 붙은 아시아 팀이 바로 이 팀이라고 하나 봐.”
“뭐? 진짜야?”
“어. 아틀레티코가 깨졌다는 그 팀이 오늘 우리 상대래.”
“오~ 그럼 얘기가 달라지지.”
프리시즌도 아니었고 한창 시즌을 진행 중이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아시아 팀에게 패배한 사건은 꽤 이슈였다.
“들어 보니까 자국 리그에서 우승도 했다더라. 꽤 압도적으로.”
“헐? 진짜?”
실상 2부리그 우승이었지만, 제대로 된 정보를 알지 못하는 팬들은 1부리그 우승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럼 꽤 흥미진진할 수도 있겠네.”
“그렇지. 그리고 구단이 아시아 마케팅 노리는 거 종종 있었잖아. 우리 팀에 한국인 선수들도 제법 많이 뛰었고.”
“그렇지. 안 그래도 우리 팀에 성현민이 있었지?”
“맞아. 오늘 선발로 나왔던데?”
“어? 그러네.”
레버쿠젠에는 꽤 많은 한국인 선수들이 팀을 거쳐 가거나 소속되었다.
그중에서 성현민은 중학생 때 부모님과 함께 독일로 건너와서 레버쿠젠 유소년 팀에 합류하여 현재 프로팀까지 올라온 선수였다.
팀에서도 제2의 손영민을 기대하며, 왼쪽 윙포워드로 활약하고 있었다.
아직 주전을 꿰차지는 못했지만, 주기적으로 교체 출전하며 입지를 쌓아가고 있었다.
그런 성현민이 오늘 경기에서 선발로 나섰다.
레버쿠젠의 감독 에릭 뷔른이 오늘 경기를 통해서 서브 선수들의 기량을 점검하기 위해서 선발 출전시킨 것이다.
“저 사람이 지태훈인가.”
경기 전 동료들과 함께 몸을 풀던 성현민의 시야에 VIP석에 앉은 지태훈이 눈에 들어왔다.
잘생기고 훤칠한 키.
몸에서 줄줄 풍기는 카리스마.
같은 남자가 봐도 ‘멋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남자였다.
“현민. 오늘 상대 팀이 고향에서 왔다며?”
“어? 어어.”
갈색빛의 곱슬머리의 남자가 성현민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 남자는 현 레버쿠젠의 주전 미드필더 라이트였다.
“가서 사람들하고 이야기 안 나눠봐도 돼?”
“됐어. 다들 모르는 얼굴들인걸.”
“그래? 그래도 고향 사람들이잖아.”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사실 성현민은 고양시에 태어나서 자랐다.
그러다 중학교 때 독일로 넘어왔던 것이다.
‘옛날 생각나네.’
중학교때 고양 유나이티드 유소년팀에 도전했다가 탈락했었다.
만약 그때 유소년팀에 붙었다면 전혀 다른 미래가 펼쳐졌겠지만, 그때 떨어져서 레버쿠젠에 올 수 있었다.
“자, 시간 다 됐다. 다들 라커룸으로 들어가!”
“네!”
그렇게 성현민은 경기를 치르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 * *
삐익!
주심의 휘슬과 함께 전반전 경기가 시작됐다.
전반전 선축은 홈팀 레버쿠젠이었다.
-발라버려!
-무너뜨려!
레버쿠젠은 홈팀답게 일방적인 응원을 받으며 경기를 뛰었다.
고양 유나이티드 선수들이 조금이라도 공을 가져가기라도 한다면 바로 거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우우우우-.
“엄청나네.”
작년에도 느꼈지만, 유럽 관중들의 퍼포먼스는 정말 대단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거친 야유와 함성으로 가득했다.
“어떠십니까? 저희 바이아레나의 모습이.”
“훌륭하네요. 이 이상 다른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요.”
“하하. 그렇습니까?”
스테판 회장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유럽 경기장들의 상태는 훌륭했다.
K리그가 보유한 경기장도 상태가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유럽과 K리그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유럽 팀들은 경기장을 자체적으로 소유한 경우들이 많다.
그래서 사소한 부분까지 자유롭게 경기장을 운영할 수 있었다.
그런데 K리그는 달랐다.
K리그 내에 있는 모든 경기장은 지역 지자체에서 소유하고 관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문 하나 고치는 것도 해당 지자체와 이야기할 정도로 복잡하다.
그런 차이가 경기장을 운영할 수 있는 역량 또한 결정 지었다.
그런 점에서 유럽 팀이 부럽기만 했다.
‘언젠가 우리도 자체적인 홈구장을 소유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세상에 영원불면한 것은 없다.
하지만 그 시기가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
와아아아아!
잠깐 경기장 관련된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갑자기 엄청난 환호가 울려퍼졌다.
“어?”
레버쿠젠의 케빈이 공을 소유하고 고양 유나이티드 수비를 무너뜨리는 킬패스를 선보인 것이다.
절묘하게 라인을 부수고 들어간 데르마빈.
그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슈팅을 때렸다.
팡!
페널티박스 중앙에서 힘껏 때린 슈팅이 미사일처럼 날아가 그대로 골망을 흔들었다.
출렁-.
이예에에에에에!
득점에 성공한 데르마빈이 기분 좋은 표정을 드러내며 동료들과 하이파이브 했다.
“흐음.”
데르마빈의 득점을 본 나는 침음을 흘렸다.
이제 겨우 전반 10분 정도가 된 상황이었다.
이른 시간 실점을 당하면서 상대에게 자신감을 심어 줬다.
좋지 않다.
이러한 내 예감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전반전 내내 레버쿠젠이 우리를 몰아붙였다.
라이트, 케빈, 데르마빈으로 이어지는 삼각편대의 파괴력은 대단했다.
시종일관 고양 유나이티드의 골문을 위협하며 우리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런 와중에 눈에 띄는 인물이 하나 더 있었다.
“저 사람, 한국 사람 맞지?”
“네. 성현민 선수예요.”
“플레이가 상당히 좋은데? 특히 드리블 실력이 수준급이야.”
성현민은 좌우 측면을 스위칭하며 필드를 누볐다.
경험 많은 이진수도 성현민에게 계속 드리블 돌파를 허용하기도 했다.
“뭐 하는 거야!”
곽찬구 감독도 답답했던지 이진수에게 강하게 한마디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이진수의 잘못이라기보다 성현민이 너무 잘했다.
“저런 선수가 우리 팀에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나는 성현민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성현민은 레버쿠젠에서도 공들여 키우는 인재였다.
우리가 그를 영입하기는 어려웠다.
선수 또한 우리 팀에 올 생각이 없을 것이고.
삐익!
결국 전반전 종료 휘슬이 울려 퍼졌다.
“힘든 경기였네.”
전반전에 무려 3골이나 실점했다.
요즘 잘나가는 레버쿠젠의 저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던 전반전이었다.
라커룸으로 돌아가는 양 팀 선수들의 표정은 상반됐다.
레버쿠젠 선수들은 편안한 표정을 드러냈고, 고양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거의 초상집 분위기였다.
“잠깐 쉬었다 오겠습니다, 지태훈 대표님.”
“아, 네. 그러시죠.”
옆에서 경기를 관전하던 스테판 회장이 잠시 자리를 떠났다.
회장이 움직이자 크리스티안 단장을 비롯한 인사들도 움직였다.
VIP 좌석에는 나와 김 비서만 남게 됐다.
“김 비서. 라커룸 분위기는 좋지 않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죠?”
“내가 한번 가볼까?”
내 물음에 김 비서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을 망설이는 김 비서를 잠깐 바라보던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여기에 가만히 앉아서 시간만 보내는 것보다 뭐라도 하는 게 낫겠지.”
* * *
고양 유나이티드의 라커룸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대부분의 선수가 기대를 안고 경기에 임했지만, 돌아온 결과는 참담했다.
전반에만 3실점.
레버쿠젠은 고양 유나이티드를 얕보지 않았고, 정말 최선을 다해서 상대해 줬다.
선수들도 그것을 알고, 뼈저리게 격차를 느끼는 것이다.
곽찬구 감독도 그런 선수들의 분위기와 생각을 읽고 고민에 휩싸였다.
‘무슨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좋을까.’
아무리 베테랑 감독이라도 충격받은 선수들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감독이란 것이 그런 상황에서 무언가를 해야 하는 자리였다.
“자, 주목.”
곽찬구 감독이 한걸음 나오면서 선수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충격에 빠져있던 선수들이 곽찬구 감독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축구를 하다 보면 별별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을 너희들도 잘 알고 있을 거야.”
“…….”
“작년에 우리는 이기는 경기만 했다. 진 경기보다 이긴 경기가 훨씬 많았어. 그리고 대패한 경험도 거의 없었지. 그래서 충격이 더 클 거다.”
“…….”
“그래서 나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한다.”
잘 됐다는 감독의 말에 선수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 됐다니. 감독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심스러운 김지우의 물음에 곽찬구 감독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다가올 1부리그에서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패배들을 겪을 거야. 그 강도 또한 지난날의 패배보다 더 충격이 클 테고.”
현실적으로 2부리그에서 올라온 팀이 1부리그에 적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2부리그 팀이 승격했다가 한 시즌 만에 다이렉트 강등을 당하는 경우도 흔하다.
곽찬구 감독은 그 부분을 지적하며 이야기하고 있던 것이다.
“오늘 지려면 차라리 시원하게 져라! 그리고 오늘 느꼈던 이 감정과 경험으로 1부리그에서 뛰는 거다!”
“……!”
“1번의 패배가 너희를 강하게 만들어준다면, 그 패배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 그게 오늘 너희의 몫이다! 알겠나!”
곽찬구 감독의 말에 선수들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패배를 받아들여라.
그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진정성 있는 감독의 발언에 선수들은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두근.
심장이 평소보다 강하게 뛰었다.
선수들의 달라진 반응을 본 곽찬구 감독은 속으로 웃었다.
‘그래. 그렇게 성장해 가는 거다.’
그리고 그런 선수단의 상황을 문 뒤에서 듣고 있던 이가 있었다.
“뭐, 굳이 올 필요가 없었네.”
라커룸에 들어가려고 했던 나는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다.
* * *
쉬는 시간이 끝나고 후반전이 시작됐다.
후반전에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레버쿠젠에서 대거 교체를 진행했다는 점이다.
데르마빈을 비롯한 주전 선수들을 대거 빼고, 그간 기회를 받지 못하던 선수들이 대거 출전했다.
교체 인원만 해도 골키퍼까지 포함해서 약 8명 정도 됐다.
친선경기다 보니 교체 인원에 제한이 없었다.
그렇게 출전 인원이 대거 바뀐 레버쿠젠을 상대로 고양 유나이티드는 조금 숨통을 트일 수가 있었다.
‘확실히 전반전에 비하면 압박의 강도나 패스 수준이 약해졌어.’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뿐, 방심할 수 없었다.
비주전 선수들이라고 해도 선수들은 수준이 높았다.
하지만 전반전에 거의 이렇다 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고양 유나이티드가 후반전 들어 기회를 조금씩 받기 시작했다.
“간다!”
팡!
장현우가 볼을 길게 전방으로 보냈다.
그렇게 상대 진영 깊숙한 곳에 떨어진 공을 박형우가 받았다.
박형우는 곁에 달라붙은 수비 2명을 드리블로 돌파하고 순식간에 상대 페널티박스 근처까지 향했다.
레버쿠젠 선수들이 박형우를 막기 위해 서둘러 뛰어왔지만, 박형우의 순간 스피드가 워낙 빨랐다.
순식간에 상대 골키퍼와 일대일 찬스를 맞이한 박형우.
박형우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슈팅을 때렸다.
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