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대한민국이 월드컵 32강 진출에 성공했습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월드컵도 예상대로 흘러갔다. 내용은 좀 달랐지만.
“엄청나구만.”
개최국 멕시코를 시작으로 2승을 거두며 32강 토너먼트 진출에 성공한 대한민국.
그 중심에는 박형우가 있었다.
이번 월드컵에서 박형우는 절정의 기량을 선보이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제이든 감독도 크게 만족했다.
국민들도 박형우에 대한 평가를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전에는 그에게는 ‘어디까지나 아시아용’이란 꼬리표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을 통해서 그가 결코 아시아용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32강에서 박형우는 대파란을 일으켰다.
『축구 종가가 침몰합니다! 대한민국이 축구 종가 잉글랜드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32강 대한민국 대 잉글랜드의 경기를 중계하는 이형욱 캐스터의 목소리가 찢어지듯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만큼 경기 내용은 놀랄 만한 전개로 이어지고 있었다.
『강철인과 박형우의 환상적인 호흡입니다! 정확하게 뒷공간으로 빠져주는 패스가 예술이었습니다! 마무리도 아주 좋았구요!』
소속팀 맨체스터시티에서 보여줬던 환상적인 킬러패스를 대표팀에서도 그대로 보여준 강철인.
그리고 그런 패스에 이은 박형우의 환상적인 마무리까지.
『경기 끝났습니다! 3:1로 대한민국이 잉글랜드를 격파하고 16강으로 올라갑니다!』
박형우는 월드컵 본선에서만 무려 4골을 만들었다.
강철인도 1골 4도움을 기록하며, 대표팀 공격의 축으로 활약했다.
“설마 16강까지 올라갈 줄이야.”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내 옆에서 김 비서가 작게 웃고 있었다.
“도련님. 내기는 제가 이긴 거죠?”
“…….”
맞다.
김 비서와 했던 내기가 있었지.
애석하게도 내기에서 져버리고 말았다.
김 비서는 최소 16강 진출에 걸었고, 나는 32강에 걸었기 때문에.
“뭐, 좋아. 원하는 게 뭐야?”
“음. 나중에 말할게요!”
도대체 뭘 얘기하려고 나중에 얘기한다고 하지.
괜스레 더 긴장된다.
“그건 그렇고 매출이 확 늘었네.”
“월드컵 효과죠?”
“어.”
월드컵에 출전한 박형우와 장현우와 관련된 각종 유니폼과 굿즈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월드컵 기념으로 만든 굿즈 반응도 상당히 좋네요.”
“천지원 부장이 이런 면에서는 똑똑해.”
천지원 부장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두 선수를 위한 월드컵 특별 굿즈를 제작했다.
굿즈라고 해서 별거 없었다.
미리 준비한 계획이 아니고 급하게 진행하다 보니 기껏해야 머플러와 수건 정도였다.
그래도 판매량은 끝내주게 좋았다.
나오는 족족 완판이었다.
기존 고양 유나이티드 팬들의 구매율도 높았지만, 월드컵을 통해서 신규 유입된 팬들의 구매량도 상당히 높았다.
“2주 동안 3억이면 대박이지.”
“이걸 기회 삼아서 뭔가 더 해보면 좋지 않을까요?”
“응. 안 그래도 구상 중인 사업들이 몇 개 있어.”
“강민수 사장님과의 만남도 계획의 일부이신 건가요?”
“그렇지.”
영신 그룹 계열사 중 하나인 영신식품의 사장 강민수.
지난번 아버지 생신 때 만났던 인물이다. 과거에 김 비서를 가르쳤던 프로그램의 책임자이기도 했고.
“영신 식품에서 최근에 스포츠음료 하나를 출시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요?”
“응. 그래서 강 사장님하고 이야기해서 월드컵 이후 박형우와 장현우를 그쪽 모델로 쓰게 할까 싶어서.”
“저희가 에이전트도 아니고 그렇게 하시려는 이유가 뭐예요?”
“홍보지. 우리 팀 유니폼을 입히고 출연시키게 할 거야.”
“……!”
“유명한 배우 못지않게 유명한 선수들이 있는데, 열심히 홍보하게 만들어야지.”
하나씩 착실하게 잘 해내 가면 된다.
“그럼 나 오늘 먼저 퇴근할게.”
“어? 벌써요?”
“음. 요즘 계속 제대로 쉬지를 못해서 좀 피곤하네.”
“저런. 제가 모실게요.”
김 비서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드러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손짓하며 말했다.
“괜찮아. 김 비서 일 남아 있을 거 아냐. 나 혼자 갈게.”
“그래도…….”
“먼저 갈게.”
그렇게 김 비서를 두고 먼저 퇴근했다.
* * *
구단 사무실 입구에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서 있었다.
차는 내부 확인이 어려울 정도로 짙게 선팅이 되어 있었다.
그런 차 안에 어떤 남자가 있었다.
조용히 구단 입구를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마침 지태훈이 혼자 걸어 나오는 장면을 목격했다.
남자는 바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타깃 확보했습니다. 혼자인 것 같은데,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남자는 전화를 끊고 곧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곧 조용히 지태훈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 * *
“흐암~ 가면 진짜 바로 씻고 잔다.”
정말 피곤하다.
구단 대표로 부임한 이후 제대로 쉬어본 적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을 기점으로 일이 좀 많았다.
아무리 나라도 쉬엄쉬엄 일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삼 일 정도 잠만 자고 싶은데…… 음?”
길을 걷다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
앞을 보며 걷는 척하며 슬쩍 곁눈질로 검은 세단 한 대를 확인했다.
저 차…… 아까부터 자꾸 나를 쫓아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지.
느낌이 좋지 않다.
나는 천천히 걷는 척하다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를 쫓아오던 세단도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젠장!”
미행이 붙었다.
그것도 재벌가에 구단 대표인 나에게!
마침 주택가 쪽을 지나가고 있던 나는 바로 주택가 골목길로 빠졌다.
그리고는 어떤 집 담벼락을 넘었다.
“왈! 왈!”
“헛!”
담벼락을 넘자 백구 한 마리가 나를 보고 짖었다. 마침 줄에 묶여 있어서 나한테 다가오지 못했다.
나는 당황한 얼굴로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고 했지만 백구는 열심히 짖어댈 뿐이었다.
그때, 담벼락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놓친 것 같습니다.”
“…….”
“타깃이 눈치가 빨랐습니다. 네. 어떻게든 놈을…….”
나를 쫓던 그놈인 것 같다.
그놈은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곧 전화가 끝나고 놈이 신경질을 냈다.
“제길! 조용히 따라붙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안 가서 놈이 떠나는 발자국이 들렸다. 하지만 나는 한참을 그곳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후우.
숨을 고른 후 간신히 몸을 일으킨 나는 작금의 상황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누구지?”
누가 나한테 이런 짓을 한 걸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는데…….
“설마, 형인가?”
지태완.
결국 그가 나한테 직접 손을 댈 생각인 건가?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다.
“마음 같아서는 두들겨 패고 잡은 다음에 증거를 잡아내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괜히 잘못하다가 내가 다칠 수도 있었다.
“대책이 필요하겠어.”
* * *
“뭐라고요!?”
김 비서의 목소리가 하늘을 뚫어버릴 듯 높게 솟아올랐다.
그런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일단 진정해 봐.”
“지금 제가 진정하게 생겼어요! 다친 데는 없고요? 도대체…… 아! 그냥 제가 모시고 갔었어야 했는데!”
“다친 데도 없고 멀쩡해. 그러니까 진정하자.”
일을 끝낸 김 비서가 굳이 집까지 찾아왔다. 집으로 찾아온 그녀는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내가 피곤하다고 얘기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일까?
그녀는 포장된 장어구이를 가지고 왔다.
나는 그녀와 장어구이를 함께 먹다가 아까 있었던 일을 얘기하게 됐다.
그러자 김 비서가 이렇게 놀라 버린 것이다.
“그 사람 인상착의 기억해요? 당장 경찰에 신고부터……!”
“아마 경찰에 신고해도 의미없을 거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지난번에 박형우에게 악의적인 기사를 썼다가 사망한 기자 사건 기억하지?”
“네? 얼마 전 일인데 기억 못 할 리가 없죠. 근데 그게 왜요?”
“아마 그 일과 관계된 일이 아닐까도 싶어.”
“네!?”
김 비서에게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없다는 게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유력한 용의자는 큰형이다.
하지만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다.
확실한 물증을 잡기 전까지 경찰도 우리 편이 아닐 확률이 크다.
뭔가 뒷사정이 있다는 걸 알아챈 듯 미간을 찌푸린 김 비서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도련님 곁에 경호원을 붙여야겠어요.”
“경호원을?”
“네. 마음 같아서는 제가 24시간 도련님 곁에 붙어 있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함께 할 수 있는 경호원이 필요할 것 같아요.”
“에이, 무슨 굳이 경호원까지 붙여.”
경호원 이야기에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김 비서가 목소리 높였다.
“도련님!”
“…….”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김 비서의 표정을 보니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생각은 해볼게.”
나는 복잡한 마음을 숨기며 애써 그렇게 대답했다.
* * *
월드컵 시즌 동안 고양 유나이티드는 FA컵 경기를 치렀다.
파주FC를 꺾고 다음 라운드에 진출한 고양 유나이티드는 더 어려운 상대를 만나게 됐다.
바로 전북이었다.
울산과 함께 K리그1의 양대산맥으로 분류되는 전북은 경쟁자인 울산이 제주에게 잡히면서 조기 탈락하는 바람에 이번 시즌 가장 강력한 FA컵 우승 후보로 꼽히고 있었다.
“하필 전북이냐.”
“진짜 쉬운 일 하나 없다.”
선수들도 조금은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정했다.
상대가 누구든 꺾지 못하면 다음은 없다.
선수들도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인간적으로 생기는 불만은 조금이라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자, 불만을 토로하기에는 너무 늦은 거 알지? 최선을 다하자. 팬들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넵!”
곽찬구 감독은 선수들을 독려하며 경기를 치를 준비를 했다.
마침 이번 경기는 홈에서 치러졌다.
평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찾아왔다.
최근 승승장구하고 있는 팀 사정과 월드컵에서 활약하는 박형우와 장현우 효과가 함께 어우러진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관중 안에는 지태훈 대표도 함께 있었다.
선수들도 지태훈 대표가 관중석에 앉아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표님도 대단해. 어떻게 거의 빠지지 않고 매 경기를 직관하시냐.”
“그러게. 여태까지 축구하면서 구단주나 사장이 경기마다 찾아오는 경우는 못 봤어.”
“나도 그래.”
보통 어느 팀을 가도 구단주나 사장급이 경기장을 찾는 경우는 많지 않다.
찾아도 형식적으로 찾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지태훈은 달랐다.
여느 구단주와 사장들과 달리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번 경기장에서 선수들이 뛰는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후에는 코칭스태프를 통해 피드백했다.
피드백도 선을 넘지 않은 선에서 진행했다.
그러다 보니 선수들도 더 열심히 뛸 수밖에 없었다.
“이기든 지든 최선을 다하자!”
“오!”
주장 김지우의 외침에 선수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곧 경기가 시작됐다.
출렁-.
『골! 골입니다! 홈팀 고양이 전북을 상대로 선제골을 만들어 냅니다!』
『역시 고양입니다! 저력이 있는 팀이죠! 현재 2부 리그 1위이기도 하고요. 전북 선수들, 긴장해야 됩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고양이 전북을 상대로 선제골을 만들어냈다.
선제골이 들어간 순간, 홈팬들의 환호성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이런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출렁-
『전북이 금방 동점골을 만들어 냅니다! 전북의 이규호! U-22 대표팀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는 이규호가 득점에 성공합니다!』
『역시 전북도 하면 제대로 할 수 있는 걸 보여 주네요!』
불과 3분 만에 동점골을 만든 전북은 다시 5분 만에 역전 골까지 만들었다.
『골! 또 들어갔습니다! 이번에도 이규호가 만들어냅니다! 전북이 앞서갑니다!』
『아! 이게 바로 전북이죠! 전북이 지금 K리그1 2위기는 해도, 1경기를 덜 치렀단 말이죠? 이런 전북이 왜 K리그1과 아시아 최고의 팀인지를 보여주는 경기력이네요!』
“제길!”
고양 선수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상대는 강했다.
심지어 이들은 제대로 된 1군 팀도 아니었다.
“이게 1부의 벽인가.”
박요한이나 정성진 같은 고양의 어린 선수들도 1부 리그의 벽을 제대로 느꼈다.
파주FC와 붙었을 때하고 차원이 달랐다.
고양은 전북에게 일방적으로 밀렸다.
삑! 삐익! 삑!
『아! 경기 끝났습니다! 전북이 고양 유나이티드를 4:1로 꺾고 다음 라운드 진출을 확정합니다!』
결국 고양은 전북에게 무릎을 꿇고 이번 시즌 FA컵 대회를 마무리 짓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