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막내 구단주-35화 (35/272)

35화

“옷 좀 제대로 입으세요.”

김 비서가 내 옷매무새를 정돈해주었다. 나는 머쓱한 표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김 비서. 굳이 여기까지 따라올 필요 없는데.”

“도련님이 가는 곳에 비서가 따라가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으음. 평소라면 맞는 말인데, 오늘은 휴일이라고.”

“쓰읍!”

“…….”

나는 김 비서와 함께 천산그룹 회장의 생신 파티에 참여했다.

“회장님께서 도련님을 좋게 평가하고 계신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저희 아빠, 아니, 아버지께서 그러셨어요. 원래 이번 천산 그룹 회장님의 생신에 지태완 사장이 참여하려고 했는데, 회장님의 명령으로 도련님께서 가시게 되었다고요.”

“……뭐?”

김 비서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분명 아버지는 큰형이 바쁘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영신그룹 내부에서 도련님에 대한 반응도 상승세인 모양이에요.”

“그래?”

“네. 도련님께서 최근 보여준 행보가 영신 그룹 내부에서도 꽤 좋은 반응을 얻은 모양이더라구요.”

“기분 좋네.”

“네. 기분 좋은 일이죠. 옷매무새 정돈도 끝났고, 이제 올라가죠.”

“어.”

나와 김 비서는 함께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이미 수많은 사람이 파티 장소에 모여 있었다.

그 광경을 본 나는 당황스러웠다.

“음, 대기업 회장급들만 모인다고 하지 않았어?”

회장단 모임치고 상당히 많은 인원이 모여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 비서만큼은 당황하지 않고 설명했다.

“평소라면 회장급만 모이겠지만, 이번에는 다르죠. 무려 그룹 회장의 생신날이니까요.”

“음.”

“천산 그룹은 후계자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기업 중 하나입니다. 저희 그룹 회장님과 같은 세대 분인 백우진 회장도 올해 75세가 되었으니, 슬슬 은퇴할 때도 되었죠.”

“흐음, 그래서 이렇게들 많이 모여 있었구먼.”

천산 그룹 회장이 슬슬 은퇴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은 공공연하게 돌고 있었다.

아직 후계자 싸움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백 회장의 마음에 들려면, 이런 생신날에 빠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이게 누구신가! 우리 친구 아니야?”

“백태현.”

마치 본인이 월드스타 연예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등장한 백태현을 본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그와 악수를 나눴다.

“어떻게 잘 지내고 있냐?”

악수를 나눈 후 이어지는 내 물음에 백태현은 상당히 기쁜 기색을 드러내며 답했다.

“물론이지! 이게 전부 나의 친구, 지태훈 대표이사님 덕분이지!”

“너 아직 본부장 못 달지 않았냐?”

“놉! 그런 나약한 자리에 이 몸이 앉을 것 같아?”

“……?”

그는 검지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어 보인 뒤 머리를 길게 쓸어넘겼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 몸이 이번에 사장이 된다, 이말이야!”

“어? 정말?”

“정말이고 말고. 내가 어찌 지 대표 앞에서 구라를 치겠어.”

“……곧 사장된다는 놈이 구라가 뭐냐, 구라가.”

“어쨌든!”

얘기를 들어보니, 이제야 백태현이 경쟁 업체였던 제약 회사를 인수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본래 회사를 인수하는 일은 오래 걸렸다. 중간에 거쳐야 하는 과정도 많았다.

그러한 것들은 감안한다고 해도 인수 속도가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아버지가 내 공을 인정하고 이번에 사장으로 임명해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어쨌든 잘됐다. 축하한다.”

비록 나와 같은 망나니이기는 해도, 그래도 친구였다. 친구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오니 나도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그러자 백태현도 상당히 들뜨며 좋아했다.

“어쨌든 우리 지 대표하고 했던 약속, 잊지 않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라구.”

“흠, 조만간 100억이 통장에 찍히는 걸 볼 수 있는 거냐?”

“물론이지. 100억뿐이야? 필요한 거 있으면 더 얘기해!”

나는 혹시나 백태현이 약속을 잊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그건 괜한 걱정이었다.

잘됐다.

호의적으로 나오는 백태현은 나한테도 긍정적인 결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형을 무너뜨리려면 나에게도 든든한 우군이 필요하다.

조금 불안하기는 해도 백태현 같은 인물도 아군으로 필요했다.

“조만간에 밥이나 먹자.”

“오, 그러자고.”

나는 백태현과 이야기를 마친 후, 오늘 이 모임의 주인공을 만나러 이동했다.

수많은 사람을 지나쳐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나이 든 노인을 볼 수 있었다.

그 노인이 바로 현(現) 천산 그룹의 회장 백우진이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음? 너 설마 지가 놈의 막내아들이냐?”

“오, 맞습니다. 저 기억해주셨군요?”

“네 녀석을 기억 못 하면 내가 치매 걸린 거나 마찬가지 아니겠냐.”

백우진 회장의 말에 어이 없어 하는 사이, 옆에 있던 김 비서가 공손한 태도로 회장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음? 너는…… 진철이 딸 맞제?”

“네. 맞습니다. 저도 기억해 주시네요.”

“기억하고말고. 네 옆에 있는 망나니만큼 유명하지 않느냐.”

그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김 비서는 조용히 웃었다.

“햐, 진철이 그놈이 딸은 제대로 뒀어. 혹시 애인 있나?”

“아직 없습니다. 회장님.”

“그래? 하, 이거 참.”

백우진 회장은 안타깝다는 혀를 차며 말했다.

“내 맘 같아서 우리 태현이라도 소개시켜 주고 싶은데, 아무리 내 자식이라도 그 녀석은 너하고 안 어울린다.”

“호호.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그래. 그래. 어쨌든 잘 왔다. 뭐, 느그 회장이 시켜서 온 거긴 해도 여기가 나름대로 꽤 괜찮은 장소가 될 게다.”

괜찮은 장소라…….

나는 회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장소에는 천산 그룹 관계자뿐만이 아니라 타 그룹에 속해 있는 재벌가 인물들도 상당수 와 있는 상태였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꿈도 못 꿔볼 그런 장소인 셈이다.

단순한 한 마디도 고급 정보가 되는 이곳은 후계자 싸움을 하는 이들에게도 꽤 중요한 장소인 것이다.

‘콜로세움 같은 곳이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백우진 회장이 내게 말을 걸었다.

“지가 놈의 막내 녀석아.”

“네?”

“느그 회장은 잘 지내고 있더냐?”

“아, 꽤 정정하십니다.”

“그런가.”

순간 백우진 회장의 두 눈에서 씁쓸함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세월이 참 무심하군.”

아버지로부터 들은 얘기에 의하면, 백우진 회장과 아버지는 과거 같은 초, 중, 고등학교를 나온 동문 사이라고 했다.

백우진 회장보다 4살 어린 아버지가 후배이긴 해도, 두 사람은 꽤 교류가 많았다고 했다.

제법 말도 잘 통하는 사이였고, 젊은 시절 함께 서로 많이 돕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백우진 회장이 한 번 쓰러진 이후 두 사람의 만남은 점점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지가 놈이 자식은 잘 키웠어. 나하고는 다르구만.”

“네?”

“됐다. 돌아가거든 느그 회장에게 안부나 잘 전해주거라.”

“음, 확실하게 전달하겠습니다.”

“그래.”

그 말을 끝으로 백우진 회장과의 대화는 끝났다.

* * *

식사는 뷔페로 되어 있었다.

뷔페 퀄리티는 상당히 좋았다.

하얀 접시에 음식들을 하나씩 담고 있는데 어디선가 강렬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애써 그 시선들을 무시하고 자리로 향했다.

마침 김 비서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탁.

김 비서 맞은편에 접시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은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김 비서, 우리 꽤 주목받는 거 같지?”

“새삼스럽게 왜 그러세요. 경기장에서 유니폼에 각종 굿즈를 손에 쥐는 일에는 아무렇지 않으시면서.”

“아, 그거하고 이거는 좀 달라. 경기장은 차라리 마음이 편해.”

“후후.”

작게 웃는 김 비서를 보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이내 접시에 담긴 음식 하나를 집어먹었다.

그렇게 음식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 사람, 그 영신 그룹 망나니 맞지?”

“어, 맞네. 맞네.”

“그런데 소문치고 꽤 멀쩡하게 생겼는데?”

“야야, 여기서 겉으로는 멀쩡하고 속은 시꺼먼 놈들이 한둘이냐?”

“영신 그룹이 저 망나니 녀석 뒤치다꺼리하느라 고생 꽤 했다던데.”

다 들린다.

다 들린다고 이것들아.

워낙 과거에 화려한 이력이 있다 보니 이런 뒷담화가 오고 가는 것도 이해가 됐다.

다만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긴 했다. 회귀 이후 망나니짓은 그만두고 착실하게 잘 살아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변 반응도 그리 나쁘지 않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변화가 없었다.

“이래서 나오고 싶지 않…… 응?”

화르륵.

내 앞에 무언가가 불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김 비서가 불타고 있었다.

당장 두 눈에서 레이저를 쏠 것 같은 눈빛을 보자 가슴이 철렁했다.

“기, 김 비서?”

“…….”

“저, 김 비서님?”

“……네?”

“저, 그, 음. 아니야. 아무것도. 음식 괜찮은지 궁금해서.”

“아, 네. 괜찮습니다. 맛있네요.”

말로는 맛있다고 하면서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인다.

가시방석 같은 상황 때문에 나도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억지로 접시를 비워가던 중, 내 곁으로 어떤 인물이 다가왔다.

“지 대표. 여기서 보는군요.”

“음, 누구…… 헉, 회장님?”

음식을 먹다가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내가 아는 인물이 서 있었다.

바로 석정원 회장이었다.

한국 프로축구연맹 회장이자 현 대한그룹 총수인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일어나서 그와 악수를 나눴다.

“회장님 여기서 다 뵙네요!”

“아아, 내가 식사하는데 방해한 모양이군요.”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석 회장은 나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 지난번에 가변석 설치는 어떻게 잘 됐습니까?”

“넵. 다가오는 차기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가변석을 운영할 예정입니다.”

“오, 그거 잘 됐군요.”

그때 또다시 따끔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나와 석 회장이 대화를 나누는 광경을 본 사람들이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석 회장도 그런 주변을 의식했는지 조금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내 저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 지 대표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네? 아, 넵. 감사합니다.”

“최근 지 대표가 보여준 행보 덕분에 우리 한국 축구가 다시 한 번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 같아서 말이죠. 프로축구회장의 입장에서 아주 기분 좋습니다.”

석 회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나는 머쓱한 기분을 느꼈다.

“딱히 제가 뭘 했다고…….”

“하하! 한 게 없다니! 그 무슨 말을! 지 대표가 한 게 없다면, 다른 k리그 구단주들은 놀고 있는 거지!”

“…….”

“어쨌든 조만간에 연락 한 번 하겠습니다.”

“네, 저는 회장님 연락이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그래요?”

늘 근엄하고 딱딱한 표정을 하던 석 회장이 오늘따라 상당히 부드러워 보였다.

뭘까.

나는 석 회장이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지난 2번의 만남 이후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니 내 입장에서는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석 회장의 신임을 얻어서 나쁠 건 없었다.

오히려 좋은 일이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수고해요.”

“넵.”

그렇게 석 회장이 내 곁을 떠나고, 김 비서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석 회장님의 신임은 확실하게 얻은 모양이네요.”

“어? 어어.”

“역시 도련님은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어요.”

“음.”

뿌듯해하는 김 비서의 얼굴을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