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선경오일은 영신 그룹과 사이가 좋은 회사는 아니다.
비즈니스적으로 얽혀져 있기는 해도 딱 그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최용일 회장의 도발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롭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오늘 경기가 기대되네요.”
“나도 무척 기대된다네.”
그 말을 끝으로 우리의 대화는 끝났다.
* * *
제주 홈경기장에는 주황색과 노란 물결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주FC 팬들이 입은 홈유니폼이 주황색이었고, 고양 유나이티드 홈팬들이 입은 유니폼이 노란색이었기 때문이다.
양 팀 팬들은 경기 시작 전부터 응원가를 부르며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고양~ 승리를 위해~
너의 뒤에 우리가 있어~
고양 서포터스의 회장 박태준이 맨앞에 서서 노란색 확성기를 손에 쥐고 응원을 진두지휘했다.
그 모습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뜨겁게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서 양 팀 선수들이 경기 시작을 위해 모였다.
주심이 손목에 찬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그런 주심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경기장은 침묵에 휩싸였다.
그리고 곧 주심이 입에 문 휘슬을 크게 불었다.
삐이이익!
우와아아아아아!
『경기 시작했습니다! 2026 더블은행 K리그2 1라운드 제주FC 대 고양 유나이티드의 경기가 시작합니다. 화면 왼쪽이 홈팀 제주FC 그리고 오른쪽이 원정팀 고양 유나이티드입니다.』
제주까지 오지 못한 고양 유나이티드 프런트 직원들은 집에서 TV로 경기를 지켜보았다.
매우 중요한 첫 경기다.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지켜보는 가운데 시작부터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김지우! 온주현으로부터 공을 빼냅니다! 장현우가 볼을 받습니다! 장현우, 그대로 앞쪽에 있는 박형우에게 패스! 박형우 뛰어들어 가는데요!』
가로채기에 성공한 김지우를 시작으로 장현우와 박형우까지 이어지는 패스 플레이가 물 흐르듯 이어졌다.
박형우는 본인의 장기 중 하나인 특유의 드리블로 순식간에 제주의 페널티박스 안쪽까지 침범했다.
그런 박형우의 플레이에 깜짝 놀란 제주의 박한빈이 황급히 수비 플레이를 시도하다가 그만 발을 걸고 말았다.
박형우는 그대로 박한빈의 발에 걸려 넘어졌다.
그걸 본 주심이 그대로 휘슬을 불었다.
삐이익!
『어어! 찍었습니다! 주심이 PK를 선언합니다!』
『이게 바로 박형우 선수의 장기 중 하나죠! 빠르게 치고 들어가는 드리블 플레이에 순간적으로 수비가 실수하고 말았습니다!』
『경기가 시작된 지 불과 1분도 채 되지 않아서 주심이 PK를 선언하는데요! 제주 선수들이 몰려와서 주심에게 강하게 어필해 봅니다!』
『자, 이 상황에서 일단 VAR 체크 들어가야죠.』
주심은 선수들을 물러나게 한 뒤, 귀에 손을 대고 VAR과 교신했다.
“어떻게 보여? PK 맞지?”
-네. 저희가 지금 영상 다시 돌려보고 있는데 명백한 PK입니다. 어떻게 직접 영상 한 번 확인하시겠습니까?
“됐어. 확인할 필요까지 있나. 나도 봤는데.”
VAR과 교신을 끝낸 주심이 재차 PK를 선언했다.
그 순간 제주FC 팬들의 입에서는 야유가, 고양유나이티드 팬들 입에서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PK 키커로 박형우 선수가 직접 나섭니다. 박형우 선수, 본인이 만든 PK를 득점까지 만들 수 있을까요?』
『제주FC 골키퍼 조견우 선수,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데요.』
『시작부터 PK를 내주게 된 제주FC입니다!』
삑!
주심의 휘슬과 함께 박형우가 바로 움직였다.
뻥!
박형우의 오른발 끝에 정확히 공이 닿았다. 힘차게 날아간 공은 그대로 골대 오른쪽 위쪽 구석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출렁-.
『득점합니다! 이번 시즌 K리그2 1호 득점은 박형우 선수의 PK 득점으로 기록됩니다!』
『이야, 박형우 선수 시작부터 대단한 존재감 보여주네요! 이렇게 되면 박형우 선수는 10년 만에 K리그 득점을 만들어 냅니다!』
와아아아아!
시작부터 득점을 만들며 앞서 나가자 고양 유나이티드 팬들은 난리가 났다.
약 300명의 고양 원정 팬들이 들썩이자 마치 노란 물결이 출렁이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그 안에 있는 지태훈 대표도 벌떡 일어나며 기뻐했다.
『고양 팬들도 기뻐하고 지태훈 대표도 벌떡 일어나서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하네요.』
『고양 입장에서 기분 좋은 출발을 합니다!』
* * *
전반부터 앞서나가긴 시작한 고양.
하지만 앞서 나가는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빈아! 수비 위치 잡아! 주현이 너는 좀 더 위로 올라가!”
제주FC의 강석훈 감독은 터치라인 앞에 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감독의 진두지휘 아래 제주FC 선수들은 어떻게든 만회하기 위해 노력했다.
전방부터 이어지는 강도 높은 압박 플레이와 조직적인 패스 플레이를 통한 빌드업으로 고양을 압박했다.
“공간 내주지 마! 지역 방어로 못 오게 막아!”
고양 유나이티드 감독 곽찬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도 터치라인 앞에 서서 선수들을 진두지휘했다.
『양 팀 감독들이 굉장히 분주합니다! 그만큼 경기 분위기도 올라가고 있는데요!』
『지금 양 팀의 경기 템포가 상당히 빠릅니다. K리그1에서도 이 정도 템포 보여주는 일이 드물거든요? 후반에 선수들 체력이 걱정될 정돈데요.』
『양 팀 선수들이 이번 경기에 모든 걸 걸고 싸우는 것 같습니다.』
고양과 제주 모두 유효슈팅을 3개씩 기록하며 찬스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던 중, 제주가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다.
『라시모프의 몸에 맞고 공이 골대 뒤로 나갑니다. 제주의 코너킥입니다.』
『온주현 선수가 키커로 나서는데요. 올라갑니다!』
온주현의 킥에 공이 궤적을 그리며 페널티박스 안쪽으로 향했다.
골문 앞 혼전 상황 속에서 박한빈이 갑자기 튀어나와 펄쩍 뛰어올랐다.
제주의 중앙 수비수인 그를 아무도 마킹하지 않았기에, 박한빈은 여유롭게 떨어지는 공에 이마를 맞출 수 있었다.
출렁-.
고양의 주전 골키퍼 박지원이 뒤늦게 몸을 날려봤지만 공은 너무나도 쉽게 골망을 흔들었다.
그 순간 제주FC 팬들의 환호성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와아아아!
『득점합니다! 박한빈이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는 득점을 만들어냅니다! 대단합니다!』
『이야~ 이걸 제주가 경기를 바꿔버리네요! 대단합니다!』
『전반 15분 만에 경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상당히 치열하게 진행되는데요!』
“하, 이걸 먹히네.”
실점한 고양 선수들이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오늘 주장으로 나선 김지우가 동료 선수들을 향해 외쳤다.
“자! 자! 실망하지 말고! 아직 시간 남았다!”
경기는 점점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TV 중계로 시청하던 K리그 팬들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K리그2 수준 왤케 높음?
-전북하고 울산 개막전 경기 기다릴 겸 해서 보고 있는데 내용 미쳤네.
-개꿀잼이다 ㅋㅋㅋ
K리그1 개막전 경기인 전북과 울산의 경기를 기다리던 팬들이 제주와 고양 경기를 보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라시모프! 수비 성공합니다! 이진수가 공을 받습니다. 이진수 측면에서 치고 나갑니다! 고양의 역습 기회!』
『자~ 들어가죠~』
『이진수가 전방으로 길게 크로스 올립니다! 롱크로스! 사무엘이 잡습니다! 사무엘 버텨내고 공을 흘립니다! 쇄도하는 박형우가 잡는데요!』
『기회죠! 기회죠!』
『박형우 슈우우웃! 들어갑니다! 박형우! 추가 골을 만들어냅니다!』
우와아아아아!
아주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라시모프를 시작으로 또다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플레이에 제주FC가 또 한 번 흔들렸다.
멀티골을 기록한 박형우는 환하게 웃으면서 오른쪽 손가락 2개를 펼쳐 보이는 세리모니를 선보였다.
다시 앞서 나가기 시작한 고양 유나이티드 벤치와 관중석도 기쁨으로 가득했다.
-ㅅㅂ. 박형우 클라스 보소.
-개인상 노린다더니 1라운드부터 미쳤네 ㅋㅋㅋ
-박형우 그는 신인가?
-신형우 그는 박인가?
-박형우! 박형우! 박형우!
-제주 ㅅㅂ 해체해!
-제주 이놈들 집문서 걸었나! 이걸 먹혀?
중계로 보는 팬들도 박형우의 멀티 득점에 놀라워했다.
그렇게 고양은 다시 한번 앞서 나가는 기회를 잡고 경기를 주도해 나갔다.
하지만 더 이상의 추가골 없이 양 팀의 전반전이 끝났다.
* * *
지렸다. 오졌다.
전반전이 끝나고 하프타임에 들어선 상황에서 내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도련님. 기분 좋으세요?”
“이 상황에서 안 좋은 게 이상한 거 아냐?”
김 비서가 작게 웃었다.
그때, 누군가가 갑자기 나를 덮쳤다.
“대표님!”
“으악!”
나를 와락 끌어안은 사람은 바로 박태준이었다.
“대표님! 감사합니다!”
“네? 왜, 왜 그러세요?”
“진짜 모처럼 고양다운 경기 보고 있네요! 정말 대표님 덕분입니다!”
“제가 뭘 했다고…… 그건 그렇고 아직 후반전 남아 있습니다만?”
“그렇죠! 그래도 너무 행복합니다! 제발 후반전도 전반전처럼 잘해서 이겨줬으면 좋겠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박태준의 모습을 보니 나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김 비서. 카드에 돈 얼마나 남아 있지?”
“제 카드요?”
“아니, 내 카드.”
“음. 잠시만요. 아직 좀 남았네요. 뭐 하시게요?”
“기분도 좋은데 원정 온 서포터스들한테 간식거리라도 쏠까 해서.”
“음, 도련님 개인 돈으로 쏘시게요?”
“엉. 회삿돈으로는 좀 그럴 거 아냐.”
“……옛날에 법인 카드로 클럽 다녔던 도련님은 어디 갔죠?”
“아, 그건 옛날 일이고. 어쨌든 가능? 불가능?”
“가능해요.”
“좋아. 그럼 저기 박태준 씨하고 얘기해서 매점에서 간식거리 사서 싹 뿌려줘.”
“네. 그럴게요.”
김 비서가 서포터스들에게 줄 간식을 사러 가는 사이, 나는 문자 한 통을 보냈다.
-전반전 잘 봤습니다. 후반전도 힘내주세요.
곽찬구 감독에게 보내는 짧은 메시지. 그런데 답장이 생각보다 빨리 왔다.
-기대해 주십시오.
“좋아. 기대가 되네.”
나는 흐뭇한 얼굴로 다가올 후반전을 기대했다.
* * *
후반전에 들어서면서 경기는 더욱 무르익었다.
『제주와 고양이 동시에 교체를 시도합니다. 아무래도 전술적인 변화를 주려는 모양인데요.』
양 팀 모두 교체 카드를 한 장씩 쓴 가운데, 고양은 사무엘이 빠지고 박요한이 투입됐다.
『사무엘이 빠지고 박요한 선수가 나왔다는 건, 제로톱으로 가겠다는 건가요? 잠깐 지켜보겠습니다.』
『정통적인 스트라이커인 사무엘이 빠졌습니다! 박요한 선수는 측면 포워드로 활동해도 정통적인 스트라이커는 아닌데요.』
『아, 지금 보니까 제로톱 맞네요. 이거, 후반전에 곽찬구 감독이 비장의 카드를 꺼내든 거네요.』
포메이션은 ‘4-3-3’이지만 제로톱을 기반으로 하는 ‘변형’ 4-3-3이었다.
제로톱에서 가장 중요한 가짜 공격수(펄스나인)의 역할로 박형우가 맡았다.
전반과 달리 박형우는 좀 더 적극적으로 중앙과 최전방을 넘나들며 팀 연계의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금방 결과로 드러났다.
『박형우가 뒷공간으로 정확하게 패스를 찔러넣습니다! 라인브레이커 박요한이 공을 잡고 달립니다! 교체로 들어온 박요한! 상당히 빠릅니다!』
『이야! 찬슨데요!』
『박요한 슈우우웃! 하지만 아깝게 조견우 골키퍼 손에 걸리고 맙니다.』
『이야~ 곽찬구 감독이 제로톱으로 변화를 주면서 고양의 공격이 전반전보다 더 다이나믹하게 바뀌었네요!』
고양이 후반 시작부터 경기를 주도해 나가는 가운데, 제주FC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제주에게도 금방 기회가 왔다.
“젠장!”
제주의 온주현이 김지우가 가지고 있던 공을 교묘하게 빼앗았다.
온주현을 기점으로 제주FC가 빠르고 역동적인 패스워킹을 선보이며 순식간에 고양유나이티드 진영을 넘어섰다.
그렇게 빠르게 이어지는 패스의 끝은 최전방 장지원까지 이어지게 됐다.
“지원아!”
“좋았어!”
장지원은 견제하는 라시모프를 등 뒤에 두고 버텨냈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슈팅까지 만들어냈다.
팡!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 공이 고양 유나이티드의 수비벽을 뚫고 골문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