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곽찬구 감독은 하프타임 인터뷰를 진행하고 라커룸으로 들어왔다.
“시간도 없는데 뭔 놈의 질문을 그리 많이 하는지…….”
지금은 순간순간이 중요할 때였다.
허투루 시간을 보내기가 아까웠다.
“모두 모여라.”
“넵!”
쉬고 있던 선수들이 곽찬구 감독 앞으로 모였다.
“전반전에는 잘했다. 비록 우리에게 실수가 있었지만 잘 넘겼다는 것도 중요해. 기회를 날린 건 조금 아쉽지만 말이야. 그래도 상대에게 실점하지 않고 우리만의 경기를 보여준 건 잘한 거야. 알겠어?”
감독의 말에 백종수와 장현우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분명 객관적으로 여유가 있는 쪽은 상대일 거야. 하지만 지금쯤이면 놈들도 여유롭다는 생각 따윈 내던졌을 거다.”
“어째서죠?”
박요한이 어리둥절하며 묻자 곽찬구 감독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가 어디냐? 바로 우리의 경기장이야. 비록 상대가 우리보다 여유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우리가 전반전에 보여준 상황이라면 충분히 위협적으로 다가왔겠지.”
“…….”
“이번 경기는 앞서 치렀던 경기들과 달라. 득점을 많이 낼 필요도 없어. 딱 1골만 넣고, 우리가 완벽하게 잠가 버려도 우리의 승리라고.”
“……!”
선수들의 머릿속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강하게 울렸다.
곽찬구 감독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건 다득점이 아니다.
딱 1골.
그것도 승리를 위한 1골이었다.
“1:0이든 2:0이든 상관없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승리뿐이야! 알겠나?”
“넵!”
“이제 45분 남았다. 너희들이 정말 우승을 원한다면 이제부터 멘탈 싸움을 해야해. 바로 너희들 자신과 말이야!”
곽찬구 감독은 정신력을 강조했다.
“너희들은 지금까지 경기에서는 내가 오늘 못해도 다음 경기가 있다는 안일한 생각을 했을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너희에게는 다음은 없다!”
결승전에서 승부를 가르는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정신력’이다.
실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정신력으로 결과를 뒤집는 일은 축구 역사에도 많이 일어난 일이다.
“스스로에게 믿음을 가져라!”
“네!”
이제 남은 시간은 45분.
후반전을 앞둔 선수들의 의욕은 그 어느 때보다 불타오르고 있었다.
* * *
후반전 시작을 앞두고 프로축구연맹 관계자들이 선수들이 입장하는 중앙게이트 앞에 우승트로피를 가져다 두었다.
햇빛에 반사되어 찬란하게 빛나는 우승트로피의 모습이 팬들 앞에 공개되는 순간,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저게 우승트로피구나!”
“크으! 저렇게 가까운데 아직 가질 수 없다니!”
고양 유나이티드 팬들은 전광판 화면을 통해 볼 수 있는 우승트로피를 보고 가슴이 뛰었다.
이 광경은 라이브 중계 카메라에도 잡혔다.
그걸 본 이형욱 캐스터가 말문을 열었다.
『지금 저희 중계 화면에 K리그2 우승트로피가 잡혔는데요. 앞으로 45분이 지나면 이 영광스러운 트로피의 주인공이 결정될 예정입니다.』
『제주FC는 과거 2부로 한 번 떨어졌던 적이 있다가 1위로 올라간 경험이 있는 팀입니다. 그래서 2부 리그 우승트로피가 하나 있죠.』
『그렇죠. 반면에 고양 유나이티드는 창단 이후 지금까지 트로피가 없습니다. 어쩌면 오늘 경기에서 승리하면 고양 유나이티드는 팀 역사상 첫 우승트로피를 들어 올리게 되는데요?』
『그렇죠. 그래서 고양 유나이티드에선 어떻게든 이 우승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싶을 겁니다.』
이형욱 캐스터와 한정희 위원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화면은 VIP 좌석에 앉아 있는 지태훈의 모습을 잡아줬다.
『오늘도 직관하고 있는 지태훈 대표인데요. 확실히 오늘 고양이 우승을 한다면 지태훈 대표에게도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겠어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이번 시즌 고양이 대활약할 수 있었던 계기는 바뀐 대표이사, 그러니까 지금 화면에 보이는 지태훈 대표의 공이 컸다고 볼 수 있거든요.』
『그렇죠.』
『비교적 예시를 들어보자면, 과거 프리미어리그에는 레스터시티를 바꿔 놓았던 비차이 스리바다나프라바 회장과 첼시의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가 있었다면, 지금 K리그 고양 유나이티드에는 지태훈 대표가 있다고 볼 수 있겠죠.』
『너무 비교가 큰 게 아닌가도 싶은데요?』
『물론 비교 대상 자체가 남다를 수는 있죠. 하지만 그만큼 K리그 역사를 돌이켜 봤을 때 과연 이만한 포텐을 가졌던 구단주나 대표이사가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없었거든요.』
한정희 위원은 지태훈을 향해 무한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랜 세월 축구에 몸담아왔던 그에게 있어 지태훈 대표는 정말 고마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향후 한국 축구가 더 큰 경쟁력을 하기 위해서는 지태훈 같은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지태훈 대표가 앞으로도 오랜 시간 지금처럼 아니, 지금보다 더 큰 활약을 보여줬으면 합니다.』
그렇게 한정희 위원의 발언이 끝나갈 무렵, 카메라 화면이 돌아갔다.
중앙게이트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양 팀 선수들의 모습이 카메라 잡힌 것이다.
『양 팀 선수들이 후반전을 위해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습니다. 자, 그럼 남은 45분, 누가 승자가 될지 지켜보겠습니다!』
* * *
삑! 삐익!
우와아아아아!
후반전 시작을 알리는 주심의 휘슬과 함께 양 팀 선수들이 다시 한번 격돌했다.
후반전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 벤치를 달구고 있던 사무엘이 나탈 대신 교체로 출전했다는 점이다.
『고양이 후반전 시작과 동시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나탈이 빠지고 사무엘이 들어오는데요. 이 변화를 어떻게 보시나요, 한정희 위원님?』
『어~ 우선 사무엘은 스트라이커이기 때문에, 최전방으로 올라갈 거고요. 그렇게 되면 측면도 어느 정도 소화가 가능한 박형우가 나탈의 자리로 가서 윙어 역할을 하면서 그대로 4-3-3 형태를 가져갈 수도 있고요. 아니면 사무엘과 박형우를 투톱으로 두고 이진수 선수를 좀 더 전방으로 끌어올리는 3-5-2 스리백 전술 기용도 가능합니다.』
한정희 위원의 말대로 고양의 전술에는 변화가 있었다.
『아! 지금 보니까 스리백이네요. 라시모프, 백종수…… 어? 김지우 선수가 스리백으로 서 있는데요?』
설명하던 한정희 위원이 갑자기 탄성을 터트렸다.
『이야~ 이거 획기적인 변화네요! 라시모프, 백종수, 김지우로 이루어지는 변칙적인 스리백에 풀백이었던 이진수와 정성진을 윙어로 올리고, 윙어로 뛰었던 박요한을 중앙으로 바꿨네요! 이야~ 이거 곽찬구 감독이 회심의 카드를 꺼낸 것 같은데요!』
이 광경은 현장에서 축구를 지켜보는 관계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실시간으로 기사를 작성하고 있는 축구전문 기자들도 놀라서 어어 하며 지켜보다가 빠르게 타자를 치며 기사를 작성했다.
오랜 시간 축구를 보며 전술적인 지식이 해박한 축구팬들도 깜짝 놀랐다.
평소와 전혀 다른 전술이어서 더 놀란 것이다.
“뭐야? 반응들이 왜 그래?”
아무것도 모르는 지태훈만 어리둥절했다.
그런 그의 곁에 있던 천지원 부장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뒤늦게 상황을 이해했다.
“뭐야! 그런 거야?”
이 장면 또한 고스란히 중계 카메라에 잡혔다.
『고양이 공을 갖고 빠르게 상황을 전개합니다!』
더욱 공격적인 스리백으로 변모한 고양 유나이티드.
박형우와 사무엘 그리고 박요한까지 모두 중앙으로 오면서, 중앙 공격이 극대화되었다.
이렇게 되자 제주FC의 중앙 수비는 전반전과 달리 수비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쿵!
“읏!”
박한빈이 사무엘과 경합과정에서 충돌하고 순간적으로 비틀거렸다.
사무엘의 피지컬은 한때 K리그1에서도 탑에 들어갈 정도로 강력한 주무기였다.
지금은 나이를 먹고 그 강도가 하락했다고 해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게다가 전반전에 워낙 격렬한 플레이들을 펼치다 보니 체력이 어느 정도 소진된 영향도 있었다.
그렇게 교체로 들어온 사무엘은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제주FC의 중앙 수비수들을 괴롭히고 또 괴롭혔다.
그렇게 제주FC 수비수들은 자연스럽게 사무엘로 향하게 되었고, 그 결과 고양에게는 기회가 만들어졌다.
“형우야!”
사무엘이 수비 경합을 이겨내고 헤딩으로 공을 따내는데 성공했다.
이마에 맞은 공은 바로 앞에 있던 박형우 앞으로 향했다.
공을 낚아채듯 잡은 박형우는 바로 옆에서 빈공간으로 쇄도해 들어가는 박요한을 향해 낮고 빠른 전진패스를 넣었다.
순식간에 뻥뚫린 제주FC의 수비.
그 광경을 지켜보는 모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완벽한 기회를 잡은 박요한이 거리낌 없이 슈팅을 때렸다.
팡!
발끝을 벗어난 공이 제주FC의 골망으로 향했다.
제주 골키퍼는 날아오는 공을 보고 황급히 팔을 뻗으며 몸을 날렸다.
‘늦었……!’
하지만 공은 골키퍼의 손을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쳤다.
그런데…….
카앙-!
청명하게 울려 퍼지는 포스트 소리.
그 순간 박요한을 포함한 모두가 안타까운 탄성을 내질렀다.
『박요한 슈우우웃! 아! 골대! 골대를 맞았습니다!』
『이야! 이게 골대를 맞네요! 이럴 수가 있나요!』
벤치에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곽찬구 감독도 앞으로 쓰러져서 두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칠 정도로 큰 아쉬움을 드러냈다.
박요한! 박요한! 박요한!
서포터스들은 박요한의 이름을 외치며 기회를 날린 선수를 격려했다.
『박요한 선수, 오늘 참 안 되네요. 전반전에도 기회가 몇 차례 왔었는데, 후반전에는 골대를 맞추네요.』
『아, 정말 기회였는데요. 사무엘이 공을 지키고 박형우의 전진패스 그리고 박요한의 마무리까지. 아~ 이거 어떻게든 따라가야 하는 고양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아쉬울 만한 그림일 겁니다! 정말!』
비록 기회를 날려 버리기는 했지만 후반전 시작하자마자 고양은 계속해서 제주FC를 압박하고 몰아붙였다.
사실상 주도권은 고양 유나이티드가 가져갔다고 볼 정도로 몰아붙였다.
그렇게 몰아붙이는 가운데, 고양에게 또 한 번 결정적인 기회가 왔다.
팡!
후방에서 오세진이 전방으로 길게 올려준 공이 사무엘 쪽으로 정확히 떨어졌다.
이번에도 사무엘은 어렵지 않게 공을 따내고 박형우 쪽으로 공을 건넸다.
때마침 박형우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열려 있는 슈팅 찬스를 박형우가 놓칠 리가 없었다.
‘기회다!’
바로 슈팅을 때렸다.
팡!
“안 돼!”
이때 위기를 느낀 박한빈이 슈팅에 맞춰 몸을 날렸다.
직선으로 날아온 공이 박한빈의 몸에 맞았다.
그런데 그 순간, 주심이 휘슬을 불었다.
삐이이익!
“무슨 일이야!?”
갑작스러운 휘슬에 제주FC 선수들이 당황했다.
하지만 그런 당황함은 얼마 안 가 충격으로 바뀌었다.
척!
주심이 박한빈에게 옐로카드를 꺼낸 것이다.
『아! 이게 무슨 일인가요! 박한빈 선수 옐로카드입니다! 이렇게 되면 전반전에 경고가 한 장 있던 박한빈 선수는……!』
척!
이어서 레드카드를 꺼내 보이는 주심의 태도에 박한빈을 비롯한 제주FC 선수들이 극도로 격럴하게 항의했다.
『레드카드입니다! 박한빈 선수 퇴장입니다!』
“어째서 제가 레드카드입니까!”
박한빈의 격렬한 항의에 주심은 쿨하게 팔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팔. 공이 팔에 맞았어.”
“아니! 이게 일부러 맞은 겁니까!”
“잠시만 있어봐.”
주심이 VAR과 교신했다.
교신은 생각보다 짧게 이어졌다.
“반칙 맞아. 경기장 밖으로 나가.”
김현태 주심의 서늘한 선언에 박한빈은 분통이 터졌다.
그는 쉽게 경기장 밖으로 나가지를 못했다.
벤치에 있던 강석훈 감독도 갑작스러운 퇴장 때문에 대기심을 불러 격렬하게 항의했다.
“퇴장이라니요! 이게 어딜 봐서 퇴장입니까!”
“규정상 경고가 맞고, 이미 전반전에 박한빈 선수는 한 차례 경고 있었으니, 누적으로 인한 퇴장이 맞습니다.”
“아니, C8! 이게 무슨 경고에 퇴장이야!”
“지금 욕하신 겁니까?”
“그게 아니고! 하! 진짜!”
곁에 있던 코치가 진정시키지 않았다면 강석훈 감독도 함께 퇴장당할 뻔했다.
경기장은 일순간 혼란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나온 퇴장 상황이다.
그 누구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이, 고양 유나이티드는 프리킥을 준비했다.
『아크 정면 쪽에서 프리킥인데요. 충분히 키커가 직접 찰 수도 있는 거리입니다. 과연 누가 찰까요?』
키커로 나설 인물에 관해 궁금해진 가운데, 잠시 후 한 인물이 공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