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간밤에 달린 속을 해장하기 위해 근처 순댓국집으로 간 나와 김 비서.
“…….”
둘 사이에 묘한 침묵이 형성되는 가운데, 순댓국집 이모가 불쑥 등장해서 말을 걸었다.
“주문 뭐로 하실 건가요?”
“어, 음. 얼큰? 김 비서는 뭐 먹을래?”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그럼 얼큰 2개.”
“주문받았습니다.”
주문을 받고 돌아간 이모.
다시 나와 김 비서 사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그녀는 내가 급하게 마련한 옷을 입고 말없이 스마트폰을 하고 있었다.
‘답답하다.’
어찌 됐든 내 실수다.
내가 사과를 했고, 김 비서가 사과를 받았다고 해도, 이 불편한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안 되겠다.’
답답한 나머지 나도 스마트폰을 켰다. 별달리 의미 없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던 나는 포털사이트 스포츠 기사 코너에 들어갔다.
마침 어제 우리 팀 관련 기사들과 하이라이트 영상이 수두룩하게 올라와 있었다.
『고양 유나이티드 – 제주FC 골 모음』
『5년 만에 1부 리그로 복귀하는 고양 유나이티드!』
『구단 역사상 첫 우승 거머쥔 고양, 이제는 1부 리그로 향하다!』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낸 승격. 결국 투자가 답이라는 것을 보여준 고양 유나이티드.』
『고양U 박형우, 28골로 K리그2 역대 최다 득점왕 확정!…… 팀 동료 김지우 18도움으로 K리그2 역대 최다 도움왕 달성.』
『역대급 준우승을 기록한 제주FC 강석훈 감독 “아쉽다. 1부에서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다.”』
『우승의 기쁨? 광란의 밤을 보낸 고양 유나이티드 대표와 서포터스.』
“…….”
흥미롭게 기사들을 쭉 살펴보던 나는 마지막 기사에 시선이 향했다.
물을 마시면서 기사를 눌러보았다.
“푸훕!”
하마터면 물을 뱉을 뻔했다.
기사에는 어젯밤에 술에 취한 상태에서 서포터스들과 함께 라페스타에서 신나게 노래 부르고 방방 뛰었던 동영상이 첨부되어 있었다.
누가 찍었는지 몰라도 조회수가 상당히 높았다.
동영상이 올려진 플랫폼 링크로 접속해서 들어가니 댓글 반응도 확인할 수 있었다.
-지 대표 개 신났네.
-개 부럽다. 프런트하고 서포터스하고 저렇게 신나게 어울리는 모습 보니까 꼭 유럽 리그 보는 거 같네.
-확실히 지태훈 대표가 젊어서 그런지, 국내 축구 분위기를 많이 바꿔놓고 있는 것 같아.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들이었다.
나쁜 반응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다행이다.
“뭘 그렇게 보세요?”
한참 댓글들을 확인하고 있는데 김 비서가 궁금하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아, 댓글을 좀 보고 있었어. 한번 볼래?”
그렇게 말하고 김 비서에게 스마트폰을 건넸다.
김 비서도 곧 동영상과 댓글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게 올라왔었다니.”
“괜찮지 않아?”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심하세요. 언제든지 악의적인 마음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알아. 그래도 이런 것도 있어야 사람 사는 맛이 있지. 안 그래?”
“그렇기는 하죠.”
대화를 나누면서 어색해진 분위기가 조금은 풀렸다.
“그건 그렇고 김 비서는 휴가 때 뭐할 거야?”
“글쎄요. 딱히 계획은 없어요. 그냥 좀 쉬고 싶은 생각만 있네요.”
“음. 그래?”
하긴, 김 비서도 나 따라다니면서 일 도와준다고 고생 많았지.
시즌도 끝났고 원하던 결과도 얻었으니 푹 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김 비서를 두기에는 내 마음이 아쉬웠다.
왜 그런지는 몰랐다.
그저…….
“김 비서, 그러지 말고 그냥 나하고 있을래?”
“……네?”
“아,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그, 그냥 집에서 쉬는 것보다 바람이라도 쐬면서 쉬면 좋지 않냐…… 그런 말이야!”
“아아, 네.”
어쩐지 김 비서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아니야. 미안. 너무 내 생각만 했네.”
“…….”
머쓱하고 있는데 마침 주문했던 순댓국이 나왔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순댓국을 앞에 두고 김 비서가 말문을 열었다.
“생각해 볼게요.”
“음?”
김 비서는 조심스럽게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입 떠먹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나는 슬그머니 미소를 짓고 똑같이 순댓국 국물을 떠먹었다.
* * *
이번 시즌 K리그2에 가장 좋은 활약을 펼친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 딱 한 사람을 뽑으라고 한다면 바로 대부분은 박형우를 지목할 것이다.
실제로 박형우는 시즌이 시작되기 전 2부 리그로 국내 리턴하며 많은 축구팬들을 놀라게 했다.
일부 우려 섞인 반응도 있었지만, 그는 소속팀과 대표팀 모두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러한 활약 덕분에 소속팀과 대표팀 모두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런 그가 시즌이 끝나고 고민에 휩싸였다.
“결단을 내릴 때인가.”
올해 32세인 박형우.
아직 만으로는 31세로 젊은 나이지만, 축구 선수로서는 분기점에 서 있는 나이이기도 했다.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박형우 앞에는 3장의 서류가 있었다.
그 서류들은 모두 시즌이 끝날 때 맞춰서 날아온 이적 제안서였다.
“국내 팀 1팀, 해외 팀 2팀.”
칼리드 왕자가 보내준 이적 제안서들은 모두 훌륭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보다 더 높은 연봉과 주전으로서 활약할 수 있는 다양한 옵션들까지.
분명 축구 선수라면 흔들릴 만한 제안들임은 분명했다.
“젊은 시절의 나였다면 이런 제안에 훅 넘어갔겠지.”
이미 젊었을 적에 한 번 크게 실패했던 경험이 있던 박형우.
그에게 이런 이적 제안서는 그저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이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사실 지금 그에게 있어 이적 제안서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더 할까? 아니면 그만둘까?”
국가대표.
그에게 있어 적어도 성공적인 월드컵이었다.
늘 비판을 받아왔던 자신이 이번 월드컵을 통해서 단번에 이미지 개선에 성공했다.
포지션 경쟁자로 여겼던 강철인도 그를 인정했다.
지이이잉.
갑자기 진동하는 스마트폰.
화면에는 익숙한 이름 하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제이든]
놀랍게도 전(前) 대한민국 국가대표 감독이었다.
“여보세요?”
그가 전화를 받자 곧 제이든 감독의 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 결단은 내렸나?
“…….”
-아직도 고민하는 모양이로군. 신중한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고민을 길게 한다고 해서 좋은 것도 없네.
“알고 있습니다.”
-자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받을 거라는 걸세.
“정말 그럴까요?”
-물론이네. 어디까지나 자네가, 스스로를 존중하고 인정한다면 말이지.
“…….”
-그럼 무운을 빌겠네.
전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하아.”
저도 모르게 짧게 한숨을 내쉰 박형우.
그에게는 아직 미련이 남아 있었다.
바로 국가대표에 대한 미련이.
분명 훌륭한 활약을 펼치고 만족스러울 만한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시간이 지나고 보니 여전히 부족했다.
“3년만 젊었어도…….”
월드컵을 한 번 더 도전하기에는 적지 않은 나이다.
지금부터 4년 후면 자신은 36살이 된다.
만으로는 35살.
결코 쉽지 않다.
과거 자신처럼 국가대표 경험이 있으면서 같은 소속팀 동료인 김지우도 30세가 넘어가면서 더이상 국가대표로 뛰지 않았다.
은퇴까지는 아니지만, 분명 20대 때와는 다른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퇴보하기 시작하는 실력과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젊은 후배들의 모습을 볼 때, 과연 내 자신은 얼마나 더 활약할 수 있을까?
이것에 대한 고민은 월드컵을 시작하기 전부터 했었다.
“이제는 정말로 결단을 내려야 해.”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 *
“네? 뭐라고요?”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던 곽찬구 감독.
그런 그에게 놀랄 만한 연락이 닿았다.
“저를 차기 국가대표 감독 후보로 선정했다고요?”
“그렇네. 자네가 선수 시절 쌓았던 경력과 감독으로서 파주와 고양을 이끌면서 보여 줬던 경력들이라면 충분히 대표팀 후보로 오를 자격이 있지.”
대한축구협회 이사 최용호와 직접 얘기해주었다.
최용호는 곽찬구 감독이 선수 시절 이미 대표팀에서 주장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좋은 활약으로 대한민국을 4강으로 이끈 인물이기도 했다.
현재 그는 축구협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곽찬구 감독과는 사적으로 형, 동생 하는 사이였다.
“형님. 저를 좋게 봐주시는 데는 감사한데, 저보다 더 좋은 후보들이 많지 않습니까?”
“물론 후보는 너 말고도 몇 사람 더 있어. 하지만 현실적으로 봤을 때, 너만큼 적합한 인물도 없다고 생각해.”
“현실적인 이유라면……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대한민국 대표팀을 이끌며 최고의 활약을 보였던 크리스토퍼 제이든 감독.
제이든 감독은 생각보다 저렴한 연봉으로 데려온 외국인 감독이었다.
그런 그가 기대 이상으로 대표팀에서 성과를 내주면서, 내외적으로 후임 감독에 대한 기대감이 상당히 높아진 상태였다.
하지만 협회 내의 제한적인 자금 운용 때문에 매물로 나온 감독 중에서 데려올 감독이 많지 않았다.
실력 있는 감독들은 대부분 소속팀이 있는 상태였다.
소속이 없는 감독들은 연봉과 조건을 강하게 불러서 축구협회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러한 현실적인 이유들을 곽찬구 감독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형님.”
“음?”
“제가 듣기로는 석훈이도 대표팀 후보에 올랐다고 들었는데요.”
“석훈이? 아.”
강석훈을 언급하자 최용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곧 허탈한 기색으로 말했다.
“석훈이는 단번에 거절했어. 계약 기간도 많이 남았고, 소속팀에서 절대 보내줄 생각이 없다고 하더라고.”
“그래요?”
곽찬구 감독은 깜짝 놀랐다.
“그래도 본인이 원하면 그 정도는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설마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다른 이유…… 있다면 있지.”
“……?”
최용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바로 너 때문이야.”
“네? 갑자기 제가 왜요?”
“네가 석훈이를 너무 자극했어. 석훈이가 너 이길 때까지 포기할 수 없댄다.”
“예!?”
곽찬구는 어이가 없었다.
어이가 없기는 최용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물었지. 만약 찬구가 대표팀 감독을 수락해서 가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했더니, 정 안 되면 자기는 일본이나 중국 대표팀 감독으로 가겠다고 하더군.”
“…….”
곽찬구는 할 말을 잃었다.
“어쨌든 상황이 이렇게 됐어.”
“만약 제가 거절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글쎄…….”
최용호는 어두워진 얼굴로 뒷말을 흐렸다.
그 모습을 본 곽찬구 감독도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형님, 저에게 시간을 조금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 생각해 보고 연락 줘.”
“네.”
그렇게 두 사람의 만남이 끝났다.
* * *
지종윤 회장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박준후 팀장.
그는 영신 그룹의 보이지 않는 실세이자 권력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스스로를 늘 경계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회장님을 보좌하는 것이다.
오로지 그것 하나만 생각하고 수십 년을 일해왔다.
오늘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출근했다.
“팀장님, 안녕하십니까.”
끄덕.
직원들이 박준후 팀장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그는 그런 직원들을 향해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직원들에게는 이런 박준후 팀장의 행동이 익숙했다.
그렇게 회장실로 향하는데, 그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팀장님, 출근하십니까?”
“……지 사장님.”
지태완은 사람 좋은 얼굴을 보이며 박준후에게 인사했다.
박준후도 가볍게 인사하며 반응했다.
“여전히 한결같으시군요.”
“…….”
“아버지는 좋으시겠습니다. 박 팀장님 같은 분이 늘 곁에 있으니까요.”
뭘까?
비꼬는 걸까?
아니면 순수한 칭찬일까?
박준후은 지태완의 말속에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위화감은 이번만이 아니었다. 이미 수많은 상황 속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았다.
회장의 아들이기에 그저 조용히 지켜만 볼 뿐이었다.
“언제 한번 같이 식사라도 하시죠.”
“아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음. 또 회장님의 허락을 받아야 된다고 말을 하려는 겁니까?”
“…….”
“하아. 어쩔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제가 직접 회장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아보죠.”
“…….”
지태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그를 박준후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딱딱하게 말을 꺼냈다.
“더 할 얘기가 없다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깐만요.”
지태완은 떠나려는 박준후를 다시 잡았다.
“혹시 회장님께서 태훈이에게 뭔가 하려는 게 있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그저…….”
순간 서로의 눈이 똑바로 마주쳤다. 보이지 않은 위압감이 둘 사이에 휘몰아쳤다.
그리고 곧 지태완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닙니다. 다음에 얘기하죠.”
떠나가는 지태훈의 뒷모습을 박준후는 말없이 쳐다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