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그쪽이 보내준 메일 내용은 아주 흥미로웠소.”
“그러셨습니까?”
“업무 협약을 통해 UAE 선수들을 K리그에 뛰게 하거나, 내가 운영하는 에이전트 회사를 통해 K리그에 뛰는 선수들을 UAE로 보낸다는 내용은 무척 흥미로웠소. 그 외에 다른 것도 흥미로웠소.”
“흥미로우셨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말이오.”
칼리드 왕자의 말에 나는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그런 우리의 곁에는 김 비서가 있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통역을 하며 우리의 대화에 윤활유 역할을 해줬다.
“그쪽이 K리그에 속한 고양 유나이티드의 구단주라는 것은 알고 있소. 2부 리그라고 들었는데?”
“맞습니다.”
“동북아시아에 있는 자그마한 2부 리그 팀의 구단주가 과연 그 제안을 진행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오.”
“의심이 드실 만도 하시겠죠.”
나는 눈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여유롭게 찻잔 안에 담긴 붉은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전적으로 믿으라?”
“예. 그래야 왕자님이 원하는 목표를 좀 더 빠르게 달성하실 수 있으니까요.”
“…….”
방금 전까지 미소를 보여주던 칼리드 왕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 왕자를 향해 한 마디 더 던졌다.
“왕자님께서 차기 왕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알고 있다.
칼리드 왕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축구 사업에 뛰어들었는지를.
사실 지금은 몰라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칼리드 왕자는 지금보다 더 본격적으로 왕좌 싸움에 끼어든다.
언론에도 대서특필될 정도로 꽤 유명한 사건이다.
“그쪽이 그걸 어떻게 알지?”
왕자의 입장에서는, 형제들에게도 비밀로 할 정도로 중요한 사항을 아무도 모르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하게 변하자 내 옆에 있던 김 비서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런 김 비서의 손을 가볍게 잡아준 다음, 칼리드 왕자에게 말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왜냐하면 저도 왕자님과 비슷한 목표를 가지고 있거든요.”
“나와 비슷한 목적이라면…… 설마?”
“저는 영신그룹의 총수가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
“게다가 그쪽처럼 나도 첫째 형과 경쟁하고 있죠.”
“…….”
“서로 피차 같은 입장인데, 어떻습니까? 왠지 서로 잘 맞을 것 같은데?”
* * *
“하하하! 많이들 드시오!”
“역시 왕자님의 그릇은 엄청나군요!”
“하하하! 나만 한 그릇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까? 아아! 또 있었군! 나의 형제 미스터 지가!”
“하하하! 영광입니다! 그래도 왕자님에 비하면 보잘것없습니다!”
“하하하!”
불과 1시간 전만 하더라도 조금은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있었다면, 지금은 전혀 달랐다.
딱딱한 분위기를 해결해준 것은 다름 아닌 ‘술’이었다.
의외로 칼리드 왕자는 술을 좋아했다.
“왕자님, 이렇게 술을 마셔도 괜찮은 건가요?”
“응? 아아. 내가 이슬람이라서 그런 질문을 하는 건가?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슬람은 음주에 관해선 엄격하게 금한다.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UAE도 마찬가지인데 그중에서 두바이만큼은 그래도 자유로운 편이었다.
원칙적으로는 금지하는 편이지만, 크게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알게 모르게 허용해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니 걱정 말고 마시자고! 어?”
“아, 넵! 그럼 사양하지 않고 마시겠습니다!”
“역시 자네는 남자야! 으하하하!”
저녁 만찬을 하면서 나도 모처럼 술을 마셨다. 원래 애주가였지만 회귀 후부터 자제를 하고 있던 나도 오늘만큼은 봉인 해제했다.
다만, 김 비서만큼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술을 썩 좋아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통역 때문이라도 마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와 칼리드 왕자는 서로 술을 통해서 좀 더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간 상태에서 칼리드 왕자는 나를 ‘형제’라고 칭할 정도로 애정을 드러냈다.
나도 그런 왕자의 비위를 맞춰주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그렇게 한껏 분위기를 끌어올린 뒤, 나는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왕자님, 그럼 예정대로 사업을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사업? 아아, 물론이지. 비록 우리 오늘 서로 처음 만난 사이지만, 자네와 나는 뭔가 통하는 게 많아.”
“그렇습니까?”
“그래! 아무래도 우리 모두 각자의 큰형과 맞서 싸우느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
생각보다 칼리드 왕자는 큰형인 나바드 왕자를 싫어했다.
단순히 싫어하는 수준을 넘어 적대감마저 드러내고 있었다.
문득 궁금해진 내가 그 이유를 물어봤다.
“왕자님께 있어서 첫째 왕자는 도대체 어떤 의미입니까? 단순히 경쟁 관계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
“후후후. 우리 형제께서 뭔가 보는 눈이 있구먼. 맞아, 나는 나바드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어.”
“…….”
칼리드 왕자는 말을 하면서 나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서로의 빈잔을 사이좋게 채운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모두 그놈에게 속고 있어. 남들이 봤을 때 그놈이 순백 같은 존재로 보이지만, 전혀 아니야. 나는 알아. 그놈이 얼마나 뒤에 구린 게 많은지!”
“……도대체 어느 정도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지요?”
“그놈은…….”
무언가 말하려던 칼리드 왕자는 고개를 저었다.
“됐군. 아무리 자네라고 해도 이 이상 얘기할 수는 없네.”
자세한 내막을 듣지 못해 아쉽기는 했다. 그렇다고 굳이 말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들춰내가며 얘기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나는 내 이익만 챙기면 그만이니까.
“자자, 한잔하시지요. 왕자님!”
“아아! 그러지!”
분위기가 깨지기 전에 우리는 다시 술을 마셨다.
그러자 내려갈 것 같았던 분위기는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자, 그럼 이번에 제가 한 번 말아드리죠!”
“말아? 무엇을?”
“자, 한 번 보시지요!”
나는 소위 말해 K-술, ’폭탄주‘를 말기 시작했다.
소싯적 술을 마는데 일가견이 있던 나는 테이블 위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술들을 적당한 비율에 맞춰 제조했다.
그렇게 한 잔 말은 술을 칼리드 왕자에게 내밀었다.
“쭈우우욱 들이켜보십시오! 아주 신세계일 겁니다!”
“으음. 이거 정말 마셔도 괜찮은 건가?”
“아! 물론이죠! 한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술을 마시기도 하는데, 완전 새로울 겁니다!”
“으음.”
칼리드 왕자는 우물쭈물하다가 쭈욱 들이켰다.
그렇게 술잔을 깨끗하게 비워낸 그가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아!”
“어떻습니까?”
“그냥 다 섞었는데, 어떻게 이런 맛이?”
“하하! 한국에 오시면 이것보다 더한 맛도 보여드리죠!”
“한국에 가면?”
“예! 조만간 오시지요. 풀코스로 대접해드리겠습니다!”
“그거 좋구먼!”
그렇게 그날 나와 칼리드는 늦은 시간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 * *
다음 날.
“으으.”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은 매스껍다.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걸까?
아니, 지금 몇 시지?
나는 뭘 어떻게…….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손을 뻗었다. 그러자 내 손에 무언가가 잡혔다.
물컹.
“음?”
부드러운 뭔가가 내 손에 잡혔다.
그것을 잠깐 만지작거리던 나는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황급히 두 눈을 떴다.
“……!”
두 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둔턱.
그걸 본 나는 기겁하며 일어났다.
“아이 씨!”
둔턱의 정체는 다름 아닌 칼리드 왕자의 엉덩이였다.
나는 손으로 그의 엉덩이를 만졌던 것이다.
“아오!”
나는 감히 만지면 안 될 것 만진 사람처럼 손을 박박 문질렀다.
“으! 젠장! 설마 어제 그대로 기절해서 잠든 건가?”
어제 술을 마시며 만찬을 벌인 흔적이 고스란히 있었다.
지저분한 모습들을 눈에 담던 나는 칼리드 왕자를 툭툭 쳤다.
“이봐요! 일어나봐요!”
“@#%!?”
“여긴 뭐… 어떻게 안 되겠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를 남발하는 칼리드 왕자를 내버려둔 채 나는 자리를 벗어났다.
그렇게 자리를 벗어나 부스스한 모습으로 집안 복도를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김 비서가 등장했다.
“도련님.”
“어? 김 비서! 나 버리고 간 거야?”
“어제 도련님께서 먼저 가서 자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먼저 갔죠.”
“아무리 그래도 나를 챙겼어야지!”
“그래서 지금이라도 챙기기 위해 왔죠.”
“…….”
김 비서와 말싸움할 힘도 없다.
여전히 숙취가 남아 있지만 지금은 좀 씻고 싶었다.
“어디서 씻을 때가 없나?”
“샤워실로 안내해드릴게요.”
김 비서는 나를 샤워실로 안내했다. 샤워실로 향하던 중, 김 비서가 말을 꺼냈다.
“괜찮으세요?”
“음? 뭐가?”
“어제 모처럼 드셨잖아요.”
“아, 음. 전혀 안 괜찮아.”
“고생하셨어요.”
고생했다는 그 한 마디에는 김 비서의 진심이 느껴졌다.
나는 말 없이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가 샤워실이에요.”
“아, 고마워.”
“그럼 저는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올게요.”
“응. 부탁 좀 할게.”
김 비서는 내게 고개 숙이고 떠났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보던 나는 조용히 샤워실로 들어갔다.
* * *
지태훈과 김유리가 두바이에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동안, 고양 유나이티드에선 난리가 났다.
“큰일 났어요! 만나기로 한 투자자들이 지금 약속을 줄줄이 취소하고 있어요!”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고양 유나이티드 프런트가 발칵 뒤집혔다.
예정됐던 투자자들과의 미팅이 줄줄이 취소됐기 때문이다.
각자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취소했기에 구단 입장에선 황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하필 대표님도 안 계신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천지원 부장은 갑작스런 상황에 기가 막혔다. 함께 있던 정소영 부장의 얼굴도 어두웠다.
추가적인 투자가 없이는 내년 예산 확보에 엄청난 지장이 생길 터.
“어쩌죠? 지금 대표님한테 연락되나요?”
“안 받으십니다. 김 비서님도 연락이 안 되고.”
“하아.”
현재 지태훈 대표가 없는 상황에서 천지원과 정소영 부장 두 명이 구단을 이끌어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지태훈도 두 사람의 능력을 믿고 출장을 나갔다. 그들은 그런 대표의 믿음을 저버릴 수 없었다.
“어떻게든 해결해봐야 합니다.”
“맞아요. 우리가 어떻게든 해결해야 해요.”
그들은 어떻게든 지태훈 대표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지태훈 대표의 신뢰도 달라질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그런 결과는 원하지 않았다.
“우선 저하고 정 부장님이 각자 나눠서 투자자들과 다시 접촉을 해 보죠.”
“네. 그렇게 해요.”
“혹시 문제가 생기거나 하면 바로 연락하세요. 바로 합류할 테니까요.”
“네. 천 부장님도 문제 생기면 바로 연락 주세요.”
“그러죠.”
그렇게 두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본부장님. 고양 유나이티드 쪽에 투자하려던 투자자들의 움직임을 막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래?”
비서의 보고에 지태완은 흐뭇해했다가 금방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태훈이, 그 녀석은 뭐 하고 있지?”
“최근 두바이로 떠났다고 합니다.”
“두바이? 거긴 왜?”
“그게…… 지금 알아보고 있는 중인데, 급하게 일이 생겨서 갔다고 합니다.”
“후후, 그 녀석에게 일이 있어봤자 뭔 일이 있겠어.”
“…….”
“뭐, 혹시 모르니 계속 주시해.”
“네.”
모든 것은 지태완의 작품이었다.
그가 보이지 않게 힘을 쓰며 고양 유나이티드로 향하던 투자자들의 발목을 묶어버린 것이다.
이런 사실도 모른 채 고양 유나이티드 프런트에선 헛된 노력만 할 뿐이었다.
“어디 열심히 발버둥 쳐봐. 어차피 너희들은 떠내려갈 운명이니까.”
그는 변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변수가 나오기 전에 싹부터 잘라내는 것이 지금까지 그의 방식이었다.
국내 투자가 막힌 이상, 고양 유나이티드는 앞으로 지금처럼 활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할 거냐. 지태훈.”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