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도련님?”
“응?”
뒤를 돌아보니 김 비서가 서 있었다.
“김 비서가 여기는 어떻게?”
“도련님이 안 보이셔서 나왔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괜히 신경 쓰이게 만들었나 보다.
“김 비서. 좀 어때?”
“좋아요. 분위기도 좋고, 저도 즐겁네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대답하는 김 비서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고생 많으셨어요.”
“내가 뭘. 다들 함께한 건데.”
내 말에 김 비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도련님, 정말 많이 달라지셨네요.”
“뭐가?”
“아니에요.”
요즘 김 비서는 나에게 달라졌다는 말을 계속하는 것 같다.
그래도 뭐, 좋은 쪽으로 달라졌다는 뜻이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김 비서가 내 곁으로 슥 다가왔다.
“밤하늘이 예쁘네요.”
“그렇지?”
“네. 보통 밤은 어두워서 무섭게만 느껴졌는데, 오늘은 유독 포근하게 느껴지네요.”
하늘을 바라보며 말하던 김 비서가 고개를 돌려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
순간 달빛에 비치는 그녀의 얼굴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도련님?”
“어? 어, 음. 왜?”
잠깐 멍하니 있다가 깜짝 놀란 나는 바보처럼 반응했다. 그런 나를 보고 김 비서가 작게 웃었다.
“도련님은 어떠세요?”
“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도련님의 영향이 제일 커요. 도련님이 아니었다면 이런 상황도 올 수 없었겠죠.”
그 말에 나는 김 비서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당황한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회피했다.
“왜,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김 비서 덕분이야.”
“네?”
“김 비서 아니었으면 나도 혼자서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야.”
정말이다.
김 비서라는 존재가 옆에 있었기에 나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김 비서의 목소리에서 묘한 기대감이 느껴진다.
“물론이지. 김 비서가 내 옆에 있어서 기뻐.”
“……도련님.”
“어? 김 비서?”
김 비서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앗. 저도 모르게 그만…….”
나는 급하게 주머니를 뒤져서 손수건 하나를 꺼냈다.
김 비서가 매번 내 정장 주머니에 넣어주는 손수건이었다.
손수건으로 김 비서의 눈물을 닦아주며 나도 모르게 사과했다.
“미, 미안해.”
“아니에요. 이건 그저…… 기뻐서 그래요.”
“기뻐서?”
“네.”
어느 정도 눈물이 멈춘 다음 김 비서가 머쓱한 반응을 드러냈다.
“모처럼 술을 먹어서 그런가 봐요. 기분이 들떠서 그만.”
“괜찮아. 나는 김 비서가 불편하지만 않으면 돼. 혹시나…….”
말을 하던 도중, 문득 회귀 전 기억이 떠올랐다.
개망나니짓에 괴로워하던 김 비서가 결국 내 곁을 떠나던 그 날, 나는 그제야 김 비서의 소중함을 알았다.
그때 그랬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김 비서만큼은 놓치지 않겠다고.
그리고 정말 잘해 주겠다고.
그런데 정말 기적적으로 시간은 거꾸로 돌았고, 나는 달라진 미래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도련님?”
“놓치지 않을 거야. 앞으로도. 절대로.”
“……!”
나는 그대로 김 비서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김 비서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러다가 그녀도 천천히 나를 끌어안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절대 도련님 곁을 떠나는 일 없을 거예요.”
그녀의 진심이 묻어 있는 그 말에 나는 더욱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 * *
“아으~ 이래서 맥주 마시면 고역이라니까! 화장실을 몇 번이나 가는 거야!”
잠깐 화장실에 갔다가 밖으로 나온 신진호.
그는 담배를 한 대 피우기 위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
“아~ 밤하늘 좋네.”
알딸딸한 상태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우~ 평소에는 땡기지 않은 담배가 희한하게 술만 마시면 땡긴단 말이지.”
담배 한 모금을 맛있게 피우던 신진호는 문득 무언가가 그의 시야에 잡혔다.
“어? 뭐지?”
이상함을 느낀 신진호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곧 그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헉!”
지태훈과 김유리가 서로 끌어안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왠지 두 사람이 보통 사이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신진호는 서둘러 담배를 껐다.
그리고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 * *
단합을 목적으로 한 MT는 성공적으로 마쳤다.
선수단과 프런트 모두 이전보다 서로를 친숙하게 대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선수들과 프런트 사이에 서로 웃는 얼굴로 인사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상황만 빼고.
“도련님. 표정이 왜 그러세요?”
“음. MT 이후 신 대리가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묘하단 말이지.”
“……?”
“뭔가 있어.”
MT 이후 신진호 대리는 나를 볼 때마다 묘한 표정을 짓고는 했다.
마치 ‘다 알고 있다.’ 같은 표정이었다.
이게 며칠째 반복되자 보다 못한 나는 신 대리를 불러 세웠다.
“신 대리님. 잠깐 이리 오시죠.”
“넵!?”
인적이 드문 건물 옥상 휴게실로 향한 나는 신진호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도대체 뭡니까?”
“네? 뭐를요?”
“그 표정 말입니다. MT 이후로 저를 바라보는 그 표정! 할 말이 있으면 표정 말고 말로 하시죠.”
“아, 그게 그러니까요.”
신진호 대리는 머뭇거리다가 곧 솔직하게 얘기했다. 이야기를 들은 나는 기가 막혔다.
“제가 김 비서하고 사귄다고 생각했다고요!?”
“네. 그 밤에 두 분이 서로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이거 참, 뭐라 말해 줘야 할까.
평소 같으면 아니라고 단박에 말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런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신 대리님.”
“네?”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 하지 마세요. 아시겠어요? 경고입니다.”
“넵.”
신진호 대리는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그럼 가서 일 보세요.”
“아, 넵.”
신진호 대리가 후다닥 도망치듯 돌아갔다.
그렇게 홀로 남게 된 나는 한숨을 살짝 내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란 말이지.”
* * *
월드컵 이후 시즌도 종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고양 유나이티드는 여전히 리그 1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월드컵 때까지 패배 없는 질주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무패 우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K리그 역사상 1, 2부 통틀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은 무패 우승을 기대했지만, 아쉽지만 그럴 수 없었다.
『고양 유나이티드가 아쉽게 패배합니다.』
브레이크 이후 치러진 리그 경기에서 고양은 부천에게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하며 패배했다.
제주와 역대급 시즌 경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 자칫 2위로 내려앉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다음 날 경기를 치른 제주가 서울에게 패배했다.
운이 따랐다고 봐도 됐다.
고양은 팀 순위 외에도 개인 순위 경쟁에서도 상당히 돋보였다.
K리그2 득점 순위
1위 박형우 19경기 22골
2위 사무엘 23경기 15골
3위 장지원 27경기 14골
득점 순위 3위 안에 박형우와 사무엘이 이름을 나란히 올렸다.
두 사람이 만든 득점은 무려 37골.
27경기를 치르는 동안, 고양 유나이티드는 55득점을 만들었다. 이 중 37골을 박형우와 사무엘이 만든 것이다.
무엇보다 박형우의 존재감이 대단했다.
월드컵 기간 동안 잠시 팀을 이탈했는데 불구하고 압도적으로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2위인 사무엘은 시즌 초반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박형우가 없는 기간에 폭발적인 득점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두 선수의 활약에는 조력자들이 존재했다.
K리그2 도움 순위
1위 김지우 27경기 15도움
2위 이스마일 26경기 11도움
3위 장현우 10도움
주장 김지우는 그야말로 인생 시즌을 보내고 있었다.
제2의 전성기가 온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김지우가 보여주는 패스는 대지를 가르고도 남았다.
새로 영입한 국가대표 출신 장현우도 10도움을 올리며 팀의 상승세에 엄청난 힘을 불어넣고 있었다.
단순히 선수만 잘한다고 해서 팀이 잘되는 것은 아니다.
곽찬구 감독의 선수 기용 방식과 전술은 적어도 K리그2 내에서는 독보적이었다.
선수들과 수시로 개별 면담을 하며, 선수가 가진 장단점을 파악하고 어울리는 자리에 적재적소 기용했다.
경기 중 전술도 유연하게 바꾸며 상대를 요리했다.
시즌이 시작되기 전, 구단의 과감한 투자와 이루어지면서 팀은 대대적인 개편을 거쳤다.
이후 감독과 선수까지 모두 합을 이루어내면서 만들 수 있었던 성과였다.
아직 시즌이 남아 있지만, K리그2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사람들은 고양 유나이티드를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았다.
그리고 그 끝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 * *
“대표님. 슬슬 단장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장을요?”
“네. 대표님이 부임하신 후 구단이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습니다. 향후 계획을 대비해서라도 지금쯤 단장을 선임해야 합니다.”
경영지원팀 유지원 부장이 내게 단장을 선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말에 나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확실히 점점 힘이 드는 건 사실이야.’
내가 사실상 단장 업무까지 겸임해서 맡아서 하고 있다 보니 여러모로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제대로 된 단장을 뽑아서 팀을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었다.
“어디 괜찮은 후보가 있을까요?”
“제가 괜찮은 사람 몇 사람을 아는데,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그러죠.”
유지원 부장이 추천한 인물들의 프로필을 받았다.
“곽돈형. 나이 50세. 전 성남 단장.…… 특이사항 선수 이적 과정에 부당 개입.”
“…….”
“성진우. 나이 47세. 전 충주 단장. 특이사항 감독에게 갑질 의혹으로 사퇴.”
“…….”
다 볼 필요도 없었다.
나는 프로필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유 부장님. 정말 이런 사람들밖에 없습니까?”
“그게…… 이 사람들이 일하면서 불미스러운 일들이 좀 있기는 했지만, 능력은 어디 가서 떨어지는 편이 아닙니다. 대표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여기서는…….”
“능력의 여부를 떠나서 이런 사람들 하고 굳이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
유지원 부장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속으로 탄식했다.
유지원 부장은 이런 면에서 옛날 사람이다.
요즘 같은 분위기에서 과거에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은 문제가 된다.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과거 이력이 이렇게 드러나면…….
앗, 나도 그렇구나.
생각해 보면 나도 걸리는 게 많았다.
하지만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이런 사람들을 곁에 둘 수는 없다.
“다른 후보를 찾아봐야겠습니다.”
* * *
지태완은 영신전자 사장이 된 후 꽤 공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러한 행보에 우려와 의문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런 걱정들이 쓸데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는 최고의 성과를 내었다.
“아무래도 차기 회장은 지태완 사장님이 되시겠지?”
“이변이 없는 한 그렇게 되겠지.”
영신 그룹 내부에서 차기 회장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종윤 회장이 언제까지 회사를 이끌어 갈지 알 수 없었다.
나이도 있고 최근 건강과 관련해서 다양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신 그룹 관계자들은 자연스럽게 누가 다음 회장이 될 것인가 관심을 가졌다.
여러 후보들 중에서 단연 지태완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지태훈의 이름도 간간히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망나니였던 지태훈이 개과천선했다며?”
“그런 가봐. 여기저기서 칭찬하던데?”
“정말 개과천선하긴 했나 보네. 뭐, 죽어가던 축구팀 살려놓은 거 보면…….”
“근데 축구팀 하나 되살렸다고 차기 회장이 될 수 있겠어?”
“그건 그래. 지태훈은 아직 지켜봐야 되고, 지태완 사장님은 증명했으니까.”
“그렇지.”
이런 직원들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김진철 이사였다.
그는 모르는 척 다가가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던 직원들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나누나?”
“헉! 이사님!”
“다들 업무 보느라 정신없는 것 같던데, 자네들은 한가한 봐?”
“앗! 죄송합니다!”
후다닥 도망치듯 떠나는 직원들을 보며 김진철 이사는 생각에 잠겼다.
과거 철없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었다.
회장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그딴 놈팽이에게 딸을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본 지태훈은 달랐다.
마치 과거의 회장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지태훈. 제대로 해야 될 거다.’
김진철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늘 운동 삼아 손에 쥐고 있던 호두 두 개가 빠작 부서졌다.
‘내 딸이 조금이라도 고생하게 두면 가만있지 않을 거다. 지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