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새로운 시즌 준비로 인해 구단이 정신없이 바쁜 가운데 기다렸던 소식 하나가 들려왔다.
“대표님! 일정표 떴습니다!”
“오! 드디어 떴군!”
차기 시즌에 대장정에 오를 K리그 클럽들의 대장정을 알리는 새로운 일정표가 떴다.
보통 정식 발표는 하루 뒤에 하는 편이다. 다만 프로축구연맹에서 미리 구단들에게 사전 메일을 보내어 일정을 먼저 알려줬다.
“어디 보자~ 우리 팀 개막전 상대는 누구냐~?”
연맹에서 보내준 일정표를 확인해 본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우야. 개막전부터 너무 빡센 상대 아냐?”
“도련님, 왜 그러세요?”
“이거 봐봐.”
의아해하는 김 비서에게 일정표를 넘겼다. 일정표를 확인한 그녀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주?”
작년 K리그1에서 강등당했던 제주와 시작부터 원정 경기를 치르게 됐다.
“하필 원정이야.”
“도련님, 제주라면 비록 강등되긴 했어도 1부 리그 클럽 아니에요?”
“맞아. 이번에 재승격하려고 보강 많이 했더라.”
제주는 기업구단이다.
모기업인 ㈜선경오일은 우리나라에 기름을 유통하는 회사다.
과거 ㈜선경오일 회장은 축구와 야구 가리지 않고 투자를 진행했는데, 회장이 바뀐 이후 최근 몇 년 동안 스포츠 쪽에 투자 규모를 줄여왔었다.
그러다가 작년에 팀이 강등당하는 충격을 받은 ㈜선경오일은 구단에 재투자를 시작했다.
그 결과 기존 선수들을 대거 정리하고 새로운 선수들을 영입했다.
영입한 선수 목록만 따지면 우리 못지않게 좋은 선수들을 영입했다.
우리도 내부 회의에서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제주를 꼽았다.
“1~2위까지 1부 리그 승격 티켓을 주지만, 우리 팀이 2위로 올라갈 생각은 없어.”
“맞아요. 감독님하고 선수들 모두 우승에 대한 열망이 커요.”
스페인 전지훈련 이후 선수단은 정신적으로 많은 성장을 이루어냈다.
그들은 반드시 우승하고 싶다는 열의로 가득 찼다.
구단주 입장에서 이러한 선수들의 열망을 보기 좋다.
“주요 경기 일정들을 살펴보면, 3월에 FA컵 2라운드가 있네.”
FA컵.
대한축구협회에서 주관하는 컵대회로, 리그 못지않게 굉장히 중요한 대회다.
이 경기에서 우승한 클럽에게는 아시아챔피언스리그 본선 진출 티켓이 주어진다.
K리그2에 속한 우리는 2라운드부터 참여하게 되는데, 1라운드 성동구FC와 제노스FC의 승자와 맞붙게 된다.
두 팀 모두 K5에 속한 팀들이다.
“김 비서. 우리 팀이 지난번에는 광탈했지?”
“네. 부끄럽게도 2라운드에서 탈락했죠.”
“작년에 누구하고 붙었어?”
“음, 찾아보니까 양주FC네요.”
“그렇군. 이번에는 성동구FC하고 제노스FC 승자 중 한 팀하고 붙는데, 설마 지지 않겠지?”
“지길 바라세요?”
“그럴 리가. 지면 선수들한테 축구 그만두라고 해야지.”
“정말 그렇게 말씀하실 거예요?”
“……김 비서, 나는 농담도 못 해?”
“후후. 농담이에요.”
일정표를 쭉 확인하고 있는데 누군가 대표실로 들어왔다.
“대표님.”
“어? 곽 감독님. 이 시간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훈련은 끝났습니까?”
“아~ 오늘 훈련은 끝났죠. 그나저나 일정표 나왔다면서요?”
“네. 안 그래도 일정표 보고 있었습니다. 한 번 보시겠습니까?”
곽찬구 감독은 내게서 일정표를 받고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정표를 쭉 보던 그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꽤 재미난 일정이군요.”
“그래요?”
“네. 우승하기에 좋은 아주 적절한 일정표입니다.”
자신감 넘치는 곽찬구 감독의 모습에 나는 믿음과 신뢰를 느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우려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1라운드가 제주 원정입니다. 부담되지 않으십니까?”
“제주가 올해 강력한 우승 후보라고 얘기들 하던데, 이런 팀하고 나중에 붙는 것보다 초장부터 화끈하게 붙어서 기선 제압하는 게 좋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어차피 1라운드 경기는 극초반 경기입니다. 선수들도 전체적으로 폼이 덜 올라온 시기이다 보니 뭔가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대신 우리가 앞으로 보여줄 게 이런 거다, 정도만 보여주면 성과가 있는 거죠.”
“호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원정입니다. 일반적인 상황이 아닌 개막전 경기 같은 경우에는 경기장에서 원정팀보다 홈팀이 더 부담을 느낍니다. 홈팀 팬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못난 모습 보이면 안 되거든요.”
“그렇네요. 게다가 상대는 강력한 우승 후보 팀이고, 재승격을 노리는 팀이니 수많은 관심을 받으니 부담은 더 클 수밖에 없겠군요.”
“그렇죠. 이해가 빠르시네요.”
곽찬구 감독의 말을 들으니 우리가 딱히 손해 볼 것은 없어 보였다.
“선수들은 좀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이대로만 간다면 모두 무리 없이 시즌을 치를 수 있을 겁니다.”
곽찬구 감독의 말에는 자신감 넘쳤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동안 나와 함께하면서 무언가가 그를 자신감 있게 만든 것은 분명했다.
그런 자신감이 팀 전체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될지는 앞으로 지켜봐야겠지만.
어쨌든 지금 같은 모습을 보여서 나쁠 것은 없다.
“그러고 보니 K리그2 미디어데이도 곧 다가오겠네요.”
“네, 일정표가 나왔으니 이제 미디어데이도 진행하겠죠.”
시즌 전에 각 리그별로 감독들과 대표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진행하는 미디어데이.
K리그 팬들이라면 놓칠 수 없는 자리이기도 했다.
“대표 선수로 누구를 데려가실 생각이십니까?”
아직 우리 팀은 공식적으로 주장을 발표하지 않았다.
프리시즌 기간 동안 김지우가 주장 완장을 차기는 했지만, 곽찬구 감독은 훈련을 좀 더 지켜본 다음에 결정하겠다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아마 큰 이변이 없는 한 김지우 선수가 가겠죠.”
그렇게 말하는 곽찬구 감독의 얼굴에는 고민이 깃들어 있었다.
“무슨 고민 있으십니까?”
“음. 고양이라는 팀 입장에서 본다면 김지우 선수를 데려가는 게 맞기는 한데, 선수 개인 영향력으로 따지면 박형우 선수를 데려가는 게 좋기도 하고…….”
“아아.”
“혹시 대표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디어데이 때 데리고 나갈 선수를 고르는 것은 감독의 일이다.
내가 지정해줄 수 있는 권한은 없다.
다만, 고민하는 감독을 위해 조언 정도는 가능하겠지.
“두 선수 중 누구를 데려가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확실하게 주목을 받기 원하신다면 박형우 선수를 데려가는 게 맞겠죠?”
“…….”
“감독님께서 다가올 시즌에 추구하시는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야 팀의 우승과 승격…….”
“그렇겠죠. 하지만 그런 목표를 갖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건…… 아!”
곽찬구 감독은 무언가 깨달은 듯 손뼉을 쳤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씩 웃었다.
“감독님 개인의 부활을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우리 팀 감독을 맡게 된 결정적인 계기.
그것은 바로 파주FC의 비열한 행위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1부로 올라가서 파주와 만나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그가 시원하게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법적인 조치를 취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리고, 증거 또한 찾기 어렵다.
그래서 축구로 복수할 수밖에 없다.
“축구를 잘해서 좋은 결과 내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요즘 세상에 퍼포먼스로 이슈를 끄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제야 곽찬구 감독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알겠습니다. 그럼 미디어데이 때 형우를 데려가겠습니다.”
“네. 그럼 기대하겠습니다.”
“물론입니다.”
* * *
청담동에 위치한 어느 고급 한식당.
“데려다줘서 고마워.”
“대기하고 있을까요?”
“아니야. 김 비서는 퇴근해.”
“돌아올 때 어떻게 하시게요?”
“택시 타면 되지.”
“음.”
“김 비서, 괜히 걱정하지 말고 이만 퇴근해. 대표이사의 명령이야.”
“음, 명령이면 어쩔 수 없죠.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응. 내일 봐.”
김 비서가 탄 차가 떠나고 나는 옷매무새를 정비하고 천천히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정장을 입은 매니저가 나타났다.
“예약하셨습니까?”
“음. 석정원 회장님으로 되어 있을 겁니다.”
“석 회장님 손님이셨군요. 이쪽으로.”
나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식당 안쪽으로 향했다.
수많은 방을 지나쳐 가장 안쪽에 있는 방 앞까지 도착한 직원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회장님. 손님분 오셨습니다.”
“아, 들어오라 하세요.”
곧 문이 열리고 방 안에는 석 회장이 홀로 앉아 있었다.
나는 석 회장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오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감사는 무슨. 앉아요, 앉아.”
나는 석 회장 맞은편에 앉았다.
이미 우리 사이에는 온갖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는 상태였다.
석 회장은 곁에 놓여 있는 술을 슥 보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
“우리 지 대표께서 술을 하시나?”
“아, 술은 없어서 못 먹습니다…… 아, 지금은 일부러 잘 안 먹는 편이고요.”
그 말에 석 회장이 허허 웃어보였다.
“과거 영신 그룹 망나니로 유명하던데 소문이 많이 틀린 것 같군.”
“음. 소문은 사실입니다. 다만…… 바뀌려고 하고 있죠.”
“호오.”
석 회장의 눈이 빛났다.
그러더니 그는 술 마개를 따고 내게 한 잔 따라주며 말했다.
“내가 오늘 지 대표를 보자 한 이유는 별거 없습니다. 언제 한 번 같이 밥이나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불렀죠.”
나는 공손한 자세로 석 회장이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그리고 곧 잔이 채워진 뒤 이번에는 내가 술병을 들고 석 회장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석 회장님과 이런 시간을 가져서 너무 좋습니다.”
“그래요? 내가 바쁜데 불러낸 건 아니고?”
“그럴 리가요. 바쁘긴 해도, 석 회장님과 만날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쁘진 않습니다.”
“허허허. 거, 참 말을 잘 예쁘게 하는구먼.”
“칭찬 감사합니다.”
“그래, 지난번 천산 그룹 회장님 생신 자리에서는 제대로 대화를 못 나누긴 했는데…… 회장님은 잘 계시고?”
“네, 정정하십니다.”
“허허. 그렇구만. 종윤 형님이 젊었을 적에도 꽤 당찬 분이셨는데, 요즘 지 대표를 보면 옛날 형님 생각이 납니다.”
“그렇습니까?”
“그래요. 아, 일단 한잔하죠. 자.”
고급스러운 도자기 잔이 가볍게 부딪쳤다.
그러고는 술을 단번에 들이켜 잔을 비워냈다.
목에서 살짝 뜨거움이 밀려왔지만 곧 청량함으로 바뀌었다.
“어으. 술 좋네요. 이 술은 뭔가요?”
“허허허, 로얄 안동 소주 21년산입니다. 입에 맞는 것 같아 다행이군요.”
“엥? 안동 소주도 21년산이 있습니까?”
“아~ 몰랐나 보군요. 양주만 21년산이 있는 게 아닙니다. 잘 찾아보면 우리나라 전통술도 다양하게 있죠.”
“오, 회장님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알고 갑니다.”
“뭐, 내가 안동 출신인 점도 한몫하고 말이죠.”
“엇? 안동 출신이셨습니까?”
“몰랐습니까? 이거 실망인데요. 지 대표.”
“죄송합니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나는 석 회장과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우리 모두 술이 얼큰하게 들어가며 취기가 올랐다.
“지 대표. 이제는 내가 말을 놔도 괜찮겠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언제쯤 편하게 대해주실까 궁금했었습니다.”
“하하하! 그래, 좋아. 그럼 이제부터 내 편하게 대하도록 하지.”
석 회장은 시종일관 즐거운 기색을 보였다.
그런 석 회장을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분위기가 점점 익어가고 있는데, 석 회장이 갑자기 목소리를 깔았다.
“지 대표.”
“네. 회장님.”
“자네 목표가 어디까지인가?”
“네?”
“오해하지 말고 듣게. 내 자네 뒷조사를 좀 했어.”
“……!”
뒷조사를 했다는 말에 순간 술이 확 깼다.
그러거나 말거나 석 회장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뒷조사를 해보니 완전히 사람이 달라졌더군. 하룻밤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나 싶을 정도야.”
“음.”
“자네가 구단 대표이사에 취임한 이후 행적들을 보니까, 이거, 이거 보통내기가 아니더군.”
석 회장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씩 웃었다.
그러더니 가슴을 철렁이게 하는 한마디를 던졌다.
“자네 목표가 혹시 영신 그룹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