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스페인 1부 리그 팀을 상대로 전반전 동안 고양은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라시모프, 몸으로 막아냅니다!』
『라시모프 선수의 투지가 남다르네요! 수비수가 저렇게까지 상대 공격을 막아내면 팀 동료들도 사기가 오를 수밖에 없죠!』
라시모프의 몸을 사리지 않은 육탄 수비 덕분에, 고양은 수비도 안정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 비단 새로 영입된 선수들만 좋은 활약을 펼치는 것은 아니었다.
기존에 주전으로 활약했던 선수들도 자극을 받고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나탈, 그라나다의 오른쪽 측면을 휘젓습니다! 나탈, 크로스! 올라가는데요! 김지우가 받습니다! 김지우 슈우웃! 하지만 골대 위를 살짝 벗어납니다! 아쉬워하는 김지우!』
『지금 나탈과 김지우의 연계 상당히 좋았어요. 이런 플레이가 지난 시즌 고양의 플레이 중 하나였거든요? 측면을 돌파한 나탈의 크로스에 이은 김지우의 중거리 슈팅. 좋습니다.』
『고양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살립니다! 이번에는 박요한입니다! 왼쪽 측면에서부터 박요한인데요! 박요한! 박요한 그대로 슈우우웃! 아깝습니다! 골키퍼의 선방에 막힙니다!』
『아! 지금 너무 안타까웠는데요. 카셀라 골키퍼가 깜짝 놀랐어요! 박요한이 수비수 2명을 앞에 두고 그대로 때릴 줄은 몰랐던 모양이에요!』
전반전 동안 고양Utd 선수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듯 높았다.
반면, 그라나다CF 선수들은 상당히 당황스러워했다.
나오지 말아야 할 실수도 간간이 보여줄 정도로 흔들리는 모습이 자꾸 나왔다.
“스페인 1부 리그 팀이라고 해서 봤더니 뭐, 별거 없구만!”
“방심하지 마! 아직 전반전일 뿐이라고!”
“알고 있어!”
주장 김지우는 선수들에게 방심하지 말라고 외쳤다.
선수들도 최선을 다해 경기에 집중했다.
벤치에 있는 곽찬구 감독은 코치들과 대화를 나누며 경기를 어떻게 이끌어갈지 논의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상대는 우리에 대한 정보가 부족합니다. 전반전에 우리가 이렇게 좋은 모습을 펼칠 수 있는 건 그 때문일 겁니다.”
코치의 말에 곽찬구 감독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 코치, 자네 말이 맞아. 후반전에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지.”
이런 곽찬구 감독과 코치진의 예상은 후반전에 돌입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후반전에는 그라나다가 경기를 지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요.』
『그렇습니다. 확실히 하프타임 때 재정비를 하고 나온 것 같습니다.』
전반전 내내 굳은 얼굴로 지켜보던 그라나다 단장은 변화한 팀을 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공을 받은 라모스! 아크 정면인데요! 앞에는 라시모프가 있습니다! 라모스 슈우우웃! 아, 실점합니다.』
후반전 도중, 그라나다의 공격수 라모스가 개인플레이로 고양의 수비를 무너뜨리고 마무리까지 지었다.
앞서가던 고양은 동점을 허용한 뒤로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보다 못한 곽찬구 감독이 터치라인 앞까지 나와서 큰 목소리로 선수들을 독려했다.
선수들도 이를 악물고 그라나다의 파상공세를 막기 바빴다.
최전방에 있던 사무엘까지 모두 내려와서 수비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오늘 그라나다 공격수들의 결정력이 많이 부족한 편이었다.
덕분에 몇 차례 큰 위기가 있었음에도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삑! 삐익! 삑!
『마침내 주심이 휘슬을 붑니다! 고양의 첫 프리시즌 경기는 그라나다와 1:1 무승부로 마무리 짓습니다!』
『네에, 비록 고양Utd가 후반전에는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전반전에 보여줬던 퍼포먼스는 대단했습니다. 아직 프리시즌 첫 경기인데다 고양 선수들이 이번 일로 좋은 경험치를 쌓았으면 좋겠네요.』
『같은 생각입니다. 네, 그럼 시청해주신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중계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수고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좋은 모습을 보여드렸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서 민망하네요.”
사과하는 곽찬구 감독을 향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승부라는 결과가 누군가에게는 아쉬운 결과일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상당히 긍정적인 결과였다.
우리가 이곳에서 승리하겠다는 의지보다 무언가 경험을 쌓겠다는 생각으로 왔으니까.
솔직히 나는 대패를 당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곽찬구 감독이 이끄는 선수단은 의외로 좋은 모습들을 보여주며, 앞으로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런 점을 언급하며 곽찬구 감독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제 입장에서는 흐뭇합니다. 남은 프리시즌 일정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남은 일정도 소화하겠습니다.”
“부탁드리죠.”
남은 프리시즌 경기는 발렌시아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둘 다 만만치 않은 팀들이다.
앞서 치렀던 그라나다는 중 하위권 팀이기 때문에 단기전으로는 비벼 볼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발렌시아와 아틀레티코, 이 두 팀은 다르다.
‘경험치나 많이 쌓았으면 좋겠다.’
승부의 결과보다 내용적인 성장을 기대하며, 나는 다음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움직였다.
* * *
나는 그라나다 경기만 관전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남은 프리시즌 경기를 모두 관람하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해야 할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바로 주간 회의를 진행했다.
“그라나다와 프리시즌 첫 경기에 대한 반응은 어떻습니까?”
“방송사로부터 전달받은 내용에 따르면, 시청률은 3% 정도 된다고 합니다.”
“3%? 상당히 낮은 수치 아닌가요?”
내 말에 천지원 부장은 고개를 저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시즌 국내 K리그 평균 시청률이 1% 내외고, 국내에서 가장 인기 많은 프리미어리그 시청률도 3% 내외입니다.”
“시청률이 고작 그거밖에 안 된다고요? 가만, 그러면 우리 팀 경기가 거의 프리미어리그 시청률만큼 나왔다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뭐, 강인한이 소속된 맨체스터시티 경기 같은 경우에는 10%도 나오기는 하는데, 그건 예외의 경우죠. 전체적으로 상당히 긍정적인 출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재방송도 진행한다고 했죠?”
“네. KSB는 별도의 스포츠 채널도 따로 운영하고 있는데요. 그곳에서 재방송을 한다고 합니다.”
“그럼 재방송 효과도 무시 못 하겠군요.”
“네, 맞습니다.”
아무래도 쉽게 볼 수 없는 매치업이라서 시청자들의 관심을 이끈 것 같았다.
뭐가 됐든 우리에게 좋은 일이다.
그만큼 팀의 인지도가 늘어나는 셈이니까.
“인터넷 반응은 어떻습니까?”
“우선 축구 전문 커뮤니티에서 반응은 조금 호불호가 갈리기는 합니다.”
“호불호가 갈린다. 왜죠?”
“전반전 플레이는 나무랄 데가 없으나 후반전에는 상대 공격을 막는 데만 급급한 모습을 보여줘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흐음.”
“이것도 어디까지나 경기 내적인 부분에서의 호불호가 갈릴 뿐이고, 저희에 대한 기대가 상당히 큰 의견도 많이 나왔습니다.”
“좋군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작게나마 이벤트를 개최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벤트요?”
천지원 부장은 물 들어올 때 노 젓자는 마음으로 이벤트를 제안했다.
“이벤트는 간단하게, 팀에서 운영하는 SNS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응원 메시지를 남겨주거나 본방 사수하는 팬들의 인증샷을 받아 유니폼을 비롯한 상품들을 주는 겁니다.”
“호오.”
이미 다른 구단에서도 오랜 시간 해왔던 이벤트이기는 했다.
평소 같으면 너무 단순하다고 얘기하며 반려했을 지도 모르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아, 잠깐만요!”
“……?”
“제게 좀 더 좋은 계획이 있습니다.”
* * *
다른 구단들은 프리시즌을 단순히 다가올 시즌을 준비하는 정도로 계획하고 있지만, 우리는 달랐다.
“엄청나네요.”
“마치 공식 경기를 치르는 것 같아요.”
직원들은 경기장을 채운 관중들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나도 흐뭇한 미소를 드러내며 지켜보고 있었다.
“도련님. 이번에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를 내셨네요.”
“뭐, 천지원 부장이 옆에서 도움을 준 덕분이지.”
처음에 단순히 SNS 이벤트 정도로만 진행하려고 했던 우리는 조금 더 판을 크게 키워보자 생각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관중석을 무료로 오픈하여 다 같이 경기장에서 프리시즌 경기를 시청하는 이벤트를 열어버린 것이다.
반응은 좋았다.
관중석에는 1만 명이 넘는 팬들이 찾아왔다.
『고—양--!』
고양Utd의 서포터스들은 멀리서 경기를 뛰고 있는 선수들을 향해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 때마침 프리시즌 두 번째 경기가 시작됐다.
경기장에 배치된 커다란 스크린에 고양 선수들의 모습이 비춰졌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오늘 고양Utd와 발렌시아의 경기를 중계해 드리겠습니다.』
『지난 첫 번째 경기에서는 고양 선수들이 그라나다를 상대로 전반전에 좋은 모습을 보여줬는데요. 오늘은 발렌시아를 상대로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번에 상대할 발렌시아는 앞서 그라나다보다 상당히 강한 팀입니다.』
『네, 최근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는 있지만 그래도 과거 명문 클럽에 대한 저력이 있고, 현재 리그에서도 6위와 7위를 오가고 있는 강팀입니다.』
『발렌시아는 오늘 주축 선수들을 거의 다 내보냈습니다. 주전으로 활약하는 미드필더 오스만이 부상으로 이탈한 것을 제외하면 거의 다 주전 멤버들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무래도 발렌시아가 지난번 고양과 그라나다의 경기를 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 이렇게 전력을 다해 경기에 임할 수 있을까 싶네요.』
캐스터와 해설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관중석 전체로 울려 퍼졌다.
“도련님. 괜찮을까요?”
“뭐가?”
“상대가 전력을 다해 나왔다는 건, 우리에게 위기라는 거잖아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그럼 도련님의 생각은 다르신가요?”
“응.”
김 비서를 비롯한 우리 팀 직원들은 상당히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 선수들이 조금이라도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 모습을 본 팬들이 호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켜보면 알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경기를 지켜보았다.
* * *
『회심의 슈팅! 하지만 아깝게 빗나가고 맙니다! 박형우의 슈팅이었습니다.』
『박형우 선수, 오늘 몸 상태가 상당히 좋아 보이는데요?』
영신 그룹의 직원들도 오늘 경기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지종윤 회장이 오늘 경기는 반드시 본방 사수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날 직원들은 중계시간에 맞춰 모두 칼퇴를 할 수 있었다.
굳이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이미 축구에 관심 있는 직원들은 알아서 시청했겠지만.
“제법이야. 내가 아들놈을 아주 잘 키웠어.”
집에서 조용히 경기를 시청하는 지종윤 회장의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이미 그는 고양의 첫 프리시즌 경기부터 본방사수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스페인까지 가서 이런 일을 해낼 줄이야. 이거, 태완이 녀석이 아주 긴장하겠는데?”
지종윤 회장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똑같이 집에서 경기를 시청하고 있는 지태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제길!”
고양Utd를 버리려던 계획을 갖고 있던 지태완.
그는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달았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아. 녀석은 이미 큰 관심을 끌어내 버렸어.”
이렇게 고양Utd가 큰 관심을 받아버리면 자신이 원하던 방향대로 팀을 처분할 수 없게 된다.
“건방진 놈.”
화가 난 지태완은 TV를 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