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내가 대표이사로 부임했을 때만 해도 치열한 시즌을 보내던 리그도 어느덧 막바지에 돌입하고 있었다.
“벌써 12월이 다 되가네.”
현재 11월 말.
이제 다음주면 12월이다.
그동안 우리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도련님. 그래도 목표했던 대로 이루어진 것 같네요.”
“응. 비록 플레이오프 진출은 무산됐지만, 첫 시즌에 이 정도면 준수하지.”
K리그2 정규 리그는 11월에 모두 막을 내렸다.
현재 K리그2는 1, 2위는 자동승격, 3~5위까지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다.
고양유나이티드는 리그 5위와 6위를 왔다 갔다 하던 상태였는데, 마지막 정규 라운드에서 아깝게 패배하는 바람에 6위로 시즌을 끝마쳤다.
시즌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9위와 10위 사이를 오가며 겨우 꼴지만 면하던 우리 팀이 리그 6위로 시즌을 마친 일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우리팀 시즌은 끝났지만, 사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볼 수 있지.”
“시작하실 건가요?”
“시작해야지.”
나는 그동안 준비한 살생부 명단을 꺼내 들었다.
보통 겨울 이적시장이 열리는 1월부터 선수단 개편이 진행되지만, 나는 그보다 좀 더 빠르게 진행할 생각이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생각보다 길지 않아.”
“내년 승격 때문이죠?”
“맞아.”
내년에 어떻게든 승격을 해내야 한다. 그래야 나도 구단 대표이사직을 유지할 수 있다.
아버지와 내건 내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향후 내가 그룹 총수까지 올라가려면 승격은 반드시 이루어내야 한다.
“그럼 뭐부터 시작하실 건가요?”
“글쎄…… 일단 먼저 안 쓰는 물건부터 정리해야겠지?”
* * *
그토록 기다려왔던 선수단 개편에는 자비심은 없었다.
『황철호, 일본 J리그 시미즈펄스로 이적!』
그런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은 황철호였다.
곽찬구 감독 부임 이후 황철호는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득점을 하지 못하는 공격수는 더 이상 공격수가 아니다.
거기다 자기 관리도 엉망이어서 그야말로 연봉만 잡아먹는 하마였다.
임태무 감독 시절에야 그와의 인연으로 꽤 중용되었다. 하지만 임태무 감독이 경질된 이후 팀 동료 선수들 사이에서조차 외면받았다.
결국 견디지 못한 황철호는 에이전트를 통해 이적을 결심했다.
하지만 국내 팀 중에선 그 누구도 황철호를 받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설마 계약기간까지 방치해 둬야 싶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야.”
결국 해외 쪽으로 나가는 방법밖에 없던 황철호는 에이전트의 영업력 덕분에 J리그로 진출할 수 있었다.
사실 황철호는 고양으로 오기 전에 J리그에서 꽤나 활약했었다.
감바 오사카 소속으로 리그 100경기를 뛰며 40골을 기록했기에 일본 축구팬들 사이에선 아직도 유명했다.
시미즈 펄즈 또한 그 시절의 황철호를 기억하고 데려갔던 것이다.
“이적료도 두둑하게 주다니.”
황철호의 계약기간이 남아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이적료가 발생했다.
시미즈가 우리에게 지급한 이적료는 약 5억.
황철호가 맛있게 먹은 1년 치 연봉만큼 받아냈다.
“페이백 받는 기분이네.”
이후 기존 잉여 전력들에 대한 방출이 릴레이로 이어졌다.
『[오피셜] 수비수 유창근, 고양UTD와 계약해지.』
『[오피셜] 고양UTD 미드필더 조진영, 부산 라이언즈로 이적!』
『[오피셜] 공격수 현정수, 고양UTD 계약 해지.』
『[오피셜] 미드필더 성정현, 고양UTD에서 대전으로 전격 이적!』
줄줄이 이어지는 방출 소식에 고양 팬들은 놀라워했다.
┗ 이야, 다 내보내네.
┗ 이렇게 줄기차게 내보내도 괜찮은 건가?
┗ 어차피 잉여 전력들이라서 내보내야 했음.
┗ 누구를 데려오려고 이렇게 내보내냐.
┗ 쓸 만한 애들 좀 데려왔으면 좋겠다.
기존 잉여 전력들을 모두 처분하니 기존 선수단 인력 중에서 1/3 가까운 인원이 빠졌다.
“팀이 왜 이렇게까지 망했는지 이제서야 알겠네.”
1월 이적 시장이 오기 전에 불필요한 연봉을 소모시킨 하마들을 모두 내쳤다.
그렇게 생긴 빈자리에는 새로운 얼굴들이 들어올 준비를 했다.
뉴페이스들을 맞이하기에 앞서 나는 한 가지 재미난 이벤트를 기획했다.
“이광진 기자님. 기사 하나 써주세요.”
“말씀만 하십시오. 얼마든지 써드리죠!”
고양 스포츠의 대표이자 현직 기자이기도 한 이광진 대표를 통해 보도자료를 내보냈다.
『[단독] 지태훈 대표 “앞으로 깜짝 놀랄 일들이 펼쳐질 것.”』
이광진 기자와 단독 인터뷰를 통해 낸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
이광진 : 대표님께서 부임하시고 고양 유나이티드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태훈 : 아직 많이 보여드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놀라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이번 겨울 이적시장부터 깜짝 놀랄 일들이 예정되어 있거든요.
이러한 인터뷰 기사를 본 고양 팬들은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 정말 얼마나 놀라운 걸 보여주려고 그러는 걸까?
┗ 솔직히 조금 기대가 된다. 지태훈 대표가 좀 4차원 기질이 있어. 지난번에 영신그룹 인턴을 경품으로 내건 것도 그렇고.
┗ ㄹㅇ VIP석에 경기 지켜보면서 자기네들이 만든 유니폼하고 굿즈들 착용하는 모습보고 놀랐음.
┗ 요술봉의 지태훈 짤은 잊혀지지 않는다.
┗ 태훈성님 기대하겠습니다!
물론 고양 팬들만 기대가 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2월이 지나갔다.
* * *
K리그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2025시즌 K리그1의 우승팀은 울산 다이노스였다.
한동안 전북 모터스가 K리그의 패권 팀으로 자리잡았던 상황에서, 울산은 늘 2인자로 존재하던 상황이었다.
그랬던 울산이 마지막 라운드에서 맞붙은 전북과의 경기에서 극적 결승골을 터트리면서 역전 우승에 성공했다.
그렇게 리그 우승은 울산 다이노스였지만 이어지는 FA컵 결승전에서 두 팀은 또다시 맞붙었다.
그리고 그 경기의 결과는 전북의 우승이었다.
장군, 멍군하며 강력한 두 팀이 리그를 양분하고 있는 사이, K리그2도 승격팀이 나왔다.
K리그2 1위로 정규리그 우승과 함께 자동 승격에 성공한 안양과 2위 대전이 승격했다.
4위 경남은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고 승강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성남에게 합계 1, 2차전 2:1로 패배하면서 승격에 좌절 실패했다.
그렇게 승격을 하는 팀이 있다면 반대로 밑으로 내려오는 팀들도 존재했다.
작년에 압도적인 실력으로 K리그1으로 승격했던 서울 다이너스티가 불과 1년 만에 꼴찌로 강등되었다.
여기에 K리그1에서 제법 이름을 날렸던 제주가 서울과 함께 강등되었다.
K리그2 팀들 입장에서 썩 달갑지 않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내년에 치를 경기에 제주 원정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상이 좋아지고 교통편이 좋아졌어도 제주 원정은 부담이 된다.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야 하는 부담이 결코 적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K리그2의 경기 일정상 각 팀은 최소 3번은 맞붙는다.
만약 제주 원정이 2번 이상 잡힌다면 선수단 운영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고양 유나이티드가 폭풍을 만들기 시작했다.
* * *
새로운 신년을 알리는 1월 1일이 지나고, 2일 아침부터 충격적인 기사가 국내 스포츠 게시판을 휩쓸었다.
『파주FC 사무엘, 고양UTD 전격 이적! 계약기간은 3년.』
고양팬과 파주팬을 넘어 K리그 팬들 전체가 들썩였다.
┗ 뭐야? 지금 내가 뭘 본 거야?
┗ 사무엘이 왜 고양으로 가?
┗ 뭐지? 잘못 올라온 거 아냐?
┗ 미친! 곽찬구 감독 보낸 것도 울화통 터지는데 사무엘까지 간다고?
┗ 사무엘 개XX! 이 배신자!
2026년 새해부터 K리그는 굉장히 소란스러워졌다.
파주FC에서 오랜 시간 뛰어왔던 사무엘은 K리그 레전드나 다름없었다.
과거 데얀이나 라데 같은 선수인 것이다.
그런 선수가 비록 2부 리그 팀이지만 라이벌 팀으로 이적한 사건은 굉장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파주팬들의 정신적인 충격과 고통은 컸다.
이미 레전드인 곽찬구 감독을 고양에게 내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무엘까지 내줬으니 충격은 배가 됐다.
┗ 파주 프런트들은 전부 정신 나갔냐?
┗ 전부 다 나가 뒤져라!
┗ 내가 이럴려고 너희들 응원하는 줄 아냐!
┗ 곽찬구 감독하고 사무엘하고 사이 좋은 건 알고 있었는데…… 아, 이건 진짜 아닌데.
화가 난 파주 팬들은 파주FC 게시판에 분노를 표출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한 건 없었다.
“설마 사무엘, 그놈이 고양으로 가버릴 줄이야.”
파주FC 단장 이재신은 사무엘의 이적 소식을 기사로 접하고 인상을 구겼다.
그러다가 곧 그의 뱀처럼 가늘어진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지태훈 대표라고 했던가. 재벌가의 망나니가 상당히 거슬리게 행동하는군.”
“어차피 사무엘 그 녀석은 쳐낼 놈 아니었나?”
“그렇긴 하지.”
이재신 곁에는 허재우가 있었다.
과거 고양 유나이티드에서 단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참 웃기지도 않는군. 라이벌 팀 단장으로 있던 사람이 지금은 우리 편에 있다니.”
이재신의 말에 허재우의 얼굴은 살짝 굳어졌다.
“이상한 말 지껄이지 말지? 나는 지태훈, 그 자식 처리하면 바로 나갈 거니까.”
“후후후.”
비록 서로 원하는 것들이 있어 뭉친 사이지만, 이재신은 허재우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잘 부탁하죠. 허 팀장.”
“흥.”
* * *
“반응이 아주 죽이네.”
“예상했던 부분들이잖아요?”
“그렇긴 해.”
나와 김 비서는 사무엘 이적 소식을 들은 팬들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예상대로 사무엘의 이적 소식은 K리그 전체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내가 말했지? 우리에게는 ‘관심’이 필요하다고.”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도 싶네요.”
“상관없어. 어차피 곽찬구 감독이 필요하다고 적극 요청했었던 선수니까.”
“오히려 영입 과정에서는 도련님이 더 신나 하시는 것 같았는데요?”
“신날 수밖에.”
팬들을 놀라게 만들어주겠다는 인터뷰 기사를 낸 지 불과 한 달 만에,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물론 이건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더 많이 놀랄 일들이 남아 있다.
“그나저나 김 비서. 1월 1일에는 뭐했어?”
“가족들하고 함께 있었죠.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세요?”
“아니, 나는 혼자 있었는데? 본인은 가족하고 있었다고?”
“저희 가족은 도련님 가족하고 다르거든요.”
“그거 지금 위험한 발언 아냐?”
“그런가요?”
“‘그런가요’라니!”
김 비서와 함께 지낸 시간이 오래되다 보니 이런 식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나왔다.
오히려 나는 편하고 좋았다.
나에게 김 비서는 정말 가족 같은…….
“가족이라…….”
가족이란 단어를 곱씹던 나는 문득 김 비서에게 물어봤다.
“김 비서. 만약에 내가 나중에 누군가하고 결혼하면 어떨 것 같아?”
“그건…….”
김 비서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고민하더니 금방 고운 얼굴을 찌푸리며 따졌다.
“그런 건 왜 물어보시는 거죠?”
“그냥. 나도 김 비서 같은 가족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
그 말에 김 비서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재벌가 집안 사람이라는 타이틀이 있다.
겉으로 보면 남 부럽지 않은 타이틀이지만, 그만큼 보이지 않은 대가는 존재했다.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밥 먹은 지 까마득하게 오래됐고, 형제들과 사이는 데면데면하다.
오히려 그나마 아군이라 생각했던 큰형은 막강한 적으로 나타났다.
그런 나에게 정말 가족 같은 가족이 존재할 수 있을까.
가슴이 조금 먹먹했다.
“괜한 말을 꺼냈네. 됐어. 신경 쓰지마.”
“……도련님.”
괜히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대수롭지 않은 척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도련님. 힘내세요.”
“……!”
와락하고 나를 끌어안은 김 비서.
그런 그녀의 돌발 행동에 내 두 눈이 부릅떠졌다.
“김 비서, 이러면 나 되게…….”
“도련님이 어렸을 적에 제가 이렇게 종종 안아줬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
“도련님은 지금 정말 잘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런 도련님 곁에는 제가 끝까지 함께 할 거예요.”
“…….”
김 비서.
고마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감고 김 비서의 따뜻한 품을 만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