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왈! 왈!
집으로 돌아온 사무엘은 자신을 반기는 덕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잘 있었어?”
왈!
사무엘은 덕구와 둘이 살고 있었다. 원래 가족과 함께 지내고 있었지만, 최근에 장인어른의 건강이 나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와 아이들은 현재 브라질에 가 있었다.
그렇게 떨어져 지낸 지 벌써 1년이 넘었다.
비시즌 기간에 브라질로 가서 가족을 만나기는 했지만, 사무엘 입장에서 쓸쓸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덕구가 있어서 극한의 외로움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밥그릇이 비었구나.”
비어진 밥그릇에 사료를 가득 채워준 뒤, 사무엘은 소파에 앉았다.
“후, 힘드네.”
주중 FA컵 경기가 다가올수록 사무엘의 심적 부담감은 커졌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속은 그렇지 못했다.
파주FC를 향해 오랜 시간 애정을 보냈던 사무엘이다.
“…….”
사무엘은 옛날 자신의 모습이 찍혀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그동안 잊고 있었던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브라질에서 무명 선수에 가까웠던 사무엘은 어린 시절부터 겪어왔던 지긋지긋한 가난과 그로 인한 절망적인 상황들이 사무엘을 끝없이 괴롭혀 왔었다.
그래서 살기 위해 외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외국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어려움이 동반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해외 팀으로 보내주겠다던 에이전트에게 사기를 당했다.
그렇게 사기 당해서 처음 발을 디뎠던 곳이 바로 이란이었다.
이란 페르시안 걸프 리그에 속해 있는 트락토르 사지라는 팀에서 1년 동안 활약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열악한 환경과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사무엘은 도망치듯 팀을 떠나야만 했다.
기록도 좋지 못했다.
그렇게 방황하던 사무엘은 몬테네그로로 향했다.
몬테네그로 퍼스트 리그에 소속되어 있는 FK 포드리고차 라는 팀에 입단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리그 18골을 기록하며 득점왕과 동시에 생애 첫 우승트로피까지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당시 몬테네그로에는 K리그에서 파견한 스카우터들이 있었다.
이미 K리그에는 훌륭한 활약을 펼치고 있는 몬테네그로 국적 출신 선수들이 제법 있었다.
대표적으로 데얀 다미아노비치, 제난 라돈치치, 스테판 무고사 등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구단 관계자들 사이에선 우즈베키스탄 국적 출신 선수들 못지않게 몬테네그로 국적 선수들에 관한 관심이 높았다.
그런 상황에서 몬테네그로 리그를 뛰던 사무엘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거기다 믿고 쓴다는 브라질 출신이 아닌가.
K리그 몇 팀이 사무엘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적극적인 팀은 바로 파주FC였다.
파주FC의 적극적인 구애 끝에 사무엘은 어렵게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되었다.
이때부터 사무엘의 코리안드림이 시작된 것이다.
“마누라. 보고 싶다.”
가족이 그리웠다.
사무엘은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찾아간 어학당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부인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타향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한국 생활을 이어갔었다.
그래도 한국은 생각보다 살기 좋은 곳이었다.
북한의 위협이 존재했지만, 치안도 좋았고 삶의 수준도 전체적으로 높았다.
그래서 사무엘은 한국 생활에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그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그는 파주FC에서 순도 높은 활약을 보일 수 있었다.
파주FC 팬들도 사무엘을 사랑했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적으로 돌아섰다.
“두고 보자, 이재신.”
이렇게 된 모든 원흉에는 파주FC 단장 이재신에게 있었다.
그가 벌인 각종 비리.
팀을 사랑했던 사무엘에게 있어 이재신은 악의 축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놈은 팀에 충성을 바쳐왔던 자신을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가차 없이 내첬다.
사무엘이 이런 취급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오죽하면 대부분의 축구 관계자들이 파주FC를 비난했겠는가.
이제는 결전의 순간이다.
다가올 경기에서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줄 것이다.
* * *
고양 서포터스 회장 박태준.
그는 다가올 경기 북부 더비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다른 경기들보다 신경을 많이 써야했다.
“자, 다 함께 박자 맞춰서 응원가 불러볼게요.”
박태준의 주도하에 모인 서포터스들이 힘차게 응원가를 불렀다.
하지만 박태준은 불만족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더 크게 해야죠! 이 정도로는 파주 놈들에게 밀립니다!”
박태준의 불호령에도 그 누구도 불만을 표출하지 않았다.
서포터스들도 경기 북부 더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무려 4년 만에 만나는 겁니다! 파주 놈들은 우리가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더욱 잘 보여줘야 합니다!”
연습인데도 불구하고 서포터스들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응원가를 부르고 약속한 리액션들을 연습했다.
“상대가 공을 잡으면 어떻게 한다?”
“우우우우!”
“우리 팀이 공격을 전개하면?”
“고양! 고양! 고양 유나이티드!”
“좋습니다!”
그렇게 연습이 마무리되어 갈 무렵, 누군가가 그들을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엇!? 대표님!?”
지태훈 대표였다.
갑작스러운 지태훈 대표의 등장에 박태준을 비롯한 서포터스들이 모두 놀랐다.
“응원 준비하시느라 고생 많으십니다. 부족하지만 이거라도 드세요.”
손수 준비한 음료수와 간식거리가 등장하자 서포터스들은 환호했다.
그런 서포터스들을 향해 지태훈 대표가 말했다.
“주중 경기에서 여러분들을 위한 전용 차량이 준비될 예정입니다. 저희 프런트는 최선을 다해 서포터스분들을 지원할 겁니다.”
“와아아아!”
가까운 거리 때문에 굳이 차량 지원을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혹시 모를 안전상의 이유로 서포터스들을 위한 차량 제공을 실시 하게 된 것이다.
서포터스들은 그런 프런트에게 감사해했다.
“그럼 경기장에서 봅시다.”
“네!”
* * *
고양 유나이티드 선수들도 모처럼 찾아온 경기 북부 더비로 분위기는 뜨거웠다.
“너희들 더비 경기 안 치러봤지?”
사무엘의 물음에 팀 내 젊은 선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4년 동안 팀은 많이 변해 있었다. 일부 노장 선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경기 북부 더비를 처음 겪었다.
사무엘은 팀 내에서 유일하게 수많은 경기 북부 더비를 겪어본 당사자였다.
그래서 사무엘은 팀 동료들을 위해 자신의 경험치를 전수했다.
“경기 북부 더비는 굉장히 치열해. 평소에 기력이 부족하던 선수들도 이때만큼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정도야.”
“그 정도야?”
“응. 그뿐만이 아니야. 경기장을 찾는 팬들의 응원도 평소와는 달라. 마치 우리가 콜로세움 안에서 싸우는 전사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될 거야.”
젊은 선수들은 사무엘이 하는 설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지면 끝이라고 뛰어야 해. 우승은 못 하더라도 다음을 기약해볼 수 있지만, 더비전에서는 다음이란 없어. 평생 가는 거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사무엘과 선수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곽찬구 감독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선수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사무엘한테 설명을 들어보니 어떻냐?”
“앗. 감독님.”
감독의 등장에 선수들이 놀랐다.
“사무엘의 말을 허투루 들어서는 안 돼. 올해 치를 경기 중에서 가장 치열한 경기가 될 테니까.”
“넵!”
“자, 그럼 전술 설명 들어가마.”
“네!”
* * *
곽찬구 감독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자세로 파주를 상대할 전략을 구성했다.
“감독님. 여기서는…….”
“음. 이것보다는 이렇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상대가 라인을 타는 전략으로 온다면…….”
“음. 분명 그럴 수도 있겠군.”
수석코치와 함께 세부 전략을 짰다.
“이반코비치 감독이 주로 즐겨 쓰는 전략이 포백 기반에 역습형 4-3-3이었지?”
“네. 똑같은 4-3-3인데, 지배형 구조로 되어 있는 저희와는 좀 다릅니다.”
“그럼 그쪽이 다른 전략을 들고 나올 가능성은 있겠나?”
“음. 지금까지 드러난 정보에 의하면 이반코비치 감독은 전술에 대한 고집이 센 편입니다.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군.”
곽찬구 감독은 전술판을 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최종현이하고 나정호 모두 주전으로 뛰고 있지?”
“그렇죠.”
“그럼 걔들도 선발로 나오겠지?”
“음. 그렇습니다.”
파주FC의 미드필더 최종현과 수비수 나정호 모두 곽찬구 감독이 발굴한 선수들이었다.
“흐음. 그 녀석들 요즘 꽤 잘나가던데.”
“예. 흐름이 좋지요.”
20대 후반인 두 선수 모두 전성기에 도달한 상태였다.
사실상 현재 파주FC를 이끄는 에이스들인 셈이다.
“내가 키웠지만, 참 까다롭다.”
“……감독님.”
“그래도 우리 애들이 잘해 주겠지.”
곽찬구 감독의 말에는 믿음이 담겨 있었다.
* * *
경기 당일 저녁.
평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파주스타디움 근처에는 구름 관중을 이루었다.
파주FC 서포터스들은 고양 유나이티드 선수단과 팬들이 오는 길목마다 도발적인 멘트가 담긴 현수막을 걸어놓았다.
[여기는 배신자가 올 곳이 아니다!]
[고양이는 파주스타디움 출입 금지!]
[야옹! 야옹!]
“하하. 이것들 봐라? 꽤 귀엽네?”
박태준을 비롯한 고양 유나이티드 서포터스들은 파주FC 서포터스의 도발에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파주FC 팬들을 당황시킬 고양 유나이티드 팬들의 반격이 이어졌다.
쿵짝! 쿵짝!
마치 국회의원 후보 유세 차량 같은 자그마한 트럭에 탑승한 박태준과 고양 유나이티드 서포터스들.
그들은 북을 치며 자신들의 응원가를 불렀다.
우리의 고양!
힘차게 가자!
너희들 뒤에는 우리가 함께해~!
파주 한복판에서 울려 퍼지는 고양 유나이티드 응원가.
지나가던 파주FC 팬들은 당황하며 입을 벌렸다.
“저! 저!”
“헤! 이따 경기장에서 보자! 파주 놈들아!”
양 팀 팬들은 서로에게 가운데손가락을 날렸다.
그렇게 경기장에 도착한 양 팀 팬들은 경기 시작 전부터 응원가를 힘차게 부르며 기 싸움에 들어갔다.
야옹! 야옹!
파주FC 팬들은 고양 유나이티드를 비하할 때 쓰는 ‘야옹!’을 외치기도 했다.
그러자 고양 팬들도 즉각 대응했다.
우리는 신도시!
너희는 촌!
파주도 제법 규모가 큰 도시이지만 상대적으로 고양시보다 덜 발전된 부분들이 있었다.
고양 팬들은 파주팬들의 가슴 아픈 곳을 찔러버린 셈이다.
역도발에 당해버린 파주 팬들이 흥분했다.
“죽여 버린다!”
“응! 꺼져!”
팬들의 응원이 치열해지는 사이, 양 팀 선수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트레이닝 복장을 입고 나온 선수들은 몸을 풀기 위해 움직였다.
파주FC 팬들은 기다렸다는 듯 곽찬구 감독과 사무엘을 향해 거센 야유를 보냈다.
우우우우우우-.
그러자 고양 팬들이 그런 두 사람을 지켜주기 위해 이름을 외쳤다.
사무엘-! 사무엘-! 사무엘-!
곽찬구-! 곽찬구-! 곽찬구-!
팬들의 신경전은 그 어느 때보다 강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처음 겪은 고양 유나이티드의 젊은 선수들이 기겁했다.
“장난 아닌데?”
“진짜 큰일났네. 지면 끝장이란 말이 이런 거였구나.”
“와, 미친. 내가 알던 팬들 맞아?”
“평소에 원정 경기에도 이만큼 팬들이 따라오지 않았던 것 같은데…….”
파주스타디움의 규모는 약 4만 석.
그런 경기장이 거의 꽉 찰 정도로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그중에서 원정석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 원정석 안에는 익숙한 인물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지태훈 대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