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오늘은 김 비서와 함께 백화점에 왔다.
“도련님. 갑자기 백화점에 가자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음, 보상 좀 해주려고?”
“……?”
올 시즌 고양 유나이티드는 확실히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팀의 분위기는 물론이고, 성적에서도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곽찬구 감독이 부임한 이후 팀은 9경기에서 5승 2무 2패를 기록했다.
지난 시즌 임태무 감독이 지휘하던 때 20경기 동안 5승만 기록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현재 팀은 완벽하게 중위권에 안착된 상태였고 계속해서 상위권 진입을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 덕분에 최근 고양 유나이티드 홈경기를 찾는 팬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늘어나는 팬들을 위한 각종 경품 이벤트까지 진행하면서 상당한 효과를 보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좋은 결과를 만들어준 선수단을 위해 개인적인 선물을 해줄 생각이었다.
“남자라면 역시 시계가 좋겠지?”
선수단은 선수부터 코치들까지 전부 남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세계적인 시계 전문 브랜드 회사가 입점해 있는 1층으로 향했다.
입구에서부터 직원이 정중하게 맞이했다.
그런 직원을 향해 말없이 카드 하나를 내밀었다.
“잠시 확인하겠습니다.”
카드를 받은 직원은 카드를 바코드에 찍었다. 그리고 화면에 뜬 회원 정보를 본 직원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조금은 목소리가 커진 직원이 서둘러 나를 매장 안으로 안내했다.
‘확실히 VIP 카드가 좋아.’
영신그룹 가족에게만 발급된 전용 VIP 카드였다.
카드 덕분에 그들은 우리를 매장 최고 VIP로서 대접했다.
“혹시 원하시는 상품이 있으십니까?”
직원의 물음에 나는 조금 생각했다가 대답했다.
“선물로 줄 건데.”
“아! 그럼 마침 괜찮은 제품들이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직원은 다양한 시계들을 눈앞에 선보였다.
그 시계를 쭉 훑어보던 나는 조용히 뒤에 있던 김 비서에게 말을 걸었다.
“김 비서.”
“네?”
“김 비서가 보기에는 어떤 게 괜찮은 것 같아 보여?”
“음.”
김 비서는 샘플로 나열된 시계들을 쭉 훑어보더니 테두리가 금빛으로 이루어져 있는 시계를 고르며 말했다.
“이 시계가 저희 팀 선수들과 어울리겠는데요. 저희 팀의 상징인 노란색과도 맞고요.”
“오, 역시 김 비서야. 그럼 이걸로 해야겠다.”
시계를 고르자 직원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혹시 몇 개나 필요하신지요?”
“음, 27개?”
“예?”
“선수가 22명이고 코치가 5명이니까, 27개.”
“아, 네, 넵.”
27개라는 말에 직원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
우리가 고른 시계는 개당 1천만 원 가까이 되는 물건이다.
아마 이 직원은 여태까지 고객에게 팔았던 물건들 중에서 가장 많이 파는 일이 될지도 몰랐다.
그뿐만이 아니다.
보통 이런 곳에 일하는 직원들은 매출에 따른 인센티브도 별도로 받는 경우가 많았다.
들어올 인센티브까지 생각하면, 이 직원 입장에서는 로또 당첨된 거나 마찬가지다.
“겨, 결제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이걸로.”
나는 검은색 카드를 내밀었다.
이 카드도 평범한 카드가 아니었다.
영신그룹 총수만이 가지고 있는 카드였다.
그런데 총수도 아닌 내가 어떻게 가지고 있냐?
당연히 빌렸지.
아버지한테 선수단에 선물 좀 뿌리고 싶다고 말하니 이걸 턱 주셨다.
통이 큰 재벌 아버지를 둬서 참 좋다.
“도련님. 회장님께서 이렇게 많이 써도 된다고 하셨나요?”
“뭐, 아버지 통장에서 이 정도 액수는 용돈 수준도 안 될걸?”
“…….”
그렇게 결제를 모두 마친 뒤, 나는 직원에게 부탁해 가지고 온 차에 실어달라고 말했다.
백화점에서 이 정도 서비스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시계 구입을 마친 뒤, 나는 곧장 옆에 있는 다른 명품 매장으로 향했다.
거기서 가방을 살펴보고 있자 김 비서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갑자기 가방에 관심이 생기셨어요?”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선물하려고.”
“선물이요? 누구한테요?”
김 비서는 내가 어디 남모를 재벌 가문의 여자에게 선물하려는 줄 아나 보다.
“김 비서 주려고.”
“네?”
화들짝 놀라는 김 비서.
“너무 놀라지 말라고. 그동안 도와준 보답이자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주려는 거니까.”
“음, 저는 딱히 필요 없는데요?”
“김 비서가 비록 재벌 가문의 여식은 아니어도, 그래도 영신그룹 이사님 가문의 따님인데 때론 비싼 가방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김 비서는 의외로 명품에 관심이 없어 했다. 집이 못 사는 것도 아니다.
김 비서 집안 정도로 따지면 아마 대한민국 최상위 1% 안에 들어갈 정도는 된다.
영신그룹 내에서 김진철 이사의 지분은 결코 적지 않다. 아버지도 꽤 많이 김진철 이사를 챙겨준 걸로 안다.
그런 집안의 장녀인 김 비서는, 누가 얘기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수수하게 입고 다녔다.
물론 수수하다고 해서 못났다는 얘기는 아니다.
대충 입어도 김 비서의 옷맵시는 정말이지…….
찰싹!
“……도련님?”
“아니야. 아무것도.”
괜히 엉뚱한 생각할 뻔했다.
어쨌든 나는 그동안 수고한 김 비서에게 뭔가 보답을 해주고 싶었다.
이것은 어쩌면 회귀 전 일도 포함되어 있다.
비록 김 비서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음에 드는 걸로 하나 골라봐. 이건 내 돈으로 사는 거니까.”
“회장님 카드가 아니라요?”
“어. 진짜 내 사비로 살 거야.”
김 비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
한참을 제대로 고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답답함을 느낀 나는 직원을 불렀다.
눈치를 보고 있던 직원이 후다닥 다가왔다.
“이분에게 어울리는 가방 하나 골라줘.”
“네! 이쪽으로 오시죠!”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직원은 김 비서에 어울리는 가방을 골라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매장을 나오는 김 비서의 손에는 가방이 담긴 포장백이 들려 있었다.
“고맙습니다. 도련님.”
“별말씀을.”
“그런데 정말 이렇게까지 해주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괜찮아. 그냥 내 마음이야. 받아줘.”
“…….”
복잡한 표정을 드러내던 김 비서는 무언가 결심했는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열심히 할게요.”
“응. 부탁할게.”
그렇게 나와 김 비서의 백화점 쇼핑 에피소드가 끝났다.
* * *
『‘구단주가 쐈다!’ 고양utd 대표, 선수들에게 고급 시계 선물.』
포털사이트 뉴스 카테고리 중 국내 축구 코너에 눈길이 끄는 기사 하나가 올라왔다.
기사를 본 사람들은 놀라움과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구단주 장난 아니네.
-와, 요즘 고양 잘나가던데 다 이유가 있었네.
-부럽다. 나한테 시계 선물해줄 사람 없나?
-지태훈이 영신그룹 망나니로 소문나 있던데, 이제 정신 차렸나?
-망나니 같은 소리 하네. 저런 사람이 망나니면 망나니 아닌 사람이 어디있냐?
비단 팬들만 반응하는 것은 아니었다.
선물을 받은 선수단은 감격했다.
“저, 정말 저희가 받아도 되는 건가요?”
“물론이죠. 대표님께서 일부러 사비 털어서 선물로 드리는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주장 김지우를 비롯한 선수들은 비싼 명품 시계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기쁨을 넘어설 정도로 큰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이거 대표님께 큰 신세를 졌군요.”
“신세라뇨. 감독님. 오히려 대표님께서는 감독님께 큰 신세를 지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어쨌든 너무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김 비서님.”
“네. 그렇게 하지요.”
곽찬구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들도 상당히 감격해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김 비서는 백화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괜찮아. 그냥 내 마음이야. 받아줘.
평소 명품이라면 거들떠도 안봤던 그녀였다.
명품의 가치보다 사람의 가치를 좀 더 우선시 여겼다. 가치가 높은 사람일수록 명품보다 낫다고 생각한 그녀는 스스로를 명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랬던 그녀가 처음으로 명품을 받고 가슴이 설렜다.
‘도련님이 너무 달라지셨어.’
그렇게 생각하는 그녀의 손에는 지태훈이 선물로 준 가방이 있었다.
그 가방을 그녀는 말없이 쓰다듬었다.
그것도 아주 소중하게.
* * *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무슨.”
북유럽 판로를 성공적으로 개척한 지태완은 현지 일정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복귀했던 것이다.
“사내에서 본부장님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이런 결과도 없었을 거란 말이 많습니다.”
북유럽 판로 경쟁을 하던 태성전자를 제치고 영신전자가 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영신전자는 그룹의 핵심 계열사 중 하나였다.
그런 영신전자의 북유럽 판로 개척은 꽤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그런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지태완이 있었다.
“이사회에서 본부장님을 영신전자 사장으로 올릴 거란 말이 돌고 있습니다.”
“그래?”
영신전자 사장 자리는 총수가 되는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직책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룹 내에서도 영신전자 사장은 차기 그룹 총수를 위한 자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요했다.
그런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곧 차기 총수는 지태완이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전혀 기뻐 보이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혹 무슨 일 있으십니까?”
“태훈이가 있는 고양 유나이티드. 요즘 잘나간다지?”
“아, 예.”
오 비서의 대답을 들은 지태완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젠장.”
“……본부장님?”
“지태훈. 그놈이 요즘 굉장히 내 신경을 건드리고 있어.”
그 말에 오 비서는 얼음장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지태완의 성격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얼마나 기분이 좋지 않은지도 알고 있었다.
“요즘 그 녀석은 뭘 하고 있지?”
“그게…… 최근에 여기저기서 투자자를 끌어모으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이대로 두면 분명 더 크게 성장하게 될 겁니다. 어떻게 할까요?”
지태완의 두 눈은 얼음장처럼 바뀌었다.
“고양 유나이티드가 접촉하거나 접촉할 예정이 있는 투자자들의 명단을 확보해. 그리고 투자받지 못하게 압박한다. 알겠나?”
“넵.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봐.”
오 비서가 나간 후 홀로 남은 지태완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칼을 쓸어올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향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넓은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지태훈. 아무래도 총수가 되기 전에 너부터 치워야겠다.”
아버지처럼 사업가로서의 촉이 얘기하고 있었다.
지태훈은 위험한 존재라고.
그는 그 위험한 싹을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 * *
“제기랄! 망나니 때문에 이꼴이 날 줄이야.”
서울 강남에 위치해 있는 어느 조용한 바(bar)에서 허재우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지태훈 대표가 부임하자마자 단장직에서 해고당했던 그는 이후 백수처럼 지내고 있었다.
당장 몇 달 일을 안 한다고 해서 굶어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금전적인 것보다 어떻게 하면 지태훈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감히 나를 방해하다니!”
원하던 목표가 얼마 남지 않았던 상황이다.
1년 정도 철없는 망나니를 적당히 상대해 주다가 몰락하는 고양 유나이티드와 함께 보내버릴 계획이었다.
이 계획이 성공하면 추후 지태완이 영신그룹의 총수가 되면 한자리 꿰차기로 약속된 상황이었다.
그랬던 그의 꿈을 지태훈이 한 방에 날려버렸다.
심지어 출세를 약속했던 지태완도 그를 버렸다.
그는 자신을 버린 지태완보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만든 지태훈에 대한 복수심이 더 컸다.
“복수, 하고 싶나?”
그때, 누군가가 나타나 그에게 말을 걸었다.
“뭐야?…… 어? 당신은?”
“이런 곳에서 혼자 술만 마시면 아무것도 이룰 수 있는 건 없다는 거 모르나?”
“이재신!”
뱀 눈을 하고 있는 중년 남자.
그 남자의 정체는 바로 파주FC의 이재신 단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