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고양시에 사는 송영훈은 아들과 딸을 둔 평범한 가장이다.
그런 그의 유일한 취미는 바로 ‘축구’다. 축구와 관련된 거라면 뭐든 좋았다.
특히 그는 주말마다 축구장 가는 것을 즐겨 했다.
“아빠! 아빠! 나 이거 먹을래!”
“알았어~ 여보는 뭐 먹을 거야?”
“나는, 음, 이거?”
송영훈은 오늘 유독 들뜬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바로 가족과 함께 축구장을 가기 때문이다.
그는 구단에서 마련한 축구장 앞 노점에서 가족과 함께 먹을 음식을 구매하는 동안에도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가족하고 함께 축구장을 가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
사실 아내 이현지는 축구를 싫어했다.
아내와 성격부터 시작해서 대부분 잘 맞았지만 유독 맞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건 바로 ‘축구’.
이현지에게 있어 축구는 그저 한낱 ‘공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도대체 그런 공놀이가 뭐가 좋다고 주말마다 나가는 거야!?”
“고, 공놀이라니! 이건 나에게 있어 영혼 같은 거라고!”
주말에 송영훈이 조기 축구를 나가거나 또는 고양 유나이티드 경기를 보러 갈 때면 그녀는 남편에게 싫어하는 눈치를 팍팍 주었다.
결국 송영훈은 축구와 관련된 것을 하려면 아내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그랬던 아내가 갑자기 그와 함께 축구장을 가게 된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월드컵 때문이었다.
축구를 잘 안 보는 대한민국 사람도 월드컵은 볼 정도로, 월드컵에 관한 관심은 남녀노소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4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월드컵을 보게 된 이현지는, 박형우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박형우!! 골, 골입니다! 대단합니다! 박형우! 이번 월드컵 최고의 스타입니다!』
“…….”
“……여보?”
투혼을 불태우며 필드를 누비는 박형우의 모습에 반했기 때문이다.
눈치가 빠른 송영훈은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마치 득점 단독 찬스를 맞이한 스트라이커처럼, 송영훈은 조심스럽게 이현지를 꼬셨다.
“여보야. 여보가 관심 있어 하는 박형우가 사실 고양 유나이티드 소속인거 알아?”
“어? 정말?”
“응응.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번에 같이 애들 데리고 축구장 갈래? 마침 고양 유나이티드 홈 경기고, 여보도 가까이서 박형우도 볼 수 있어.”
“으음.”
“여보, 우리 애들 키우느라 고생했잖아. 나들이 삼아 가자. 날도 좋잖아.”
“알았어.”
고민 끝에 허락을 받아낸 송영훈은 커다란 기쁨을 만끽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경기장에 오게 되었다.
송영훈은 이날을 위해 평소 서포터스석이 아닌, VIP 좌석을 예매했다.
“VIP? 여보, 표값 너무 많이 나가는 거 아냐?”
“아냐. 아냐. 그동안 모아뒀던 포인트로 구매하는 거라서 괜찮아.”
포인트는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모아뒀던 용돈을 털어서 가족을 위해 좋은 자리를 구매했다.
그렇게 1장에 약 3만 원 정도 되는 VIP 가족 테이블석을 끊은 송영훈.
도합 12만 원이란 거액을 소비했지만, 송영훈은 아깝지 않았다.
‘오늘 반드시 축구에 대한 매력을 느끼게 해주겠어!’
표를 발권하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딸 아이가 뭔가를 보고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고 있었다.
“아빠, 나, 저거…….”
“응?”
유니폼이었다.
고양 유나이티드 홈 유니폼을 가리키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는 딸의 모습에, 송영훈이 조심스럽게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예진이가 원하는데, 하나 사줘도 될까?”
“음. 사는 김에 재훈이 것도 같이 사요.”
“어? 어. 알았어.”
송여훈이 보기에 아내는 유니폼 값이 어느 정도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이 유니폼은 어른 유니폼에 비해 저렴하기는 해도 가격이 결코 싸지 않았다.
‘후우. 그간 모아둔 용돈 다 쓰게 생겼구만.’
이현지는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말한 뒤 자리를 떠났다.
그사이 송영훈은 아이들을 데리고 구단 샵에서 어린이 유니폼을 골랐다.
그때였다.
“어? 형님?”
“어? 태준아!”
고양 유나이티드 서포터스 회장 박태준이 송영훈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드러냈다.
“형님, 그동안 바쁘셨나요? 한동안 얼굴을 못 뵈었네요.”
“아, 가정의 평화를 지키느라.”
“하하.…… 어? 오늘은 가족하고 오신 거예요?”
“어. 그렇게 됐어.”
“이야~ 형님 평생소원 중 하나가 가족하고 오는 거였는데, 꿈을 이루셨네요?”
“응. 행복하다.”
그때, 송영훈 곁으로 송재훈과 송예진이 쪼르르 다가와 섰다.
“애들아. 삼촌한테 인사해.”
“안녕, 애들아. 태준 삼촌이야.”
“안녕하세요!”
송재훈과 송예진이 예의 바르게 배꼽 인사했다.
그걸 본 박태준이 궁금한 듯 물었다.
“형님, 애들 나이가 어떻게 돼요?”
“재훈이는 8살. 예진이는 6살.”
“아아. 한창 때네요.”
“그렇지.”
박태준은 빙긋 웃더니 두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너희들 오늘 여기는 처음 왔지?”
“네!”
“그럼 삼촌이 선물 하나 해줄까?”
“네?”
갑작스러운 박태준의 말에 송영훈이 어리둥절 했다.
“태준아. 선물이라니?”
“보니까 애들 유니폼 고르시던 것 같던데. 기념으로 제가 살게요.”
“어? 아니야. 아니야. 안 그래도 돼.”
“에이, 형님하고 저하고 고양 응원한지 벌써 20년 가까이 되잖아요. 고양 서포터스하면 뭡니까? 의리 아닙니까! 하하하!”
“의리? 어, 뭐, 그렇지. 하하!”
“앞으로 자라나는 서포터 유망주님을 위한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아, 고맙다. 태준아. 나중에 내가 밥 살게.”
“하하, 네.”
그렇게 박태준이 아이들 유니폼값을 대신 지불했다.
유니폼을 얻은 아이들은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정말 고맙다.”
“에이, 괜찮아요. 형님도 저한테 이것저것 많이 사주셨잖아요. 그동안 얻어먹은 술값만 해도 이건 아무것도 아니죠.”
그때, 화장실에서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이현지가 등장했다.
“여보?”
“어, 여보야. 이쪽으로 와. 여기는 태준이. 그리고 이쪽은 우리 와이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가볍게 인사했다.
“태준이가 오늘 우리 애들 처음으로 경기장 왔다고 선물로 유니폼 사줬어.”
“어? 정말? 와, 이거 너무 감사해서 어쩌죠.”
“하하. 나중에 애들 데리고 종종 경기장 와주세요!”
호탕한 박태준의 행동에 송영훈은 속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오늘 이렇게 좋은 일들이 많아 줘야 다음에도 함께 경기장에 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모든 게 긍정적으로 돌아가고 있어! 좋았어!’
그렇게 송영훈과 그의 가족은 경기장에 입장했다.
VIP 좌석은 다른 좌석과 달리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달랐다.
VIP좌석 전용 입장 게이트를 통해 경기장에 입장했다.
“오!”
“우와아아!”
이현지를 비롯한 가족들이 웅장한 경기장의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송영훈에게는 익숙한 곳이지만, 처음 보는 이들에게는 웅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때, 애들아?”
“대따 커요~”
“그치?”
아이들의 격한 반응에 송영훈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지정된 자리에 앉은 그들은 미리 사둔 음식들을 꺼냈다.
그들이 앉은 좌석은 VIP 가족 테이블 석이었다.
최대 4명이 한 번에 앉아서 먹고 마실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좌석도 코칭스태프들이 있는 벤치 좌석 바로 뒤편이었다.
송영훈 입장에서는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밥 먹자.”
“네!”
아이들과 함께 준비한 음식을 먹으면서 경기 시작을 기다렸다.
그때,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송영훈과 그의 가족들도 같이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어머!”
누군가의 모습을 본 이현지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보, 저 사람은 누구야!?”
다급하게 묻는 이현지의 반응에 송영훈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구, 구단주.”
“구단주!?”
“어, 음. 지태훈 대표라고. 고양 유나이티드 대표야.”
훤칠한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
흡사 차가운 짐승 계열 아이돌을 보는 지태훈의 등장에 이현지는 순간 넋을 잃고 쳐다봤다.
경기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지태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옆에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헉! 저 여성분은 누구야!?”
또다시 다급하게 어깨를 팍팍 치며 묻는 이현지의 반응에 송영훈이 빠르게 대답했다.
“그, 김유리 비서라고. 우리 팀에서는 유명해. 저 두 사람은 우리 팀의 마스코트? 같은 사람들이야.”
“헐. 대박.”
김유리는 청초 계열에다가 배우 뺨을 후려치고도 남을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두 선남선녀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설레게 했다.
“대표님. 콜팝 가지고 올까요?”
“좋지. 음?”
지태훈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했다.
“헉!”
뚜벅뚜벅 어딘가로 걸어간 지태훈이 멈춰 선 곳은 바로 송영훈과 그의 가족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이었다.
그는 싱긋 웃어 보이더니 이내 아이들 앞에 반쯤 무릎 꿇고 시선을 맞춘 다음, 말을 걸었다.
“부모님하고 함께 온 거니?”
“네!”
“그래, 즐겁게 시간 보내라.”
“네!”
씩씩하게 대답하는 아이들을 보며 지태훈은 더욱 짙게 미소를 드러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송영훈에게 말을 걸었다.
“송영훈 씨 맞으시죠?”
“헉, 저를 아세요?”
난데없이 자신을 알아보는 지태훈의 말에 그는 화들짝 놀랐다.
“당연히 알죠. 저희 팀을 오랜 시간 응원해 주시는 열혈 서포터스 분들 중 한 분이신데.”
“아!”
“매번 저희 팀을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훈님 같은 분이 계셔서 저희 팀이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 아유, 뭘요. 저야 좋아서 그런 거죠. 저야 말로 너무 감사하죠. 대표님 덕분에 팀이 계속 승승장구 하고 있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하하. 계속 응원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넵.”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송영훈 옆에서 여전히 멍하니 있는 이현지를 향해 말을 걸었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와 주세요.”
“네? 아, 네!”
싱긋 웃으면서 말하는 이현지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이현지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귀엽고 깜찍한 동물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것과 같다고.
그녀는 바로 그 순간, 지태훈의 팬이 되었다.
그렇게 지태훈이 떠나고 살짝 적막감이 돌았다.
그 적막감을 깬 이는 송영훈이었다.
“여보야. 경기장, 오늘 잘 온 것 같지?”
“……응.”
그날, 고양 유나이티드는 박형우가 멀티골을 기록하면서 3:0 대승을 거두었다.
경기가 끝난 후, 팬들에게 인사를 하러 온 박형우를 향해 송영훈이 소리를 질렀다.
“박형우 선수! 유니폼 주실 수 있나요!”
다행히 박형우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이들 팬들에게는 후한 인심을 보이던 박형우는 두 명의 아이를 데려온 송영훈을 보고 방긋 미소를 드러냈다.
그는 자신이 입던 유니폼을 벗어서 송영훈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송영훈의 감사 인사에 박형우는 엄지손가락을 치켜 보이고 경기장을 떠났다.
그렇게 송영훈의 가족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 * *
대한축구협회.
“아시안컵이 열리기 전까지 제이든 감독의 후임을 찾아야 하는데, 아직도 마땅한 감독을 찾지 못해서 곤란합니다.”
대한축구협회는 최근 월드컵을 끝내고 계약 종료된 크리스토퍼 제이든 감독의 후임을 찾는 중이었다.
“회장님. 제이든 감독과 연장 계약을 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으음. 제이든 감독 측에 문의를 넣기는 했는데, 아직 답변이 없군요.”
크리스토퍼 제이든 감독은 월드컵 원정 16강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런 아쉬움을 채워 주고도 남을 만한 성적은 분명했다.
내부에서도 제이든 감독과 계약 연장을 체결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한축구협회 측도 이러한 내부 의견을 받아들여 제이든 감독에게 연장 계약을 요청한 상태였지만 아직 답변이 오지 않았다.
“제이든 감독은 뭐 하고 있다고 합니까?”
“고향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크리스토퍼 제이든 감독의 고향은 미국.
북중미 월드컵이 끝나고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 남아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계속 답변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우리는 우리대로 차기 감독 후보를 찾도록 합시다.”
“넵.”
당장 12월과 1월에 있을 아시안컵을 대비해야 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지태훈이 겪었던 미래와는 전혀 다른 미래가 펼쳐지고 있는 축구협회였다.
그렇게 국가대표팀에도 변화가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