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빡!
“아악!”
뒤통수를 부여잡은 채 쓰러진 이진수.
그 모습을 지켜본 고양 선수들은 난리가 났다.
가장 가까이 있던 라시모프가 제레미 쪽으로 뛰어가서 가슴을 밀쳤다.
그것을 시작으로 양 팀 선수들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주심이 뒤늦게 엉겨 붙은 선수들을 떼어내기 위해 휘슬을 불며 제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주심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의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우우우우-
경기장에는 팬들의 야유로 가득 찼다.
이 장면을 중계하는 중계위원들도 당혹스러워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어, 지금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는데요.』
『리플레이 화면을 다시 보겠습니다. 아, 여기서 제레미 선수가 이진수 선수의 뒤통수를 쳤네요.』
『제레미 선수가 많이 지쳐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진수 선수가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달라붙으니까 화가 났던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저러면 안 되죠.』
이 광경을 한국에서도 지켜보고 있었다.
“저 XX 뭐 하는 놈이야!”
“이런 상노무 자슥을 봤나!”
중계를 보던 고양 팬들은 TV 앞에서 극대노했다.
비단 고양 팬뿐만이 아니었다.
제레미는 한국에서도 나름 인지도있는 선수였다.
그런 선수가 갑자기 한국 선수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봤으니, 해외 축구를 좋아하는 한국 팬들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어느 정도 상황을 진정시킨 주심은 제레미와 이진수를 불러들였다.
이진수는 아직도 통증을 느끼고 있는지 손가락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고 있었고, 제레미도 불만 가득한 얼굴로 주심 앞에 섰다.
주심은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살짝 한숨을 쉬더니 곧 바지 뒷주머니 쪽으로 손을 가져다 댄 후,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아! 레드카드입니다!』
『이건 퇴장 맞죠! 퇴장, 맞습니다!』
우우우우-
제레미의 퇴장을 본 홈팬들이 또 한 번 야유를 퍼부었다.
제레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쓸쓸히 경기장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삑!
이후 경기는 주심의 휘슬과 함께 다시 재개됐다.
정규 시간은 이미 추가시간에 추가시간을 더하고 있었다.
제레미의 폭력 행위로 무려 5분 이상 경기가 지연됐기 때문이다.
선수 한 명이 부족해진 AT마드리드를 상대로 고양은 마지막 공격에 나섰다.
“요한아!”
김지우가 박요한 쪽을 겨냥하며 횡패스를 시도했다.
패스는 정확하게 뛰어들어가는 박요한의 발밑으로 향했다.
측면 쪽에서 쇄도하던 박요한은 상대 코너플레그 쪽까지 뛰어간 상태에서 상대 수비수 한 명을 앞에 둔 채 크로스를 올렸다.
팡!
궤적을 그리며 올라가는 크로스.
공은 AT마드리드 페널티 박스 안쪽으로 향했다.
페널티 박스 안쪽에는 양 팀 선수들이 맞물려 있었다.
그 틈 사이로 박형우가 펄쩍 뛰어올랐다.
뛰어오른 박형우의 몸이 뒤로 뒤집히더니 이내 낙하하는 공을 향해 정확하게 발끝을 내밀었다.
팡!
발끝에 닿은 공이 궤적을 바꾸며 골망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출렁-.
그 광경을 지켜본 모든 고양UTD의 선수와 팬, 관계자들 그리고 중계하던 중계위원들이 동시에 반응했다.
『골! 골입니다! 박형우의 환상적인 오버헤드킥이 나왔습니다!』
『아! 박형우! 대단합니다!』
『추가시간에 극적인 추가 골이 나왔습니다!』
멋지게 추가 골을 만들어낸 박형우는 무릎 슬라이딩 세리모니를 한 뒤 동료들과 기쁨을 나눴다.
삑! 삐익! 삑!
결국 이 골은 이날 경기의 결승골이 되었다.
주심의 휘슬과 함께 경기는 종료되었고, 고양UTD의 스페인 원정 프리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를 맛보며 마치게 되었다.
* * *
며칠 후, 나는 평소처럼 부장급 인사들을 모아놓고 주간 회의를 진행했다.
“AT마드리드 쪽에서 연락 왔습니까?”
“네, 대표님. 오늘 새벽에 미안하다는 내용이 담긴 공문이 왔습니다. 제레미 선수의 자필 사과문이 찍힌 사진도 같이 왔고요.”
“그렇군요. 이진수 선수도 봤나요?”
“네. 이진수 선수는 별 이야기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프리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 막판에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우리는 항의 공문을 보냈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사과했고, 추가로 우리가 줄 예정이었던 초청비를 받지 않겠다고 전달해왔다.
“그래도 프런트는 개념이 있군.”
이진수 선수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뒤통수 한 방 맞고 공짜로 아틀레티코와 맞붙은 결과를 맞이하게 됐다.
우리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다.
그렇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일은 얼추 마무리 지은 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유지원 부장님. 유니폼 쪽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네. 홈&어웨이 유니폼 시안 모두 나왔습니다. 한번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유지원 부장이 가져온 유니폼 시안이 담긴 서류를 확인했다.
시안을 꼼꼼하게 확인해본 나는 살짝 감탄했다.
“괜찮은데요?”
우리 팀 홈 유니폼은 창단 초기에 하얀색이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초엽부터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모기업인 영신 그룹이 팀을 인수할 때쯤부터 바뀐 셈이다.
그런 실상을 반영하듯 홈 유니폼은 노란색 바탕에 목 부위에 두 /겹에@겹의/ 테두리가 진 형태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웨이 유니폼은 같은 형태에 하얀색으로 맞췄다.
원래 어웨이는 하얀색이 아니었는데, 이번 신규 유니폼은 일부러 하얀색으로 바꿨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한다는 의미에서 홈은 노란색, 어웨이는 초창기에 사용하던 하얀색을 사용한 것이다.
“홈&어웨이 모두 디자인은 잘 뽑혔네요. 본격적인 출시는 언제쯤부터 진행할 수 있다고 하던가요?”
“제작은 지금 바로 시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우리 선수들이 새롭게 입을 유니폼의 모습을 떠올리며 흐뭇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런데 보고하던 유지원 부장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저, 대표님.”
“음?”
“그런데 여기에 사실 문제가 좀 있습니다.”
“문제요? 무슨 문제요?”
유니폼도 잘 뽑힌 마당에 갑자기 무슨 문제?
“‘라나 스포츠’에서 이번 계약을 끝으로 유니폼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예? 정말입니까?”
“네. 제가 직접 라나 스포츠 대표하고도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대답은 똑같았습니다.”
라나 스포츠는 오랜 시간 우리 팀의 유니폼을 비롯한 다양한 굿즈들을 제작해주던 스포츠 제작 용품 회사였다.
우리 팀을 포함한 다른 K리그 클럽들은 일반적으로 유니폼 계약을 2년 단위로 적용해서 연장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이유는 단순했다. 2년에 1번씩 바꾸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라나 스포츠는 우리하고 약 5년 정도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관계를 중단하겠다는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유니폼 제작비를 적게 주는 것도 아닌데?”
“유니폼 사업을 그만둔다고 합니다.”
“갑자기요?”
“음. 대표의 말로는 이미 5년 넘게 적자였다고 하더군요. 저희가 비용을 더 지불해도 안 되냐고 해도, 이미 마음을 굳혔다고 합니다.”
“그럼 유니폼 사업만 철수한다는 건가요? 다른 용품 사업은요?”
“용품 사업은 계속 진행한다고 합니다.”
“하아.”
정말 산 넘어 산이다.
뭐 하나가 해결했다 싶으면 계속 새로운 사건들이 터진다.
정말 대표 자리는 어렵다.
“끙. 라나 스포츠하고 기간이 아직 남아 있죠?”
“네. 내년 말까지입니다.”
“음.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우리와 교감할 수 있는 업체들을 찾아보죠.”
“네. 알겠습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프리시즌 경기 이후 고양UTD를 향한 관심이 많이 늘어났다.
하지만 이러한 관심도 지금뿐이다.
앞으로 대중의 관심을 얼마나 지속시킬 수 있을지는 우리의 몫이다.
그걸 알고 있는 선수단과 프런트 모두 구슬땀을 흘리며 다가오는 차기 시즌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바쁘게 시즌 준비를 진행 시키는 와중에 에피소드 하나가 생겼다.
“김 비서. 갑자기 새벽에 자던 사람 깨우더니 데려온 곳이 바다야?”
눈 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를 보며 어이가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김 비서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민 뒤 웃으며 말했다.
“요즘 대표님 고생하시니까 제가 준비한 깜짝 선물이에요.”
“선물이라……. 뭐, 나쁘지 않는 선물이네.”
다가오는 시즌을 준비한다고 매일 야근하는 것이 일상이다.
직원들은 퇴근하더라도 나는 늦게까지 남아서 업무를 보기 일쑤였다.
오죽하면 김 비서가 강제 퇴근시킬까.
“요즘 도련님을 보면 불안해요.”
“왜?”
“사람이 바뀌어도 너무 바뀌어서 이러다 갑자기 휙 하고 사라지면 어쩌나 싶어서요.”
“내가? 사라져?”
김 비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잔 안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나는 그런 김 비서를 보며 피식 했다.
“내가 왜 사라져.”
사라질 수 없다.
나에게는 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
“도련님. 저하고 도련님은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사이죠?”
“그렇지.”
갑자기 옛날얘기를 꺼내는 그녀가 의아해했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조용히 그녀가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어렸을 적에 도련님은 상처 가득한 강아지 같으셨어요.”
“내가 그랬어?”
“네. 상처로 얼룩져서 겉으로는 경계심이 강한 것처럼 보여도, 속은 누구보다 여리고 인정도 많았죠.”
“…….”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요즘 들어 대표님한테 자꾸 옛날 얘기들을 하게 되네요.”
“뭐, 어때. 나도 이렇게 가끔 김 비서하고 옛날 얘기하면 추억도 떠오르고, 좋은걸?”
“정말요?”
“어. 나 이런 걸로 빈말 안 해. 내 성격 알잖아.”
김 비서가 환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나저나 배고프지 않아? 밥 먹으러 가자.”
“네, 마침 저도 배가 고프던 참이었어요.”
새벽부터 일어나서 동해바다 앞까지 달려오니 배가 고프다.
다시 차로 돌아가려던 나는 멈칫했다.
“아, 맞다. 여기 오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네?”
“독도는 우리 땅!”
“…….”
“일본해 아니고 동해!”
마치 산에서 야호를 하듯 외치는 내 모습에 김 비서는 화들짝 놀랐다.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무슨 짓이에요?”
“동해바다에 오면 꼭 해야 돼. 이건 마치 이세계에 가면 김치찌개를 찾는 것과 같은 이치야.”
“가끔 도련님이 무슨 말씀하시는지 이해가 안 돼요.”
“괜찮아. 머리로 이해할 필요 없어. 그저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돼.”
“…….”
“저 바다 지나면 나오는 섬나라에서는 갑자기 이세계에서 사는 원주민이 뜬금없이 유카타 입고 사무라이 외치면서 튀어나오는데, 내가 여기서 동해하고 독도 외치는 게 뭐가 문제야. 안 그래?”
“……도련님, 저희 그냥 빨리 밥 먹으러 가요. 주변에 맛집 있어요.”
나는 김 비서의 손에 의해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 * *
김 비서와 동해바다에 다녀온 이후, 갑자기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놈아. 너는 어째 연락이 없냐.
“엥? 바쁘신 아버지께서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이놈 말하는 것 봐라. 누굴 닮아서 저러는 건지. 에잉. 쯧쯧.
“흠흠. 아버님. 제가 일이 많아서 그러니, 용건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수화기 속에서 아버지의 호통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지만 나는 애써 무시했다.
-크흠! 됐고, 너 이번에 모임 하나 나가 봐라.
“예? 갑자기 모임이요?”
갑자기 모임에 나가라니.
회귀 이후 나는 각종 모임에 잘 안 나가는 편이었다.
바쁘다는 이유를 들이밀며 거절했다.
실제로도 많이 바빴다.
-너, 천산 그룹의 셋째 놈하고 친하지?
“갑자기 백태현이는 왜요?”
-크흠! 기업 회장단 모임이 하나 있다. 그런데 이번에 천산그룹 회장의 생일이 곧 다가오거든? 그래서 다들 모이기로 했는데, 네가 나 대신에 거기에 좀 참여해라.
“제가요? 아니, 제가 거기에 참여해도 되요? 큰형은요?”
-네 큰형은 바쁘다.
“저도 바쁜데…….”
-시끄럽고. 거기에 네가 나 대신 참석하는 걸로 이미 답장해놨으니까 알아서 잘해라!
“예? 아버지! 어? 어어?”
아버지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 갑자기 뭔 일이래.”
살면서 아버지가 갑자기 어디 나가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다.
“맞아. 백태현이 만나서 투자 얘기도 해야 하는데. 그때 오려나?”
생각해 보니, 백태현이 만나서 할 얘기도 있었다.
“쩝. 어쩔 수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