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어, 박 팀장. 이제 오는가?”
회장실에는 이미 지종윤 회장이 안에 있었다.
생글생글한 얼굴로 뜨거운 차를 마시고 있는 그를 향해 박준후 팀장이 의아해 했다.
“회장님, 오늘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군요?”
“그래 보이나?”
“네.”
오랜 시간 곁에서 회장을 모셔온 박준후는 사소한 말 한마디나 손짓 하나만 봐도 지종윤 회장이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었다.
지종윤 회장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역시 자네를 속이긴 어렵구만.”
“이토록 대놓고 티를 내는데, 알기 어려울 수가 없죠.”
“그런가? 하하하하!”
지종윤 회장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 그를 조용히 지켜보던 박준후 팀장은 곧 그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알게 되었다.
“회사 내에서 태훈이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도는 모양이야. 그것도 아주 긍정적으로.”
“그렇더군요.”
“자네도 알겠지만, 사실상 우리는 고양 유나이티드를 비롯해 프로스포츠에서 거의 손 뗀 상황이 아니었나.”
회장의 말대로, 영신그룹은 내부적으로 프로스포츠 산업 지원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이 많았었다.
과거 1980년대에 정부 주도로 시행됐던 3S 정책의 일환으로 대기업들은 반강제적으로 프로스포츠 산업을 지원해야 했다.
영신그룹 계열사인 영신 스포츠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영신 스포츠가 그룹 내 수많은 계열사 중에서 제일 큰 적자를 내고 있었다.
기업 입장에서는 매년 상당한 출혈을 감수하며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면서, 이제는 내부적으로 대기업이 의무적으로 프로스포츠 산업을 지원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내가 회장이라도, 기업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지.”
대기업 회장이라도 때론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다.
지종윤은 스포츠를 사랑했다.
그중에서도 축구에 가장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그룹 내부에서 프로스포츠 구단을 운영하는 것에 대한 반감을 가지는 것과 때맞춰 고양 유나이티드를 비롯한 스포츠팀들이 동반 하락세를 겪었다.
그래서 지종윤 회장도 프로스포츠 지원 사업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거의 방치되다 싶었던 막내아들이 등장했다.
“태훈이 녀석 덕분에 당분간 프로스포츠 지원을 끊내자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게 됐어.”
“회장님.”
“음?”
박준후 팀장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지태완 사장을 포함한 라인들은 기업의 프로스포츠를 반대하는 분위기입니다.”
“…….”
“지태완 사장이 최근 영신 전자 내부 인사 정리를 끝마치고 본인의 자리를 확고하게 잡은 상태고요.”
“자네는 태완이가 태훈이 녀석을 방해할 거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흐음.”
조금 전까지 기분 좋은 얼굴을 하던 지종윤 회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째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가?”
“지태완 사장에게 있어 지태훈이란 존재가 거슬리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
그 말에 지종윤 회장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박준후 팀장이 먼저 말을 하며 침묵을 깼다.
“저는 궁금합니다. 회장님께서 지태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
“단순한 막내 아들로 보는 것 같지는 않고, 혹 그를 차기 총수로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할 건가?”
“……!”
박준후 팀장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동안 두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애매하게만 행동했던 지종윤 회장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도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네.”
“…….”
“지태완이 그놈이 호랑이 같은 존재라면, 지태훈이 그놈은 용과 같은 존재야.”
“……!”
회장은 첫째 아들보다 막내아들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해 주고 있었다.
혹여 막내아들에 대한 편애로 생긴 이야기일까?
그러기에는 말하고 있는 지종윤 회장의 모습은 진지했다.
긴 세월 속에서 겪어 생긴 연륜.
그 연륜이 담긴 눈동자가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회장의 모습 속에서 박준후 팀장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박 팀장. 호랑이나 용이나 둘 다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의 공통점도 있네. 그게 뭔지 알고 있나?”
“……무엇입니까?”
“그건 둘 다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저 덩치 큰 고양이가 되거나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로 끝난다는 거야.”
“…….”
“두 사람은 결국 부딪칠 수밖에 없을 거야. 그것이 서로에게 주어진 시련이니까.”
박준후는 소름이 끼쳤다.
‘설마, 이 상황을 예측하고 계셨던 것일까?’
아니다.
예측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저 당연하게끔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옛날, 지종윤 또한 치열한 혈전을 치르고 지금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준후는 회장의 존재가 한편으로 무섭게 느껴졌다.
“시련을 이겨낸 자가 결국 왕관을 쓰겠지.”
그렇게 말하는 지종윤 회장의 두 눈은 서늘하게 빛났다.
* * *
조용히 휴가를 보내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천지원 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네? 어디서요?”
“레버쿠젠에서 이번 겨울 전지 훈련 상대로 와줄 수 있냐고 연락이 왔습니다.”
“레버쿠젠이면, 그 독일에 있는 그 팀 맞죠?”
“네, 대표님. 그 팀 맞습니다.”
“헐.”
바이어04 레버쿠젠.
독일 분데스리가에 속한 명문 클럽 중 하나이며, 한국과 유독 인연이 많은 클럽이기도 했다.
“지난번에 저희가 스페인 전지훈련을 했었을 때 모습을 봤던 모양입니다. 그때 꽤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갑자기 연락이 온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번 겨울에도 해외 전지훈련을 갈 생각은 없었다.
비용적인 부분과 시간이 많이 들어갔다.
무엇보다 지난겨울 전지 훈련은 이벤트성에 가까웠고.
설령 또 진행한다 하더라도 다음번에 진행할 생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레버쿠젠에서 먼저 뜬금없이 연락을 준 것이다.
“대표님, 어떻게 할까요?”
소식을 전달하는 천지원 부장도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
무작정 고민만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나는 조금 생각했다가 대답했다.
“레버쿠젠 쪽에서 전지 훈련 비용과 초대 비용을 준다면 승인하겠다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조금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어차피 계획에도 없었던 일이기에 이렇게 하면 적당히 눈치껏 물러나겠지.
“이렇게까지 했는데 설마 계속하겠어?”
나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저, 대표님?”
“예?”
“해준답니다.”
“뭐를요?”
“독일로 오는 비용과 연습 경기 초대 비용까지 주겠답니다. 액수로 치면 5억 정도랍니다.”
“……!”
두 눈이 부릅떠졌다.
“아니, 왜?”
정말 의문이다.
왜 이렇게까지 레버쿠젠이 우리와 훈련을 하려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뭐가 남는다고.
그런데 이런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레버쿠젠 쪽에서 아시아 마케팅을 겸해서 연습경기를 치를 모양입니다.”
“그래요?”
“네. 지난번에 저희와 붙었던 스페인 팀들이 한국에서 꽤 호의적인 반응들을 얻은 모양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레버쿠젠도 우리를 통해서 마케팅 효과를 누리겠다?”
“네. 저희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생각했을 때 상당히 싸게 먹히는 셈이죠.”
그저 단순한 이벤트성으로 기획하고 실행했던 일이 이렇게까지 나아갈지는 전혀 몰랐다.
“어쩔 수 없네요. 휴가 복귀 후에 독일로 갈 준비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 * *
나는 김 비서와 함께 천안으로 향했다.
평일 출근 시간이 지난 상태에서 차를 몰고 가니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천안 시내를 지나 외곽으로 빠졌다. 그렇게 외곽으로 빠지니 논밭들이 나왔다.
그런 논밭들을 지나쳐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묘지가 나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우리는 묘지로 향했다.
수많은 묘지 사이에 한 묘비 앞에 선 나는 준비했던 마른오징어와 과일 그리고 술을 꺼냈다.
김 비서도 음식을 세팅할 수 있게 옆에서 도왔다.
“엄마. 내가 너무 늦게 온 거 아니지?”
‘성효원’이라 적힌 묘비.
이 묘비의 주인공은 바로 돌아가신 내 어머니였다.
회귀 후, 처음으로 어머니의 묘비를 찾은 나였다.
“그동안 미안해. 진즉에 찾아왔어야 했는데…….”
막상 엄마의 묘비를 보니 가슴이 울컥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눈물을 흘릴 자격이 없는 놈이라는 것을.
회귀 전에도 엄마의 묘비를 찾아간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도저히 엄마를 볼 낯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제 과거의 나약하고 대책 없던 내가 아니다.
“엄마. 나 우승했어.”
손수 제작한 미니 트로피를 꺼내 묘비 앞에 놓았다.
“이 트로피로 인해서 앞으로 많은 것들이 달라질 거야.”
변화는 이미 오고 있었다.
“반드시 총수가 될게.”
비참한 삶을 살던 내가 회귀한 일은 어쩌면 느닷없이 벌어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기적 같은 일을 겪은 내가, 이 기회를 결코 놓칠 생각이 없었다.
“꼭 지켜 봐줘.”
돌아가신 엄마가 나를 보고 웃을 수 있게, 꼭 결과물을 만들어 낼 거다.
그렇게 엄마와 모처럼 만나고 돌아가는 길.
침묵을 유지하던 김 비서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오늘이 기일이었죠?”
“응. 맞아.”
그녀의 말대로 오늘은 사실 엄마의 기일이었다.
“어머니는 정말 좋으신 분이었죠.”
“…….”
“어렸을 적에 저를 정말 딸처럼 귀여워 해주신 일은 아직도 기억나요.”
어머니는 내가 영신그룹에 들어가고 얼마 안 돼서 돌아가셨다.
오랜 시간 지병이 있었던 엄마는 생명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고, 그 소식을 알게 된 아버지가 수소문 끝에 어머니를 찾은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는 나를 영신그룹으로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셨다.
그 시간 사이에 김 비서도 우리 엄마를 만났었던 적이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에게도 엄마에 대한 기억이 좋게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
“아마 어머니께선 도련님을 보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계실 거예요.”
“……그럴까?”
“네. 확실해요.”
김 비서가 나를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인지,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으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는 것은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작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지이이잉.
“음?”
갑자기 울리는 스마트폰 진동.
주머니 속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무뚝뚝한 박준후 팀장]
“어라?”
전화번호부에 저장만 되어 있고 나하고는 거의 연락을 하지 않은 박준후 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연락이 잘 안 되던 사람으로부터 갑자기 연락 오면 좀 그렇던데.
“누구예요?”
“박 팀장.”
“네? 박준후 팀장님이요?”
“어.”
“받으셔야죠.”
“별로 받고 싶지 않은데…….”
“얼른 받으세요!”
김 비서가 재촉하자 나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준후 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네?”
-회장님께서…… 회장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
순간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