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흘러가는 강물처럼 시간은 잔잔하지만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버지.”
곧 신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중간에 큰 수술을 진행했었다.
의사 말로는 수술 자체는 성공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의식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
아버지가 쓰러지고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병원에 방문해서, 잠들어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잠깐이나마 보고 가고는 했다.
언제쯤 의식이 돌아올지 모르지만,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것은 말이다. 네게 주어진 축복이자 굴레다. 그걸 축복처럼 사용할지 아니면 굴레와 업보로 사용할지는 네 선택에 달렸다.』
문득 어렸을 적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렸을 적, 아버지와 만난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단둘이 있었을 때 내게 해주셨던 말이다.
“아버지. 나는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 걸까?”
회귀 후 지난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매 순간 확신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선택을 강요받아야 하는 순간은 매번 찾아왔고, 나는 그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올바른 선택이었나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도련님. 면회 시간이 모두 끝나갑니다.”
“응. 알아.”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 비서가 내게 면회 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말을 전해왔다.
슬슬 일어나야지.
“아버지. 제발 일어나.”
눈을 감고 있는 아버지를 향해 작게 중얼거리듯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오! 너 태훈이냐!”
“……!”
노랗게 머리를 물들고 목에 타투한 여자가 나를 보고 반갑게 아는 채 해왔다.
나와 김 비서는 그 여자를 보고 움찔했다.
“채연 누나?”
“맞구나! 짜식! 많이 컸다!”
지채연.
우리 형제 중 셋째이자 누나다.
나보다 5살이 더 많다.
그리고 둘째인 지태종과 2살 차이다.
내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건 무려 십 년 전.
회귀 전 시절까지 포함하면 더 오래됐다.
“누나가 여기는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아빠 쓰러졌다는 이야기 듣고 왔지.”
“…….”
“어째 나한테 연락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냐! 외국 나가 산다고 다들 나 무시하는 거냐?”
“그럴 리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지채연은 갑자기 음악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훌쩍 미국으로 떠나 버렸다.
그 뒤로 그녀가 무엇을 어떻게 하며 지냈는지 알 수 없었다.
관심도 없었고,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하고 그렇게 친분을 유지했던 것도 아니었고.
‘어릴 때부터 굉장히 자유분방했지.’
솔직히 말이 좋아 자유분방이다.
그녀도 나 못지않은 망나니였다.
다만 여자라는 성별 차이 때문에 덜 주목받았을 뿐.
만약 남자였다면 나 이상으로 주목받았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음악해?”
“아,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나도 아빠 얼굴 좀 봐야겠다.”
“지금 면회 시간 끝났어.”
“뭐?”
“병원 규칙이 그래. 예약 안 하고 왔지?”
“어? 어.”
“그럼 예약하고 다시 와.”
“아니, 가족끼리 보는 것도 안 돼?”
“내가 아나. 규칙이 그렇다는데. 따지려면 병원장한테 가서 따져.”
“흐음.”
병실로 들어가려던 지채연은 몸을 돌려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185cm인 나와 꽤 키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상당히 가까이 얼굴을 대고 말했다.
“많이 건방져졌다?”
“이 정도면 양호한 거야.”
“뭐?”
“시끄럽게 굴지 마.”
“하!”
그때 김 비서가 끼어들었다.
“안녕하세요?”
“음? 그쪽은 누구?”
어리둥절해하는 지채연을 향해 김 비서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저는 도련님 비서를 맡은 김유리입니다.”
“아! 고생이 많네요. 동생 수발드느라.”
“아닙니다.”
“됐고.”
김 비서에게서 시선을 뗀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돌발행동을 벌였다.
퍽!
“윽!”
갑자기 발로 내 다리를 걷어차는 게 아닌가.
정강이 쪽에서 시큼한 통증이 느껴졌다.
미간을 좁히고 외쳤다.
“뭐하는 거야?”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누나가 주는 선물이다! 짜샤!”
“어이가 없네.”
지채연은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곁에 있던 김 비서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드러내며 말했다.
“괜찮으세요?”
“어, 음. 괜찮아.”
나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여간, 저 여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 * *
시간은 흘러 어느덧 새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시간 금방 가네.”
“그러게요. 이제 곧 선수들도 복귀할 때가 됐고, 독일로 떠날 시간도 다가오네요.”
독일 전지 훈련은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장소와 비용 모두 구해졌고, 가서 경기만 치르면 되는 상황이었다.
“기사는 다 나갔지?”
“네. 전지 훈련 관련된 보도자료들 받은 언론사들이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좋네.”
전지 훈련 준비도 무사히 진행되는 가운데 나는 이적 시장과 관련된 일로도 정신이 없었다.
“유지원 부장님. 장현우, 오세진, 이 두 선수의 재계약 여부는 어떻게 됐습니까?”
“울산에서 오세진 선수의 복귀를 원하고, 선수도 원소속팀 복귀를 원하더군요.”
“장현우 선수는요?”
“아직 답변이 없습니다.”
“그래요?”
이적 시장이 열리기 전에 두 선수에 대한 완전 이적을 추진하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상황이 쉽지 않다.
오세진은 복귀한다고 이야기를 한 상태고, 장현우는 1월이 되도록 답변이 없다.
“전북에서는 반응이 어떤가요?”
“그쪽도 반응이 미적지근합니다.”
“왜죠?”
“자세한 건 모르지만, 아마 그쪽도 선수단 정리로 바쁜 모양인 것 같습니다.”
매 시즌마다 우승을 다투는 전북 모터스.
사실 장현우 정도의 선수는 전북에겐 급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제가 직접 만나봐야겠군요.”
“네?”
“곽찬구 감독은 두 선수 모두 데려가기를 원하지만 여차하면 장현우만큼은 데려가기를 원했습니다.”
“…….”
“제가 직접 장현우 선수를 만나보고 독일 전지 훈련을 떠나기 전에 완전 이적을 완료시켜보죠.”
“설마 바로 가시려고요?”
“시간이 없습니다. 바로 출발하죠. 김 비서, 차 준비해.”
그렇게 나는 장현우를 만나러 향했다.
* * *
전북 익산.
이곳은 장현우의 고향이다.
시즌을 마친 그는 고향에서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부모님은 익산에서 농사를 짓고 계셨다.
하나뿐인 자식을 축구 선수 시키겠다고 논과 밭을 일부 팔아서 후원했었다.
이후에 성공한 프로 선수가 된 장현우는 부모님께 은혜를 갚기 위해 더 좋은 곳에서 모시려고 했지만, 부모님은 살고 있는 집을 떠날 생각이 없으셨다.
고집이 워낙 세다 보니 장현우도 손발을 든 상태였다.
고향에서 쉬던 장현우는 마침 아버지와 단둘이 있게 됐다.
처마 밑에서 과일을 먹으며 아버지가 장현우에게 말을 걸었다.
“현우야. 너 이제 어디서 뛸 거냐?”
아버지의 물음에 장현우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거, 고민 길어서 좋을 것 하나 없다.”
“알고 있어요.”
“긍게 뭐가 문제다냐?”
아버지는 궁금한 눈치였다.
분명 시즌 내내 아들이 만족스럽게 경기를 치른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K리그를 넘어 월드컵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치지 않았던가.
“사실 해외에서 제안이 왔어요.”
“뭐? 그 말이 참말이냐?”
“네. 제가 뭐하러 거짓말하겠어요.”
“아니! 그걸 왜 이제 얘기하냐!”
아버지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저도 얼마 전에 받았어요. 그 왜 있잖아요. 제 에이전트 맡아 주는 찬권이 형. 그 형이 개인적으로 제안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허. 그 아주 좋은 일 아니더냐! 설마 그거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냐?”
“네.”
장현우 입장에서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K리그 선수가 해외로 나가는 일은 쉽지 않다.
아니, 가까운 일본, 중국, 동남아, 중동은 갈 수 있다.
그런데 장현우에게 제안 온 해외 팀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하아. 이걸 어쩐다.”
원 소속팀인 전북은 장현우의 오퍼에 대해 알고 있었다.
꽤 높은 이적료를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북은 선수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해 주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장현우는 더욱 고민이 되었다.
“고양 유나이티드가 그만큼 좋더냐?”
“네?”
“얼매나 좋으면 그렇게까지 고민하겄냐.”
아버지의 말에 장현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였다.
“장현우 선수 계십니까?”
“어?”
부모님이 사는 고향 집에 낯익은 인물이 방문한 것이다.
“대, 대표님!?”
바로 지태훈이었다.
* * *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혹시 불편하게 만든 것은 아니죠?”
“앗, 아닙니다!”
나는 장현우와 시내로 나가서 근처 커피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잘 쉬고 계셨습니까?”
“아, 넵. 모처럼 부모님하고 좋은 시간을 보냈네요.”
“여기가 장현우 선수 고향인가 보죠?”
“네. 맞습니다. 부모님 모두 익산에서만 수십 년을 사셨으니까요.”
“그렇군요.”
분위기를 풀기 위해 서로 근황 이야기들을 나눴다.
이제 분위기가 조금은 풀어진 것 같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자.
“장현우 선수.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죠. 다가올 시즌에도 저희와 함께하시면 어떻습니까?”
“…….”
그러자 장현우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걸 본 나는 의문이 들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나도 모르는 갑질이라도 당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당장 망나니 대표 출동이다.
“그, 음, 그러니까…… 사실 며칠 전에 해외에서 좋은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
해외?
하긴 그냥 놀랄 일은 아니다.
장현우가 지난 시즌 동안 보여준 활약이라면 충분히 해외에서 오퍼를 받을 수 있다.
“해외라면 어디입니까? 일본? 중국?”
“독일이요.”
“아, 독일이구…… 네!?”
뭐? 독일?
내가 아는 그 독일?
“독일 도르트문트에서 오퍼가 왔습니다. 그쪽 감독님께서 저를 적극적으로 원한다고 하더라고요.”
“…….”
도르트문트라면, 바이에른 뮌헨, 라이프치히 같은 팀들과 우승 경쟁을 하는 팀이 아닌가.
그런 곳에서 장현우에게 오퍼를 넣었다고?
이거 너무 생각지도 못한 대형 오퍼였다.
우리가 아무리 돈을 쏟아붓더라도 이 정도 오퍼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내가 선수라도 당장 그곳으로 가겠다.
“정말 축하드릴 일이군요.”
인재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속에서 피눈물이 줄줄 흘렀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오히려 장현우의 표정이 더 좋지 않다.
“대표님께서는 제가 도르트문트로 가면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네?”
뜬금없는 물음에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나는 곧 그가 던진 말의 의미가 뭔지를 깨달았다.
“혹시 고민하고 계십니까?”
“…….”
장현우는 말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런 장현우에게 당장이라도 ‘이 멍청아! 그런 좋은 기회를 버릴 셈이냐?’라고 외치고 싶지만, 내가 한 구단의 대표라는 포지션을 잊지 않았다.
“축구 선수라면 응당 더 좋은 환경과 기회가 보장된 곳에 뛰는 게 맞다 생각합니다.”
“…….”
“하지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장현우 선수가 다음 시즌에도 저희와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
“…….”
냉정하게 판단하면, 장현우가 도르트문트로 간다면 그곳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분데스리가 상위권 팀이다.
아무리 장현우가 리그와 국가대표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한들, 그곳에서 벌어질 주전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여러모로 리스크가 크다.
그렇다 하더라도 축구 선수로서 성장하려면 도전해 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저는 야망이 큽니다.”
“……네?”
“고양 유나이티드도 분명 저로 인해서 야망이 큰 구단으로 변모할 겁니다. 실제로 그렇게 성장하고 있고요.”
장현우는 내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순간 어리둥절했다.
그러다가 이어지는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앞으로 장현우 선수가 우리 팀 선수로 뛰는 것도 분명 엄청난 도전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