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울산에서 돌아온 뒤, 나는 모처럼 아버지한테 호출을 받았다.
“음. 얼마 만에 본사냐.”
한동안 바빠서 본사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이제는 회귀 전처럼 용돈 받으려고 오는 일도 없고.
“대표님, 오셨습니까.”
“음?”
1층 로비에서 박준후 팀장과 마주쳤다.
“팀장님, 오랜만이네요?”
“네. 회장님 뵈러 오셨죠? 회장님은 안에 계십니다.”
“음? 팀장님은 어디 가세요?”
“네. 회장님께서 시키신 일이 있어서 나가는 길이었습니다. 금방 다시 돌아올 거고요.”
“아, 네. 그럼 수고하세요.”
박준후 팀장은 내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 뒤 자리를 떠났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한결같았다. 나이가 많든 적든 존댓말을 사용하는 편이고, 늘 정갈한 복장과 깔끔한 행동거지로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었다.
다만 나한테는 엄하게 대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정말 한심하게 보였을 것이다.
대(大)영신그룹의 일가로서 정신 못 차리는 망나니로 살아가던 내 모습이, 회장님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 입장에서 썩 좋을 리가 없다.
게다가 우리 기업은 전체적으로 평판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스포츠 쪽에서 방만한 구단 운영과 승격 실패로 욕을 많이 먹고 있지만 그 외 다른 분야에서는 욕보다 칭찬이 더 많았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중심에는 아버지인 지종윤 회장이 있었다.
아버지는 사업가로서 상당한 성과를 달성하며 영신 그룹이 세계적인 기업이 될 수 있도록 발돋움하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버지는 자선 사업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가 만든 ‘올해의 영웅상’이나 ‘대한민국 미래 유망주상’은 시민들에게 꽤 좋은 인상을 만들게 했다.
그런 아버지 밑에 망나니가 있으니 마음에 들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서자.
배다른 형제들뿐만 아니라 영신 그룹 일가에 녹을 받아먹고 지내는 사람들도 나를 좋게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그러한 열등감이 망나니의 삶을 가속시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최근에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나도 제 몫을 하고 있고, 더 이상 망나니 소리를 들을 만한 행동들은 하고 있지 않다.
훌륭하다는 소리까지 바라지 않는다.
나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으니까.
물론 목표인 영신그룹 총수까지 가려면 갈 길은 멀다.
그래도 이 사소한 변화들이 결국에는 내가 원하는 목표까지 올라갈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아버지를 만났다.
그런데…….
“너 혹시 여자 만나볼 생각 없냐?”
“예? 갑자기 불러 놓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네 나이가 내일 모래면 30이다. 슬슬 결혼 생각을 해야지.”
“…….”
“뭐, 세상이 변해서 30을 넘어 40이 되어 결혼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다르다는 걸 너 또한 잘 알거라 생각한다.”
아버지의 말에 나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결혼.
생각하지도 않았던 부분이다.
언젠가는 나도 사랑하는 반려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도 키우겠지만, 그건 머나먼 일이라고 생각했다.
회귀 전에도 그 누구도 내게 결혼에 관한 이야기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지금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일까?
역시 바뀐 행동들 때문인 걸까?
“저 아직 결혼 생각은 없는데요.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래? 그럼 나도 진지하게 이야기하마. 이번 주 주말에 여자 좀 만나 봐라.”
“예?”
“상대는 벽수그룹의 손녀다. 나이도 너랑 동갑이고, 그쪽도 혼기가 꽉 차서 급한 모양인 것 같더군.”
“…….”
“벽수그룹이 뭐 하는 회사인지는 알지?”
“그건 알죠. 그런데, 하……”
“쯧. 한숨 쉬지 마라. 복 날아간다.”
“…….”
벽수그룹.
1950년대에 세워진 기업으로, 창업자는 페인트공부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발을 넓혀 인테리어 회사로 확장한 벽수 그룹은 현재 세계적인 인테리어 전문 회사가 되었다.
“벽수그룹 회장이 손녀를 제법 잘 키운 모양이야. 성격도 좋고, 재주도 좋아. 가서 만나 보고 마음에 들면 진지하게 이어가면 되고, 그게 아니더라도 사업적 파트너로 좋은 관계를 만들어도 좋을 거다.”
벽수 그룹 손녀는 현재 벽수그룹 본부장으로 활약하고 있다고 한다.
차기 회장으로 지목될 정도로 꽤 좋은 성과들을 낸 모양이었다.
아버지 말대로 분명 만나 보면 좋긴 할 것이다.
그런데 왜 자꾸 머릿속에서 김 비서의 얼굴이 떠오를까.
“아버지. 그날 김 비서도 데려가도 됩니까?”
“김 비서? 그런 자리에 김 비서를 왜 데려가?”
“음, 그게…….”
내가 생각해도 참 황당한 말이다.
아버지도 내게 황당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다가 곧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차피 김 비서도 그날은 시간이 안 될 게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음? 못 들었나? 김 비서도 주말에 종신 그룹의 최용호 이사 아들놈 만나러 간다 하던데?”
“예!?”
“허허, 녀석. 몰랐구나? 김 비서하고 친한 줄 알았더니 아닌 모양이야?”
“…….”
갑자기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격한 배신감이 몰려왔다.
아니, 주말에 나도 모르게 남자를 만나러 가?
아니지.
그건 김 비서의 사생활이니까 굳이 내가 간섭할 건 아닌데…….
근데 그동안 나하고 함께한 시간이 있다면 당연히 얘기해 줘야 되는 거 아닌가?
아니야.
이게 이렇게 분하고 화가 날 일인가.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가슴 한쪽이 답답해지는 상황에서 나는 애써 장소를 물었다.
“주말에 제가 어디로 가면 되죠?”
“에닉스 호텔로 가면 된다. 거기 1층 식당으로 예약해 뒀다.”
“……알겠습니다.”
* * *
6월 말부터 치러지는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5월에 마지막 월드컵 평가전이 진행된다.
5월 국가대표 A매치 일정을 앞두고 발표된 대한민국 국가대표 명단에 박형우와 장현우의 이름이 당당하게 포함되었다.
아직 월드컵 최종 명단은 아니지만, 이번 5월 평가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면 최종 명단에도 뽑힐 가능성이 컸다.
“가서 잘하고 와라!”
“응원할게!”
고양 유나이티드 선수단과 직원들 모두 평가전을 치르러 가는 두 선수를 응원해주었다.
“중요한 순간에 빠지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요.”
“미안하면 그만큼 더 좋은 결과 만들어서 돌아와. 그리고 너 없는 동안 우리도 네 몫까지 최선을 다할 거니까.”
“고마워요, 지우 형.”
K리그1은 A매치 휴식기를 가지는 반면, K리그2는 정상적으로 시즌이 진행된다.
그래서 박형우와 장현우 모두 중요한 순간에 팀을 이탈하게 된 것에 미안함을 가졌던 것이다.
동료 선수들은 그런 두 사람이 부담 갖지 않게 해줬다.
그런 선수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나도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박형수 선수, 장현우 선수. 두 사람 모두 잘할 거라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대표님.”
“이제부터 최종 명단 발표될 때까지 계속 합숙인 거죠?”
“네. 거의 한 달 가까이 합숙한다고 하네요.”
“꽤 작정하고 준비하는가 보네요.”
“그렇죠.”
“어쨌든 좋은 모습 기대할게요.”
“넵.”
월드컵 본선에 오르기 위한 두 선수의 힘찬 여정은 이제부터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두 선수가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면 따라올 부가적 이익을 생각해보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선수들을 격려하는 시간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김 비서와 마주쳤다.
“오셨어요?”
“어, 음.”
나는 대충 인사하고 대표실로 들어가 버렸다.
의자에 앉은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복잡한 마음을 컨트롤하려고 애썼다.
김 비서가 주말에 맞선 보러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부터 그녀를 볼 때마다 심란한 마음으로 가득했다.
왜 나한테 말 안 했냐고 물어볼 수 있지만, 평소와 달리 쉽게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무엇보다 나도 주말에 맞선 보러 간다는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피차일반인 셈이다.
그래서 더 신경 쓰였다.
그때였다.
김 비서가 조심스럽게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내 기분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
“없는데. 왜?”
“도련님 요즘 분위기가 안 좋아서요. 저만 보면 자꾸 피하시는 것 같고.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을까요? 만약 있다면…….”
“그런 거 없어. 신경 쓰지 마.”
“…….”
“가서 일 봐.”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했다.
하지만 김 비서는 아니었나 보다.
그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뭔가 말하려던 그녀는 말을 삼키고 그대로 나가 버렸다.
하아.
미치겠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토요일이 되었다.
“가만있어 보자. 에닉스 호텔이…… 여기구나.”
김 비서가 없으니 차를 몰 수가 없다.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강남까지 오게 됐다.
고양시에서 강남까지 가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다이렉트로 가는 버스가 있지만 최소 1시간 반은 걸린다.
에닉스 호텔은 강남역에서도 제법 걸어야 도착할 수 있다.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에 의지해서 어렵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벽수그룹 손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쪽이 영신그룹의 지태훈 씨?”
“네, 맞습니다. 혹시 벽수그룹의 손지영 씨 맞으신가요?”
“네, 맞아요. 제가 바로 손지영이에요.”
손지영.
첫인상은 굉장히 섹시 했다.
웨이브진 긴 생머리에 회색빛의 오프숄더 원피스에서 드러나는 볼륨감 있는 몸매.
아마 대부분 남자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나를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런 웃음마저 섹시함이 넘쳤다.
김 비서가 청순함으로 가득하다면 이 여자는 완전 반대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고양 유나이티드 대표이사로 활동하신다고요.”
“아, 네. 그쪽은 벽수그룹 본부장으로 활동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쪽이라고 하니까 이상하네요. 지영이라고 불러요. 듣기로는 저하고 동갑이라고 들었는데. 저도 태훈이라고 부를게요. 어때요?”
“그러죠.”
아버지한테 들었던 대로 그녀는 성격이 상당히 좋았다.
나도 딱딱한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편하게 반말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의 리드는 주로 손지영이 가져갔다. 나는 그런 대화에 응수하는 정도로만 반응했다.
그런데도 손지영은 대화를 잘 이끌어 갔다.
“그거 알아? 우리 재벌들 사이에서 태훈이 네 이야기가 제법 많이 돈다?”
“그래?”
“어. 정말 많이 돌아. 영신 그룹 망나니가 개과천선해서 완전히 다른 사람 됐다고. 실제로 성과도 내고 있고.”
“음. 아닌데.”
“뭐가 아니야?”
“나 개과천선하진 않았어. 내 성격은 변함없이 그대로야.”
“그래?”
손지영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러더니 곧 웃음을 흘렸다.
“너 꽤 재밌다.”
“그래?”
“어. 솔직히 오늘 별로 기대 안 하고 나왔거든. 근데 생각이 달라졌어. 너 나하고 은근히 코드가 잘 맞을 것 같아.”
“나는 잘 모르겠는데.”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손지영이 싫다는 건 아니다.
그냥 이 자리 자체가 싫다.
빨리 끝내고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갑자기 식당 한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쨍그랑!
“당장 사과하세요!”
“뭐? 감히!”
갑작스러운 소란에 우리의 대화도 자연스럽게 끊겼다.
“무슨 일이지?”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소란이 일어난 곳으로 시선이 향했다.
그리고 곧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태훈아, 왜 그래?”
내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손지영이 당황스러워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소란이 일어난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소란을 일으킨 남자와 여자 사이에 끼어들며 외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