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고양 유나이티드는 여전히 순항하고 있었다.
곽찬구 감독의 지휘 아래 고양 유나이티드는 아직 패배가 없었다.
“7경기 동안 6승 1무. 거의 압도하고 있군.”
현재 팀 성적표를 볼 때마다 절로 흐뭇했다.
“다가올 FA컵을 어떻게 활용할지 궁금하군.”
FA컵 경기는 아쉽게도 우리의 홈이 아닌 파주FC 홈에서 치러진다.
이번 시즌 FA컵은 4강전과 결승전만 홈&어웨이로 진행된다.
그래서 적지에서 어떻게든 결판을 내야만 했다.
경기장은 파주 운정과 금릉 사이에 있다. 우리 팀 훈련장에서 자동차로 이동하면 20분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실제 거리는 멀지 않지만, 마음의 거리는 길었다.
무려 4년 만에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팬들은 벌써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고.”
고양 유나이티드 공식 사이트와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흥분한 팬들의 반응으로 가득 차 있었다.
-파주 이 양아치 놈들, 이날을 기다렸다!
-비록 우리가 강등당했어도 파주는 잡아야 된다! 진짜!
-아힘파이! 아힘파이!
파주FC 팬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고양이 놈들이 날뛰어 봤자야. 어차피 우리한테 안 돼.
-응. 그래봤자 2부 리그 팀.
-사무엘하고 곽찬구 그 배신자 새끼들 오면 가만 안 놔둔다!
고양이는 파주FC 팬들이 우리를 비하할 때 쓰는 말이다.
“그나저나 곽찬구 감독하고 사무엘은 괜찮으려나. 정말 잘못했다가 몰매라도 맞는 거 아냐?”
작년에 중도 부임한 이후 빅매치를 치러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뭐, 회귀 전에는 경영 자체에 거의 손을 안 댔기 때문에 이런 경험 자체가 거의 없다.
“대표님.”
“아, 감독님. 오셨군요.”
미리 호출했던 곽찬구 감독이 선수단 훈련을 마치고 나를 찾아왔다.
“감독님. 파주FC하고 일찌감치 매치가 성사됐는데, 기분이 어떠십니까?”
“흐음. 글쎄요.”
“…….”
“뭐, 어떻게든 때려 부숴야죠. 처음에 제가 이곳에 올 때 가졌던 그 마음, 아직 변치 않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쉽지 않겠죠.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곽찬구 감독은 자신감을 드러냈다.
“감독님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파주와 우리의 전력은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차이야 있죠. 하지만 충분히 공략 가능한 전력입니다.”
정규리그가 치러진 이후 상·하위 스플릿 시스템이 가동되는 K리그1 특성상, 상위 스플릿에 들어가려면 6위 안에 들어가야 했다.
그런 K리그1에서 파주FC는 4~7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치열한 순위 싸움을 이어 가는 중이다.
“파주가 최근 2연승을 거두기는 했어도 우리와 경기를 두고 앞뒤로 전북과 울산을 만납니다. 이후 서울과 수원 같은 강팀들 경기들이 줄지어 있고요.”
“흠. 그럼 우리와 경기에서 힘을 뺄 수도 있겠군요?”
“그럴 확률이 있죠. 하지만 더비 경기 특성상 힘을 완전히 빼지는 않을 겁니다.”
곽찬구 감독으로부터 얘기를 듣던 중, 문득 궁금한 부분이 생겼다.
“곽 감독님은 예전에 파주FC에서 더비전을 준비하실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음. 꽤 공을 들였죠. 사실 이런 더비전은 이겨도 본전인 셈이거든요. 지면 너무 많은 것들을 잃고요.”
“그랬군요.”
곽찬구 감독이 이끌던 파주FC는 강했다.
특히 고양을 상대로 7승 3무 3패로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그랬던 감독이 이번에는 친정팀을 상대로 창칼을 겨눈다.
“좋은 결과 기대하죠.”
“실망하지 않은 결과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 * *
고양시 일산동구 식사동에 있는 고급 주상복합 단지.
“나 왔어.”
선수단 일정을 소화하고 돌아온 곽찬구 감독이 집으로 돌아왔다.
곽찬구 감독 집은 평수가 넓었다.
현관문 입구부터 시작되는 넓고 긴 복도를 지나가면 거실이 나왔다.
그렇게 거실에 도착하면 커다란 장식장이 눈에 들어왔다.
투명한 유리로 이루어진 장식장 안에는 다양한 트로피들과 상패 그리고 과거의 영광이 깃든 사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과거 파주FC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얻은 것들이었다.
안방으로 들어가려던 곽찬구 감독은 그런 장식장 앞에 멈춰서서 트로피와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곽찬구 감독은 장식장 위에 올려진 사진을 손에 쥐었다.
사진 속에서 우승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과 동료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사진을 본 곽찬구 감독은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평생을 헌신한 팀에서 강제 아웃당한 그는 이제 정든 옛 팀을 상대로 칼을 겨누게 되었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았다.
그래서 묘했다.
“아빠, 왔어?”
그때, 방문이 열리고 딸이 나왔다.
“유나야, 오늘 학교 다녀온다고 하지 않았냐?”
“응. 오늘 갑자기 교수님이 공강이라고 해서 그냥 일찍 왔어.”
“밥은?”
“먹었지. 먹고 한숨 자다 일어났어.”
후줄근한 트레이닝 티셔츠에 돌핀팬츠를 입은 곽유나는 연신 눈을 비비다가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마셨다.
시원하게 물을 비워낸 딸의 모습을 본 곽찬구가 물었다.
“엄마는?”
“엄마, 그, 뭐더라. 모임 나가신다고 했는데?”
“모임?”
“그 매번 나가는 모임 있잖아. 파주에서 했던 모임.”
“뭐야? 그럼 네 엄마 파주 갔어?”
“아닐걸. 일산에서 본다고 들었는데?”
“그래?”
“응. 아, 그리고 우진이는 오늘 좀 늦는데.”
“걔는 왜?”
“학교에서 무슨 추가 훈련 진행한다고 늦는데.”
곽유나는 24살.
곽우진은 21살.
곽유나는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서연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하고 있었다. 곧 졸업을 앞두고 있는데 장학금을 받고 다닐 정도로 학교 내 엘리트였다.
동생 곽우진은 한국대학교 축구부에서 현역 축구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답게, 곽우진은 우수한 실력을 바탕으로 축구부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프로팀 입단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올해가 지나면 프로팀에 입단할 확률이 컸다.
“아빠는 괜찮아?”
“뭐가?”
갑작스러운 딸의 물음에 곽찬구가 의아해했다.
그러자 곽유나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소식 들었어. 파주FC하고 붙게 됐다며?”
“…….”
딸의 말에 곽찬구는 입을 다물었다.
“아빠가 평소에 파주FC에 얼마나 큰 자부심을 느꼈는지 알고 있어. 그래서 걱정이 돼. 아빠가 혹시나…….”
“괜찮다. 이미 다 정리된 부분이야. 아빠 못 믿나?”
“…….”
“그저 지나가는 상대 팀이야. 우승하려면 이겨야지.”
하지만 곽유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선수 시절과 감독 시절까지 모두 지켜봤었다.
그 누구보다 속이 답답할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상 말을 할 수는 없었다.
* * *
파주FC도 조금은 소란스러웠다.
“생각보다 일찍 맞붙게 됐군.”
“…….”
“전(前) 단장으로서 기분이 어떠신가?”
이재신 단장은 비꼬는 말투로 물었다. 그러자 그 앞에 있던 허재우 지원팀장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단장이 묻는데 대답 안 해주는 건가?”
“시끄럽다.”
“거, 단장한테 너무하는구먼.”
허재우는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가증스러운 지태훈 대표의 얼굴을 볼 때면 거의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혐오감을 느꼈다.
그랬는데 이렇게 가까운 시일 내에 붙게 된 이 상황에서 복수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런 허재우의 마음을 이재신 단장이 모르지는 않았다.
“이반코비치 감독하고는 이야기 잘 해봤나?”
“그 외국인 놈? 하, 그 성깔대로 하는 놈하고 내가 무슨 대화를 나눠?”
“그럼 복수할 생각은 없는 건가?”
“그건 아니고. 후, 일단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다 넘기긴 했어.”
재작년 겨울에 곽찬구 감독을 내보고 이후 팬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파주FC는 야심차게 외국인 감독을 데려왔다.
루카 이반코비치.
크로아티아 출신 감독으로, 과거 세르비아 리그에 있던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감독으로 활약하며 많은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파주FC 오기 전에는 J리그 세레소 오사카와 슈퍼리그 베이징에서 감독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일본과 중국 리그에선 썩 좋은 결과를 만들지는 못했다.
문화적 차이로 인한 적응에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가 파주FC의 제안을 받고 한국 K리그 도전에 나선 것이다.
그렇게 비싼 돈을 들여 영입한 이반코비치 감독은 현재 상위스플릿 경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시즌 초반 아주 잠깐 리그 1위에도 올라가기도 했지만, 지금은 5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래도 연승만 잘하면 아시아챔피언스리그 티켓이 주어지는 3위 안으로도 노려볼 수 있었다.
첫 시즌치곤 괜찮게 흘러가고 있지만 문제가 있었다.
이반코비치 감독은 상당히 독선적인 인물이었다.
전술적인 부분에서 고집이 세고,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대로 선수단 운영을 하지 않으면 강한 불만을 토해내는 인물이었다.
“저번에 인천에게 크게 한 방 먹고 조금은 자중하나 싶었는데…… 아닌가?”
“잠깐뿐이지. 그 외국인 영감이 한 경기 졌다고 해서 기죽겠어?”
“하긴.”
이재신 단장과 허재우 팀장 모두 이반코비치 감독과 틈만 나면 기 싸움하느라 심력을 소모했다.
“이반코비치 감독이 이번 더비전의 중요성을 좀 알았으면 하는데.”
이재신 단장은 고양 유나이티드가 강등된 이후에 파주FC 단장으로 부임했다.
그래서 본인도 처음 치르는 경기 북부 더비였다.
하지만 경기 북부 더비가 K리그에 주는 상징성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고 있었다.
“허 팀장. 그쪽은 겪어봐서 알지?”
“뭘?”
“경기 북부 더비.”
“뭐, 모르지는 않지.”
허재우 단장도 딱 1번 겪어본 경기 북부 더비.
하지만 단 1번만 겪어봤음에도 불구하고 더비 매치의 파급 효과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다.
“도대체 어느 정도야?”
“그건…… 그건 솔직히 겪어봐야 알 수 있어.”
“흐음.”
굳은 얼굴로 말하는 허재우의 반응을 본 이재신 단장도 호기심이 동했다.
전임 단장으로부터 인수인계 받을 때도, 앞으로 경기 북부 더비는 못 볼지도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하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었다.
“어쨌든 이겨야 된다는 뜻이지?”
“그렇지. 지면 네 단장직도 끝날 수도 있다.”
“뭐?”
“궁금하면 져보던가.”
“미친놈인가.”
이재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골! 골입니다! 오늘은 사무엘의 날입니다!』
경기 북부 더비를 앞두고 치러진 주말 리그 경기.
사무엘은 그 경기에서 선발로 출전했다.
선발 출전한 그는 시종일관 상대 수비수들을 위협하며 착실하게 기회를 만들어갔다. 결국 멀티 득점까지 성공하며 자신의 건재함을 드러냈다.
『이제 주중 FA컵 경기에서 파주FC와 경기를 치르게 될 고양 유나이티드인데요. 거의 4년 만에 치러지는 경기 북부 더비 매치를 앞두고 사무엘 선수의 기세가 대단하네요.』
『그렇습니다. 이 정도 기세라면, 다음 주중 경기에서도 사무엘 선수가 선발로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중계 위원들도 사무엘의 놀라운 활약을 두고 코멘트를 남겼다.
그렇게 경기가 끝나고 라커룸으로 돌아간 사무엘.
그런 사무엘 곁으로 김지우가 다가왔다.
“이봐, 사무엘. 너 오늘 장난 아니더라.”
“나 원래 잘했어. 몰랐어?”
“모르긴. 잘 알지. 예전에 너 막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주장 김지우와 사무엘은 예전에 몇 번 붙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두 사람 모두 다른 팀 소속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 팀이 되었다.
“사무엘. 다음 경기 기대해도 되지?”
“어. 나만 믿어.”
“그래. 믿는다.”
김지우는 사무엘의 어깨를 툭툭 쳐준 뒤 라커룸을 떠났다.
“…….”
라커룸 거울을 바라보는 사무엘의 두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