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어느 감독이든, 구단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존재한다.
각양각색의 요구들이 존재하지만 결국 ‘우승’을 위한 요구라는 것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아무리 우승을 위한다고 해도 구단이 들어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돈 많고 능력 있는 구단은 감독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해 줄 수 있지만, 대부분의 구단은 그러지 못한다.
그래서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구단과 감독 사이에 충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곽찬구 감독은 그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에 속했다.
지금까지 곽찬구 감독은 구단에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설령 무리한 요구를 했다 하더라도 가급적 구단의 상황을 이해하고 한 발 물러서는 편이었다.
그랬던 그가 내게 처음으로 제대로 된 요구를 하는 것이다.
“우승을 위해 다가올 여름 이적 시장은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겁니다.”
“감독님의 말씀은 저도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저희에게 남은 자금은 많지 않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미 지난번 겨울 이적 시장에서 많은 금액을 쓰셨으니까요.”
곽찬구 감독도 구단 사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 그는 물러서지 않고 요구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감독님께서 필요하다고 느끼는 영입 보강 포지션은 공격수입니까?”
“아닙니다. 공격은 사무엘과 요한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마무리를 지어줄 선수는 지금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 마무리로 이어갈 수 있게 풀어 줄 선수가 필요하죠.”
“흐음.”
그 말에 나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왜 그가 이런 얘기를 하는지 뒤늦게나마 이해를 했기 때문이다.
생각을 잠시 정리한 뒤 나는 말문을 열었다.
“제로톱에서 박형우가 보여줬던 플레이는 사실 마무리보다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퍼포먼스가 대단했죠.”
“…….”
곽찬구 감독의 두 눈에서 이채가 띠었다.
마치 다음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나는 천천히 설명을 이어갔다.
“최전방과 2선을 오고 가면서 공수 연결고리를 물론 상대의 수비를 부술 수 있는 파괴력과 버틸 수 있는 전술적 피지컬까지. 그게 이번에 박형우 선수가 모두 보여줬죠.”
“맞습니다.”
“하지만 박형우 같은 선수를 추가로 데려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박형우는 전형적인 크랙이다.
곽찬구 감독은 그런 크랙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뽑아내고 있었다.
전술적으로.
그리고 그 효과는 현재 K리그2를 크게 흔들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보이고 있었다.
적어도 2부 리그 수준에서 박형우는 이미 탑이다.
“알고 있습니다. 형우는 굳이 비교하자면 과거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에서 뛰었던 해리 케인 같은 선수죠. 그리고 토트넘 또한 케인이 빠진 자리는 쉽게 채울 수 없었습니다.”
“…….”
“하지만 당시 토트넘에서는 손흥민 같은 자원이 있었죠.”
“그 말은 우리에게도 손흥민 같은 자원이 있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어렵다.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있긴 합니다.”
“그래요? 어떤 방법이죠?”
“형우의 빈자리를 남은 선수들로 쪼개서 채워넣는 거죠.”
“…….”
“하지만 팀에서 경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선수는 현재로서 지우 혼자입니다.”
박형우와 장현우가 둘 다 빠져버리면 김지우 혼자서 모든 공격을 전담해야만 한다.
“지우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미 상대는 어떻게 하면 지우를 마킹할 수 있는지 분석을 했을 겁니다.”
“…….”
그랬다.
우리는 이미 지난 시즌에 그 부분을 뼈저리게 겪었다.
박요한과 김지우 둘이서 공격을 주도해야만 하는 작년에 상대는 김지우를 막으면 고양의 공격 자체를 막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잃어버린 승점이 몇 점이던가.
물론 후반기에 반등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지만, 올해는 다르다.
우리는 올해 ‘승격’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작년과 같은 일이 시즌 중간에 벌어져서는 안 된다.
곽찬구 감독도 그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그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대표이사로서 결론을 내려야 했다.
“혹시 봐둔 선수가 있습니까?”
곽찬구 감독이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선수를 영입하자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여기 명단입니다.”
예상했다는 듯 미리 준비한 영입 리스트 명단을 내미는 곽찬구 감독.
건네받은 영입 리스트를 본 내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예상 밖이군요.”
“그렇습니까?”
“네. 저는 혹시나 막대한 자금을 들이는 건 아닌가 싶었거든요.”
“설마 제가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일을 추진할 줄 아셨다면 실망입니다.”
“하하.…… 하지만 정말 이 선수로 충분합니까?”
“네. 충분합니다. 적어도 형우가 없는 그 기간에 충분히 제 몫을 해낼 겁니다.”
“…….”
그 말에 나는 다시 영입 리스트에 올라온 선수의 프로필을 확인했다.
이 선수는 나도 약간은 알고 있는 선수였다.
무엇보다 곽찬구 감독이 이 선수를 어떻게 알고 영입 요청을 한 건지 신기했다.
“이 선수와 인연이 있습니까?”
“네. 과거 제가 유소년 코치 시절에 알게 된 녀석이죠.”
“그랬군요.”
그 말에 나는 눈을 빛냈다.
* * *
김유리의 하루는 오전 6시 30분부터 시작된다.
알람 소리에 맞춰 눈을 뜨면 바로 출근 준비를 한다.
7시 30분, 지태훈 대표 이사의 집으로 방문해서 그를 픽업한다.
“요즘은 제가 깨우지 않아도 곧잘 일어나시네요?”
“당연하지. 새벽까지 술 먹고 노는 것도 아닌데.”
구단 사무실로 가기 전 늘 단골로 들리는 빵집에서 빵과 커피를 산다.
그러고 나서 구단 사무실에 도착하면 8시 30분쯤 됐다.
“오늘 진행할 주요 업무 목록들입니다.”
“어. 고마워.”
미리 준비해둔 업무 일정표를 지태훈 대표에게 전달한 뒤, 곧장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김 비서의 업무도 적지 않다.
단장이 공석이다 보니 그녀는 지태훈을 도와 일부 업무를 함께 수행하고 있었다.
“김 비서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지태훈 대표를 만나기 위해 온 직원들과 한 명씩 웃으며 인사를 나눈다.
벌써 이러기를 1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벌써 1년이 되어 가는구나.’
문득 든 생각에 김 비서는 업무를 보던 행동을 멈췄다. 그러고는 자신이 앉아 있는 책상 앞에 놓인 달력을 보았다.
달력은 이미 5월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음 달이면 정말로 지태훈 대표와 함께 이곳에 온 지 1년이 되는 것이다.
‘뭘 하면 좋을까?’
1주년.
허투루 보낼 수 없는 기념일이다.
한때 정신적으로 방황하며 영신 그룹의 망나니로 악명을 날렸던 지태훈이 이제는 누구에게 내놓아도 당당한 사람이 되었다.
달라진 지태훈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일처럼 뿌듯하게 여기고 있었다.
때때로 그를 볼 때면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
괜스레 다시 격하게 뛰는 심장.
그때, 보고서를 손에 든 천지원 부장이 나타났다.
“김 비서님, 대표님 안에 계십니…… 음? 김 비서님 얼굴이 빨갛습니다. 괜찮으세요?”
“네? 아, 넵. 괜찮죠!”
“……?”
“대표님은 안에 계세요. 말씀드릴까요?”
“네.”
김유리는 달아오른 얼굴을 빠르게 숨기고 평소 냉철해 보이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주어진 업무를 수행했다.
“대표님. 천 부장님 오셨습니다.”
-응. 들어오라고 해.
“부장님, 들어가시면 됩니다.”
천지원 부장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대표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다시 홀로 남게 된 김유리.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길게 내쉬었다.
지이잉.
“응?”
그때, 갑자기 그녀의 스마트폰으로 한 통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아빠다. 시간 되면 전화해라.]
김진철 이사가 보내온 메시지.
평일 낮에 갑자기 문자를 보내오는 일이 많지 않았었다.
그러다 보니 김유리는 의아해하며 바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통화음 끝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냐?
“아빠. 무슨 일이에요?”
-부탁이 있어서 연락했다.
“부탁이요?”
-그래. 다음 주 주말에 시간을 내어주면 좋겠구나.
“주말에요? 무슨 일인데요?”
-종신 그룹의 최용호 이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쪽 아들과 너를 만나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해왔다더구나.
“네!?”
-솔직히 바로 거절하고 싶은데 최용호 이사하고 업무적으로 좀 얽혀 있는 부분들이 있다 보니 쉽게 거절하기 어렵더구나. 가서 만나보기만 하고 네가 싫으면 바로 나와도 된다.
“…….”
-어렵겠니?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부탁에 김유리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굳이 그런 자리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난처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가서 자리만 참석하고 바로 나오자. 그러면 문제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한 그녀가 김진철 이사에게 말했다.
“가서 만나만 보고 올게요. 그러면 문제없죠?”
-그래. 고맙다. 이후에 발생할 일은 내가 책임지마. 여러모로 네게 미안하구나.
“괜찮아요.”
* * *
나는 천지원 부장과 마케팅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현재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는 팀의 분위기에 맞춰 진행할 만한 아이디어를 몇 가지 가져왔습니다.”
천지원 부장의 지휘 아래 마케팅팀에서 만든 보고서를 읽어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어본 뒤 나는 살짝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걸로는 안 되겠는데요.”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까?”
“네. 단순히 사은품을 주는 기반으로 하는 마케팅 방식은 한계가 있습니다. 뭔가 좀 더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으음.”
천지원 부장의 얼굴에는 고민이 드러났다.
나는 손가락으로 보고서를 툭툭 치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일전에 인터넷에서 봤던 축구팬들의 반응이 떠올랐다.
-진짜 요즘 축구 선수들 개잘생겼다.
-아~ 저 얼굴, 저 몸, 딱 1번만 만져보고 싶다.
-어떻게 하면 축구 선수들 만나볼 수 있을까?
“아!”
“……?”
“천 부장님. 이건 어떻습니까?”
“무슨…….”
“선수들을 활용하는 마케팅을 하는 겁니다.”
“선수들을요?”
“네. 지금 선수들로 진행하는 마케팅은 기껏해야 유니폼하고 굿즈 정도가 전부죠?”
말하고 있는 나는 웃고 있었다. 천지원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그렇죠.”
“거기서 좀 더 깊게 들어 가보는 겁니다.”
“깊게 들어간다면 어떤 식으로 들어가는지요?”
“팬들의 집으로 보내는 겁니다.”
“네?”
이어지는 내 말에 천지원 부장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선수들을 팬들의 집으로 보내자는 겁니다!”
“……!”
* * *
후욱. 후욱.
선수단 훈련이 끝난 이후 장현우는 홀로 개인 훈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제 1달 뒤에 발표할 월드컵 본선에 들기 위해서라도 꾸준하게 몸을 관리해야 했다.
“열심히 하네?”
“앗!”
열심히 운동하고 있는 장현우의 뒤로 박형우가 등장했다.
“형, 먼저 가신 줄 알았어요.”
“강력한 경쟁자 두고 먼저 퇴근하겠냐?”
박형우는 장현우 옆에서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런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장현우가 말했다.
“형은 이번에 월드컵 나가면 2번째인가요?”
“뭐, 그렇지.”
“월드컵은 도대체 어떤 곳이에요?”
“그건 왜?”
“궁금해서요. 경험자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싶고요.”
“흐음.”
박형우는 옛날 기억을 떠올렸다.
지난 2022년 카타르 월드컵 때, 박형우는 서브 멤버였다.
당시 무티뉴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서 어렵게 중동의 모래폭풍을 이겨내고 본선 진출권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때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이가 바로 박형우였다.
중동 리그에서 뛰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중요한 경기에서 득점을 하며 팀을 위기에서 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월드컵 본선에서는 달랐다.
당연히 주전으로 기용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박형우였지만 막상 본선에서 서브로 밀렸다.
그의 자리에는 대한민국의 역대급 미드필더 강철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티뉴 감독은 어린 강철인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줬다.
그러나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1승 2패. 조별리그 탈락.
조별리그에서 만난 러시아 월드컵 디팬딩챔피언이었던 프랑스를 꺾는 이변을 보였지만 멕시코와 이집트에게 패배했다.
박형우는 교체 출전해서 필드를 누볐지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박형우에게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일이었다.
지금도 숨이 턱 막히는 기억들이지만, 장현우에게는 그런 감정을 숨겼다.
“정말 멋진 무대야.”
“그래요?”
“응. 축구 선수로 밥 벌어먹고 지낼 생각이라면, 꼭 한 번쯤은 나가봐야 하는 대회라고 봐.”
“오오.”
“너는 잘하고 있으니까 곧 그 대회가 어떤지 제대로 겪어보게 될 거야.”
“저도 본선에서 형하고 같은 방 쓰고 싶은데요.”
예상치 못한 장현우의 말에 박형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가 곧 멋쩍은 얼굴로 장현우의 등을 가볍게 툭 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