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고양 선수들은 전의에 불타고 있는 사이, 일부 아틀레티코 선수들은 이번 경기를 두고 불만을 갖고 있었다.
“리그하고 챔스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하필 친선전이라니. 도저히 이해가 안 되네.”
“맞아. 더 이해가 안 되는 건 감독이 우리 같은 주전급 선수들도 이 경기에 뛰게 만들었다는 거야.”
이번 경기에 참여하는 2군 또는 1군 내 비주전급 선수들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기존에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에게는 전혀 메리트 있는 경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봐, 친구들. 불만 토로는 이 정도에서 끝내는 게 어때?”
“제레미!”
노랗게 머리를 물들인 건장한 체구를 가진 남자가 동료들을 말렸다.
그 남자의 정체는 바로 제레미였다.
“어떤 경기든 선수인 우리들은 최선을 다해야 해. 이곳 경기장을 찾아준 팬들에 대한 예의라고.”
“우리도 알아. 제레미. 하지만 너는 불만이 없는 거야?”
“불만? 있기는 해. 하지만 경기를 뛴 후에 표출해도 늦지 않아.”
“오, 역시 제레미야!”
제레미는 매 경기 진심으로 임하는 선수로 유명했다.
경기의 규모가 크고 작든 상관없이 그는 열정적인 플레이로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함께 뛰는 동료들.
상대하는 적들.
그들 모두가 제레미를 인정했다.
그게 제레미를 향한 세간의 평가였다.
하지만…….
‘X같네. 진짜.’
속은 온갖 입에 담지 못할 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레미는 불만이 가득했다.
사실 그도 이 경기를 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든 주목받고 싶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 이미지 메이킹에 공을 들여왔다.
이번에도 여느 때처럼 성실하고 열정적인 제레미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감독이 전반전만 뛰게 해준다고 했으니까, 후딱 끝내고 퇴근하자.’
* * *
『고양UTD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전반전 경기가 시작됐습니다. 왼쪽이 고양, 오른쪽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입니다!』
『한국하고 스페인 현지에서도 상당히 관심을 갖고 있는 경기인데요. 오늘은 어떤 내용으로 경기를 치를지 기대됩니다!』
고양은 프리시즌 첫 번째 경기 때처럼 4-2-3-1 포메이션으로 나섰다. 반면 아틀레티코는 스리백을 기반으로 하는 3-4-3으로 나섰다.
『초반 경기는 예상대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선수들은 자신들의 홈에서 여유롭게 공을 소유하며 플레이했다.
반면 고양은 신중하게 지역 방어를 펼치며 선수비 형태로 맞섰다.
“제레미!”
아틀레티코의 미드필더 세르쥬가 공을 툭 차올렸다.
센터서클 쪽에서 툭 찍어 차서 올린 공은 포물선을 그리더니 그대로 왼쪽 측면으로 툭 떨어졌다.
그렇게 떨어진 공을 제레미가 받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막아!”
“크읏!”
고양의 측면 수비수 이진수가 질주하는 제레미를 막아섰다.
제레미는 이진수를 앞에 두고도 여유롭게 개인플레이를 펼쳤다.
파밧!
“엇!”
한순간에 자신의 뒷공간을 내준 이진수.
당황해하는 그를 지나친 제레미는 순식간에 고양의 페널티박스 안쪽까지 들어왔다.
페널티박스 안쪽에는 고양 선수 3명이 있었다.
하지만 제레미는 아무렇지 않게 슈팅까지 곧장 이어갔다.
팡!
미사일처럼 날아간 슈팅!
하지만 공은 박지원 골키퍼의 손에 걸렸다.
“큭!”
골키퍼 손에 맞고 굴절된 공은 그대로 골라인을 벗어나며 코너킥으로 이어졌다.
제레미의 플레이 앞에 고양 선수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순간이기도 했다.
짝짝짝.
반면 홈팬들은 기립 박수를 치며 제레미의 이름을 외쳤다.
* * *
“예상대로 강하네요.”
김 비서의 말에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설마 아틀레티코가 갑자기 1군에서 뛰던 주전급 선수들 일부를 선발 명단에 넣을 줄은 몰랐어요.”
“그래. 이건 나도 예상 밖이긴 해.”
나와 김 비서는 회사 TV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경기 시작 1시간 전에 갑자기 아틀레티코가 주전급 선수들 일부를 선발에 넣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당히 놀랐다.
왜냐하면 계약서상에 2군 선수들로만 출전한다고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이게 우리에게 이득이 될까요?”
“글쎄, 선수단이 이 상황을 얼마만큼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을까?”
“부정도 긍정도 아니시군요.”
“아직은 뭐라 판단할 것들은 아니니까.”
그나저나 저 금발 머리 선수, 제레미라고 했나?
잘하긴 한다.
TV를 통해 보고 있지만, 존재감부터 다르다.
제레미가 공을 한 번씩 잡고 뭔가 했다 하면 고양 선수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그 때문인지 경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됐는데 위험한 상황이 몇 차례나 연출됐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놈 말고 제대로 뛰는 놈이 안 보이네.”
제레미 말고 그 외 나머지 선수들은 생각보다 좋은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있어서 다행스러운 부분일지 모른다.
『고양이 반격합니다!』
『빠른데요!』
경기 초반에 밀리는 모습을 보였던 고양 선수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반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회심의 장면을 만들기도 했다.
『하프 스페이스에서 박형우가 볼을 잡습니다! 박형우, 드리블 돌파! 』
『이야~ 열리죠!』
『질주하는 박형우! 전방에 있는 사무엘을 향해 크로스!』
최전방 공격수로 출전한 사무엘.
지금 그 옆에는 아틀레티코의 수비수 루드만이 있었다.
주로 백업 수비수로 활약하던 루드만은 오늘 모처럼 선발로 나선 상태였다.
『사무엘! 루드만과의 경합에서 버텨 냅니다! 사무엘 옆으로 박요한이 빠져 들어갑니다!』
『오! 박요한 잡았어요!』
수비 경합에서 버텨낸 사무엘이 빠져 들어가는 박요한 쪽으로 공을 흘려보냈다.
공은 정확히 박요한 밑으로 향했고, 박요한은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팡!
『박요하아아안! 득점합니다!』
『이야아아아! 멋진 골이에요!』
“오! 오오오오!”
“꺄악! 골이에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선제 득점에 성공한 우리 팀을 본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에 있던 김 비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김 비서.”
“네?”
나는 그런 김 비서에게 가볍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런 내 모습과 손바닥을 번갈아 보던 김 비서는 금방 환한 얼굴로 나와 하이파이브 했다.
짝-.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 * *
이변이 펼쳐졌다.
사람들은 당연히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리드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경기는 고양이 리드하고 있었다.
평상시 같으면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복합적인 이유들이 존재했다.
첫째, 대부분의 아틀레티코 선수들은 경기를 적극적으로 뛰지 않고 있었다. 2군 선수들 중에서 간절한 선수 몇 명만 열심히 뛸 뿐이었다.
둘째, 고양 선수들은 이기든 지든 잃을 게 없었다. 이미 그라나다와 발렌시아를 상대로 경험을 쌓으며 자신감이 많이 오른 상태였다. 그래서 한 번 분위기를 잡은 그들의 플레이에는 거침이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실점을 하게 된 아틀레티코 선수들은 자존심에 금이 나고 말았다.
그것은 곧 몇몇 선수들의 더티플레이로 이어졌다.
쿵!
“악!”
상대의 거친 태클에 당한 장현우가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삑!
상황을 눈앞에서 본 주심이 바로 휘슬을 불며 반칙을 선언했다.
그러자 반칙을 저지른 아틀레티코 선수가 거칠게 항의했다.
“이게 무슨 반칙이라는 거야!”
스페인어로 말한 터라, 고양 선수들이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항의하는 것이라는 건 알았다.
이에 주장 김지우도 주심에게 구두 주의만 주고 끝난 주심에게 카드를 줘야 하지 않냐며 어필해 보았다.
그런데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점점 아틀레티코 선수들 쪽에서 과격한 플레이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콱!
“악!”
이번에는 선제 득점의 주인공인 박요한이 바닥을 굴렀다.
상대 수비수가 박요한의 발등을 밟은 것이다.
이번에도 주심은 상대에게 구두주의만 주고 끝났다.
“야!”
이에 보다 못한 라시모프가 화를 내자, 아틀레티코 선수들이 기다렸다는 듯 응수했다.
“어디 덤벼봐! 이 동양인 놈들아!”
“……!”
상대 도발에 눈이 뒤집힌 라시모프가 달려들려던 찰나, 사무엘이 뒤에서 그를 잡았다.
“라시모프! 정신 차려! 이런 일에 넘어가면 안 돼!”
“하지만!”
“상대가 벌이는 더러운 꼼수라고!”
사무엘은 이미 수백 경기 이상을 뛴 베테랑 선수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선배로서 라시모프의 행동을 저지한 것이다.
씩씩대던 라시모프도 화를 가라앉혔다.
그 모습을 벤치에서 본 곽찬구 감독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 날 뻔했네.’
곽찬구 감독은 상대의 더러운 플레이를 보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참이었다.
‘원래 스페인 애들이 이렇게 더럽게 했었나?’
앞서 그라나다나 발렌시아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분위기다.
‘유럽 상위권 팀에 속한 선수들은 자존심도 강하다던데. 뭐, 이건 그거하고 다른 얘기려나.’
곽찬구 감독은 슬쩍 상대 벤치 쪽을 쳐다보았다.
상대 벤치 쪽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상대 감독과 의자에 앉아서 무언가 심도 있게 대화를 나누는 코치들의 모습. 벤치에 대기하고 있는 선수들도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썩 좋은 얘기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런 상대 벤치 상황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뭐, 유럽 팀 별거 없네~”
“뭐라는 거냐. 멍청아.”
“낄낄낄. 오늘은 몇 대 몇까지 가려나!”
“내기 하쉴?”
“콜? 이기면 밥 사기!”
“아? 진 사람이 아니고?”
“이긴 사람이 기분 좋게 사야지, 짜샤!”
“좋아. 콜!”
곽찬구 감독은 벤치에 앉은 선수들이 떠드는 대화 소리를 듣고 실소가 흘러나왔다.
첫 경기 때만 해도 긴장해서 말없이 경기만 보던 선수들이 지금은 농담도 할 정도로 여유가 생긴 것이다.
여유가 있는 건 좋다.
하지만 감독 입장에서 선수들이 너무 풀어지게 두어서도 안 된다.
“이놈들아! 집중 안 하냐?”
“아이쿠!”
감독의 불호령에 선수들은 머쓱한 얼굴로 경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런 선수들의 모습을 보며 곽찬구 감독은 보이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 * *
『경기는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경기는 어느덧 전반을 지나 후반 막판까지 오게 되었다.
스코어는 1:1.
전반전에 고양이 선제득점을 했지만 후반에 동점골을 내주면서 1:1이 된 것이다.
“하, XX!”
제레미는 욕설을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반전만 출전시킬 거라는 감독이 후반이 거의 끝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뛰게 했기 때문이다.
제레미 입장에서는 열 받을 만한 일이었다.
리그와 챔스에 집중해야 될 자신이 이깟 친선 경기에서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해야 된다는 상황이 너무나도 불쾌했기 때문이다.
“제레미!”
아틀레티코의 역습 상황에서 제레미는 동료로부터 공을 받았다.
체력이 떨어진 제레미의 움직임은 이전보다 떨어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를 막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진수였다.
이진수는 오늘 몇 번이나 측면에서 제레미를 상대했다.
전반전만 해도 제레미는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었던 이진수가 이젠 버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유가 있었다.
이진수는 K리그에서도 ‘에너지 탱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지치지 않는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와 달리 부상에서 복귀한 지 얼마 안 된 제레미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안 그래도 열 받고 있는 제레미는 이진수 때문에 더 열받은 상태였다.
“비켜!”
제레미는 페이크 동작을 보이며 이진수를 드리블로 벗겨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이진수는 속임수를 눈치챈 상태였다.
속임수에 걸리지 않은 이진수가 몸을 비집고 들어가며 제레미를 막았다.
그리고 제레미의 발밑에 있는 공만 살짝 건드리며 빼냈다.
그 순간, 제레미의 자존심에도 크게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그 순간……!
빠악!
“……!”
지켜보던 모두가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레미가 손바닥으로 이진수의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