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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막내 구단주-38화 (38/272)

38화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석 회장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그런 나를 말없이 바라봤다.

한순간 정적이 휩싸인 가운데, 나는 조용히 호흡을 고른 뒤 대답했다.

“맞습니다.”

굳이 부정할 것도 없었다.

순순히 사실을 인정하자 석 회장이 술잔을 쥐며 말했다.

“한잔하지.”

“네.”

또다시 목구멍으로 술이 들어간다.

벌써 몇 잔째인지 모르겠다.

석 회장은 술을 굉장히 잘 마셨다.

사업가들이 술을 잘하는 경우가 많은데, 석 회장은 거의 말술에 가까웠다.

그렇게 술을 비워낸 후, 석 회장이 입을 열었다.

“옛날에 말이야. 나와 종윤 형님은 꽤 각별한 사이였어.”

“그러셨습니까?”

“그래. 젊었을 적에 처음 나간 재벌가 사교계 자리에서 만났는데, 그때 처음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가 꽤 대화가 잘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됐지.”

“그랬군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종윤 형님이 영신 그룹의 회장이 되고, 나도 비슷한 시기에 대한 그룹의 총수가 되었지.”

갑자기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석 회장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그러던 중, 생각지도 못한 말이 석 회장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자네 큰형인 지태완하고 우리 대한그룹하고 혼담을 추진했던 일. 기억하고 있나?”

“음. 그때 저는 자리에 없어서 잘 모릅니다.”

“그렇구먼. 그러면 왜 지태완이하고 우리 유정이의 혼담이 왜 깨졌는지도 모르겠구먼.”

석 회장의 딸 이름이 석유정인가 보다.

사실 궁금하긴 했다.

큰형의 혼담이 왜 깨졌는지.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고 하더군.”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고?

“형이 정말 그렇게 얘기했습니까?”

내가 놀라서 되묻자 석 회장은 씁쓸한 표정을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창 혼담이 진행되는 중에 돌연 그렇게 말하고 함께 할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통보하더군.”

“허어.”

나는 기가 막혔다.

그렇게 야망이 컸던 형이 순정남이라니.

아니, 뭔가 형하고 맞지 않은 이유라서 납득이 되지 않았다.

“우리가 영신 그룹에 비해서 끗발이 조금 밀린다고 해도, 대한 그룹이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아니라고 생각했네.”

“화가 많이 나셨군요.”

“그렇지. 사실 지금도 화가 나. 하지만 나보다 더 분노하고 슬퍼하는 이가 있어서 참는 거지.”

“더 분노하고 슬픈 이라니. 그 사람은 누구인가요?”

석 회장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우리 딸. 유정이.”

“……!”

“유정이가 지태완, 그놈을 많이 좋아했어. 그랬는데 혼담이 어그러지면서 모두 뒤틀려버렸지.”

혼담이 취소된 이후 석유정은 정신적인 충격을 크게 받았다고 한다.

“후우. 우리 유정이가 여태껏 얻는 경험은 많이 했어도 잃은 경험은 많이 하지를 못했어.”

“…….”

“어떻게 보면 내 잘못이지.”

씁쓸해하는 석 회장의 모습을 보며 나는 주제를 돌려야 할 필요를 느꼈다.

“회장님. 그건 그렇고 망ㅎ… 아니, 큰형이 좋아한다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하마터면 망할 놈이라고 할뻔했다.

“그건 나도 모르네.”

“으음.”

조금 아쉽다.

큰형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안다면 향후 형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뭐, 형이 누구를 좋아하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지.’

나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영신 그룹의 총수가 되는 것.

형을 밀어내고 총수에 올라야 한다.

“내가 봤을 때, 자네가 형보다 능력이 있어 보여.”

“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이가 별로 안 좋아 보이기도 하고.”

“…….”

“앞으로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하게. 내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성심껏 도와주지.”

석 회장의 말에 나는 반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한 마음을 가졌다.

“회장님. 이렇게까지 저를 도와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태완, 그놈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래.”

“혹 혼담 일 때문에…….”

석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꼭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야. 지태완이 그놈을 보면 느껴지는 것들이 있어. 뭔가 뱃속에 능구렁이를 잔뜩 숨겨 놓은 것 같아서 꺼림칙하거든. 그런 사람들이 아주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경우도 많고 말이야.”

“그렇군요.”

역시 대기업 총수의 안목은 평범하지 않은 모양이다.

석 회장은 지태완이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총수로서 사적인 감정은 최대한 제거해야 하지만, 그 녀석은 여러모로 나를 자극하게 만들었어.”

“또 다른 이유가 있나요?”

“작년에 영신전자가 북유럽 진출에 성공했다지?”

“아, 네.”

작년에 지태완이 주도해서 만든 TF팀이 북유럽 진출에서 성공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그 결과 지태완이 영신전자 사장으로 승진했었다.

“그때 영신전자하고 경쟁하던 태성전자의 사장이 내 사위 되는 사람일세.”

“아!”

“그런데 영신전자에 밀려 북유럽 판로 경쟁에서 실패하는 바람에 사위가 차기 회장 경쟁에서 뒤로 밀려버렸어.”

“으음.”

“어쨌든 복합적인 이유들이 있어서 나는 그놈이 잘 되는 꼴을 볼 수가 없어.”

잘 됐다.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석 회장은 온전히 나의 편이 되었다.

향후 그룹 총수 경쟁에 있어 내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회장님. 걱정 마십시오. 제가 회장님 대신 화끈하게 한 방 먹이겠습니다.”

“하하하! 부디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지!”

그날 우리는 늦게까지 술잔이 이어졌다.

* * *

“어흐, 죽겠다.”

숙취가 있었다.

아무리 좋은 술과 음식을 먹는다 해도 선을 넘으면 고생하는 법이다.

가까스로 침대에 일어난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방 밖으로 나갔다.

“어제 내가 어떻게 들어왔…… 어?”

밖으로 나오니 부엌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김 비서?”

“아, 일어나셨어요?”

앞치마를 두른 김 비서가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마침 잘 일어나셨어요. 해장하시라고 북엇국 끓여놨어요.”

“어, 음. 고마워. 근데 내가 어제 어떻게 들어왔지?”

“술에 찌든 도련님에게서 전화가 왔었죠. 그래서 어제 제가 집까지 모셔다 드렸는데 혹시 기억 안 나세요?”

“어? 그랬어?”

이런.

너무 많이 마셔서 기억이 흐릿하다.

“기억 안 나세요?”

묘한 표정으로 기억 안냐나고 묻는 김 비서의 말에 나는 미안한 표정을 드러냈다.

“미안. 솔직히 기억이 잘 안 나. 내가 괜히 민폐를 저질렀네.”

그렇게 말을 꺼내는 순간, 아주 순간적이지만 김 비서의 눈에 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미처 못 보고 지나칠 만한 아주 작은 틈이었다.

순간 내가 어제 기억 못 할 큰 실수를 한 게 아닌가 싶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김 비서. 혹시 어제 내가 실수한 거 있었어? 그랬다면 정말 미안해.”

“아니요. 잘못하신 거 없어요. 앉으세요. 해장하셔야죠.”

“어? 으, 응.”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초조한 마음을 안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곧 김 비서가 차려준 북엇국과 밥을 먹었다.

“맛있어!”

“입맛에 맞으시니 다행이네요.”

“김 비서는 못 하는 게 없어. 일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고.”

“후후.”

칭찬을 남발하자 그제야 김 비서가 작게 웃었다.

웃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조금은 안도가 됐다.

“그건 그렇고 이따가 시장님 미팅 있는 거 기억하고 계시죠?”

“아!”

“설마 잊고 계셨어요!?”

“에이, 그럴 리가. 장난 한번 쳐 본 거야.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도련님!”

“미안.”

도끼눈이 된 김 비서를 보며 나는 ‘아, 또 실수했구나.’ 생각하며 조용히 밥을 먹었다.

* * *

“만나서 반갑습니다. 고양 유나이티드 지태훈 대표입니다.”

“고양특례시장 최무진입니다. 반갑습니다.”

올해 52세가 되는 최무진 고양특례시장은 남자답게 생긴 인물이었다. 전체적으로 선이 굵었고, 키도 크고 얼굴도 남성적으로 생겼다.

목소리도 크고 호탕했다.

마치 옛날 전쟁터에서 볼 것 같은 호탕한 성격을 지닌 전사를 보는 것 같았다.

업무 추진력도 좋고, 지역 친화적인 정책을 많이 펼쳐서 시민들에게 상당히 인기 있는 시장이기도 했다.

그 결과 지난번에 이어 시장선거 재선에 성공하면서 2기 체제를 이어가 되었다.

고양시를 지역연고로 하고 있는 우리 팀은 고양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작년에 부임했을 때만 해도 여러모로 일정들이 빡빡해서 시장과 만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가 오늘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최근 고양 유나이티드가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하. 저희가 여러모로 주목을 좀 받고 있죠.”

“영입도 상당히 많이 하셨던데, 올해는 승격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그렇게 하기 위해 저희가 투자하고 있는 겁니다.”

“오오!”

최무진의 얼굴이 환해졌다.

“저는 고양시에서만 30년 이상을 거주했습니다. 이제 이곳이 저한테는 고향 같은 곳이죠.”

“시장님의 명성은 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30대에 주민자치를 시작해서 현재 고양특례시장까지 된 전천후 인물이시라고.”

“아이고, 전천후는 무슨. 그저 운이 좋았습니다. 주변에서도 도움 많이 받았고요.”

“하하하. 시장님께서는 상당히 겸손하시군요.”

“하하. 어쨌든 저도 그렇고, 저희 가족도 오랜 시간 고양유나이티드를 응원해 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축구를 많이 좋아하거든요.”

“오, 그렇습니까?”

“네. 진즉에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그동안 일이 좀 많았었네요. 그 점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아, 괜찮습니다. 이렇게 신경 써주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젊은 대표님께서 겸손하시네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서로에게 금칠해주는 시간을 잠깐 가진 후, 우리는 본론을 꺼냈다.

“대표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저희가 도울 일들이 있겠습니까?”

“아아. 저희가 차기 시즌을 앞두고 연고지 팬들을 위한 지역 친화적인 이벤트를 다채롭게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오, 그렇군요.”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 옆에 있는 천지원 부장이 설명해줄 겁니다.”

함께 동석했던 천지원 부장이 뒤늦게 최무진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마케팅 부서 팀장을 맡고 있는 천지원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소개한 뒤 최무진에게 명함을 건넸다.

명함을 받은 최무진은 눈을 빛냈다.

“어떤 이벤트들을 준비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좀 들어볼까요?”

“네, 저희가 이번에 준비하고 있는 이벤트 중에 ‘레전드’라는 이벤트가 있습니다.”

“레전드?”

“네. 과거 저희 구단에서 활약해준 선수 또는 직원분들을 초청해서 팬들과 함께 경기 관람하는 이벤트입니다. 팬들은 경기 전후로 초대된 레전드들과 사진 촬영 또는 사인회를 가지게 될 거고요.”

“오, 그렇군요.”

“또한 기념 유니폼과 머플러 같은 굿즈들이 함께 제작되어 수익 창출 효과도 함께 노려볼 예정이고요.”

“오. 괜찮은 이벤트인 것 같네요. 그런데 이 이벤트가 저희하고 어떻게 연계가 되는지요?”

의문을 갖는 최무진을 향해 천지원 부장이 가볍게 미소를 머금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레전드 이벤트를 기획하면서 나온 이야기 중 하나가 ‘명예의 전당’이 있었습니다.”

“명예의 전당?”

“네. 해외 유명 클럽들은 이미 도입한 아카이브 시스템입니다. 그간 구단을 위해 활약해준 모든 이들을 위한 기록의 공간이죠.”

“오, 그렇군요.”

“그런데 이 공간을 짓기 위해서 추가 부지가 필요한데, 시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아.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 부분은 저희 도시정책과 쪽에서 돕도록 조치 취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대화는 좋게 마무리되어 갔다.

그런 좋은 분위기 속에서 최무진을 향해 말을 걸었다.

“시장님.”

“네?”

“혹시 홈 개막전 때 시축 행사 참여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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