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박형우가 떠나고 김 비서가 들어왔다.
“박형우 선수가 대표팀에서 은퇴한다고요?”
“응. 본인 의지가 확고해.”
“그럼 대표팀에 은퇴하고 나서 우리 팀에게 더 집중할 수 있겠네요.”
“그럴 것 같아. 다른 팀으로 이적할 생각도 없어 보이고.”
사실 시즌이 막바지부터 박형우에게 거액의 이적 제안들이 들어왔었다.
제안을 보내온 팀은 다양했다.
하지만 박형우는 그런 이적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남은 계약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전달했었다.
“앞으로 1부에서 뛸 때 박형우의 역할이 중요해.”
“그렇죠. 분명 큰 힘이 될 거예요.”
“그래야지.”
“그건 그렇고 칼리드 왕자가 조만간에 한국으로 오겠다고 연락을 해왔습니다.”
“정말?”
“네. 꽤 다급한 모양인가 봐요.”
“다급하겠지.”
칼리드 왕자가 몰래 나와 형 사이에 저울질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우리의 관계는 뒤틀릴 뻔했다.
하지만 칼리드 왕자는 순순히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고 사과했으며 그에 관한 합당한 보상을 하기로 약속했다.
“과연 보상을 무엇으로 해줄까요?”
“글쎄, 솔직히 저번에 소중한 거 달라면서 한 번 크게 질러 보기는 했는데, 진짜 뭘 줄지는 알 수가 없네.”
“돈이라도 줄까요?”
“글쎄, 돈일 수도 있고 다른 쪽일 수도 있겠지?”
칼리드 왕자는 생각보다 나하고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듯 보였다.
이 상황이 어쩌면 나에게 중요한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자세한 건 왕자를 만나보면 알겠지.”
* * *
시즌이 모두 끝났다.
이 말은 K리그1, 2의 우승팀과 승격 그리고 강등까지 모두 정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K리그2 우승은 고양 유나이티드.
K리그1 우승은 전북.
이건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정규 리그 일정이 끝난 이후 FA컵 경기와 승격 플레이오프 그리고 아시아챔피언스리그가 진행됐다.
FA컵 결승전은 울산과 포항의 ‘동해안 더비’로 펼쳐졌다.
K리그1 마지막 경기에서 막판 대역전패로 준우승에 머문 울산은 FA컵에서 반드시 승리하겠다며 이를 악물고 결승전에 임했다.
그리고 그런 각오답게 경기는 시종일관 울산이 주도했다.
하지만 포항의 저력도 만만치 않았다.
매번 엎치락뒤치락하는 동해안 더비에서 포항의 저력은 매서웠다.
『89분이 되어가고 있는데 아직 골이 없는 두 팀인데요. 이대로 끝나면 연장전으로 가는데…… 어어어!? 실수가 나옵니다!』
정규 시간 종료를 앞두고 벌어진 울산의 어이없는 대형 실수가 터졌다.
울산 골키퍼가 수비수에게 패스를 시도했다가 헛발질을 했고, 기회를 보던 포항의 외인 공격수 라울이 놓치지 않고 그대로 득점으로 만들었다.
와아아아아-!
『들어갑니다! 정규시간이 끝나기 전에 라울이 득점을 만들어 냅니다!』
『이야! 어떻게 이런 실수가 나오죠? 이건 울산의 실수입니다! 대형 실수!』
『얼굴을 감싸 쥐고 있는 울산 골키퍼 최태형인데요. 울산의 선수들과 팬들 모두 절망합니다!』
『포항은 신나죠! 오늘 라울 선수 선발로 나와서 한 게 없었거든요? 이번 시즌 내내 죽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방출설까지 나돌던 라울이 결국 포항에게 선물 하나 만들어 주네요!』
『추가 시간 3분 남았는데요! 울산에게는 기회가 얼마 없습니다!』
어이없는 대형 실수를 범한 울산이 동점골을 넣기 위해 모든 선수가 포항의 진형으로 넘어가서 싸웠다.
울산 감독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공격하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 결과는 울산의 참패만을 부추겼다.
『울산의 코너킥인데요! 여기서 과연 하나 만들어낼까요? 올라가는데요! 골키퍼 펀칭! 공은 울산이 아닌 포항에게 갑니다!』
『어! 이거 기회죠! 지금 울산 선수들이 모두 올라와서 앞에 아무도 없어요!』
『자! 포항에게 엄청난 찬스가 왔습니다! 원정 온 포항팬들이 모두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라울이에요! 라울! 라우우우우우울! 골! 골입니다!』
『경기를 끝내는 득점이 나왔습니다! 라울의 멀티고오오올!』
울산 골키퍼가 일대일로 막아보려고 했지만 라울은 침착하게 추가 득점을 기록했다.
사실상 경기를 끝내는 골이었다.
『주심이 휘슬을 붑니다! 포항이 FA컵 우승을 차지합니다!』
『아, 울산 선수들 눈물 흘리네요. 마음 아프죠. 분명 트레블을 노렸는데, FA컵마저 포항에게 내줬네요.』
『눈물을 흘리는 울산 선수들. 아직 끝이 아닙니다. 울산에게는 아챔이 남아있습니다.』
『그렇죠. 울산이 지금 아챔 결승전에 올라갔기 때문에, 이제 남은 건 아시아챔피언스리그뿐입니다. 이제 여기에 집중해야죠.』
FA컵 결승전이 끝나고 승격과 강등이 걸린 죽음의 승강 플레이오프가 펼쳐졌다.
『이변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대이변이 벌어졌다.
K리그 10위로 마무리 지은 성남 유나이티드와 K리그2 3위인 서울 다이너스티의 플레이오프 맞대결.
『1차전에서 서울 다이너스티가 성남 홈에서 3:0 대승을 거둡니다!』
『성남이 무너지네요. 이제 남은 2차전에서 성남은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1차전에서 홈에서 대패를 당한 성남 유나이티드.
홈에서 패배.
그것도 3실점이나 내준 패배였다.
원정 다득점이 적용되는 플레이오프에서 3실점은 너무나도 컸다.
성남이 2차전에서 살아남으려면 서울 다이너스티를 상대로 무실점으로 4골이나 넣어야 했다.
서울이 삽질하지 않은 이상 나오기 어려운 확률이었다.
모두가 서울 다이너스티의 승격을 속으로 인정하고 있는 가운데, 2차전이 펼쳐졌다.
그리고 2차전에서 대격변이 일어났다.
『골! 골입니다! 성남이 전반 18초 만에 선제골을 넣습니다! 1:0으로 앞서가는 성남!』
『이야! 시작부터 성남 괜찮은데요?』
경기 시작 18초 만에 기록한 성남의 선제골.
묘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경기는 이후 성남의 골 폭죽으로 이어졌다.
『결국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성남이 4번째 득점을 기록합니다!』
『이게 정말 말이 되나요! 4번째 골이라뇨! 이건 축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누구보다 기적을 바랐던 성남에게 엄청난 기적이 찾아왔습니다!』
서울 다이너스티 선수들은 기가 막혔다. 사실상 승격했다고 생각했던 그들은 예상치 못한 성남의 광폭 행보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결국 서울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졸전으로 경기를 진행했다.
그리고…….
『주심이 경기 종료 휘슬을 붑니다! 이렇게 해서 성남이 K리그1 잔류에 성공합니다!』
『와! 역대급 플레이오프였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더 있을까 싶네요!』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는 성남의 잔류로 막이 내렸다.
이후 아시아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진행됐다.
『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자존심이 걸린 아시아챔피언스리그 결승전입니다!』
4강까지 동아시아와 서아시아로 나누어 진행되는 아시아챔피언스리그는 결승전에서 맞붙었다.
사실상 동아시아 챔피언과 서아시아 챔피언의 대결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울산의 상대는 이란의 에스테그랄입니다! 울산은 1차전에서 홈경기를 치르고 2차전 이란 원정을 떠나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에스테그랄의 홈구장은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아자디 스타디움입니다!』
『1차전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2차전 원정은 울산에게 굉장히 어려울 수 있습니다.』
에스테그랄은 이란 국가대표 출신 선수들을 다수 보유한 팀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울산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대한민국과 이란의 리틀 국가대표 매치라고 볼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최근 전적에서 이란에게 열세를 보이던 대한민국 대표팀이다 보니, 국내 축구팬들은 울산이 에스테그랄을 꺾어 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시작된 결승 1차전.
『경기를 주도하는 울산인데요! 아! 또 기회가 찾아온 울산입니다! 권태훈, 앞으로 찔러줍니다!』
『와! 잘빠졌는데요! 마르티네스! 기회죠! 때려야죠!』
『마르티네스, 일대일인데요! 슈우우웃! 들어갑니다! 마르티네스의 선제골이 나왔습니다!』
울산은 미드필더 마르티네스의 선제골로 앞서가며 시종일관 경기를 주도했다.
그 결과 전반에 1골, 후반에 1골로 총 2골을 만들며 2:0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렇게 우세한 상황 속에서 2차전 에스테그랄 원정을 떠났다.
하지만 2차전 원정은 울산에게 상당히 어려운 경기가 되었다.
『아! 실점합니다! 테즈만에게 실점을 당합니다.』
『아쉽네요. 테즈만 선수가 이란 국가대표에서도 활약하는 선수인데, 이 선수가 1차전에 여권 문제로 못 나왔단 말이죠? 이번 2차전에서는 선발로 나올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이렇게 한 건 하네요. 아쉽습니다.』
팽팽한 전반전이었던 양 팀의 경기는 테즈만이 만든 선제골로 균형이 깨졌다.
이후 기세가 오른 에스테그랄이 울산을 몰아붙였다.
『아! 또 실점합니다! 이번에도 테즈만이네요.』
『울산, 상황이 좋지 않아요. 아직 시간 있으니까 얼른 분위기 추스르고 경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평소 막걸리 해설로 유명한 박하윤 해설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외쳤다.
종합 스코어 2:2가 된 상황.
울산 선수들에게 또 다시 절망감이 엄습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그들의 정신을 일깨울 한줄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차려! 또 준우승할 거야!?”
한국에서 멀리 이란 원정까지 따라온 울산 팬의 목소리였다.
원정 좌석에 홀로 있던 울산 팬이기도 했다.
이 팬이 내지른 말 한마디에 선수들이 모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것은 기어코 기적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정규시간도 끝났고 추가 시간도 이제 1분 남았습니다. 울산의 마지막 기회인데요.』
『자, 여기서 어떻게든 하나 해봐야죠!』
『마지막 교체로 들어온 권태훈, 패스합니다! 오우! 환상적인 패스가 나옵니다!』
『오! 1차전 때 그 패스네요! 잘 빠졌어요! 이번에도 마르티네스인데요! 가야죠! 마르티네스!』
『기횝니다! 마르티네스 슈우우웃!』
『이야아아아아아!』
수비를 뚫는 권태훈의 킬패스와 마르티네스의 회심의 왼발 슈팅이 그대로 에스테그랄의 골망을 흔들었다.
득점에 성공한 마르티네스가 아까 그들을 향해 외친 울산 팬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벤치에 있던 선수들과 필드에 있던 선수들도 모두 마르테니스처럼 팬 앞으로 뛰어갔다.
중동 원정의 어려움을 딛고 홀로 울산 유니폼과 머플러를 손에 쥐고 열심히 응원하던 팬은 그 모습을 보고 감격에 차서 눈물을 흘렸다.
『아, 우네요! 울어요! 울만 하죠! 이렇게 감동적인 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 주심이 그대로 경기 종료를 알립니다! 울산이 2차전의 어려움을 딛고 이번에는 우승 트로피를 차지합니다!』
리그와 FA컵에서 준우승을 하던 울산은 마침내 아시아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며 시즌을 마무리 지었다.
* * *
“이야, 결국 울산이 우승하는구나.”
TV로 생중계를 시청하던 나는 울산의 극적인 우승 장면을 보고 놀라워했다.
솔직히 나는 울산이 질 줄 알았다.
“내년에 우리도 뭔가 하나 건지면 좋겠는데 말이야.”
기뻐하는 경쟁팀의 모습을 보니 조금 부럽기도 했다.
물론 우리도 이번에 우승의 기쁨을 누리기는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 쉴 수가 없겠어.”
다음을 위한 나의 업무는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