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다음 날, 김 비서가 피곤한 얼굴로 내 앞에 등장했다.
“김 비서, 무슨 일 있나?”
“아니오.”
“무슨 일 없는 사람치고 얼굴이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습니다. 대표님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니에요.”
“흠. 왠지 신경 좀 써달라는 이야기로 들리는데?”
“…….”
피곤해 보이는 김 비서가 마음에 걸린다.
바로 일 얘기를 꺼내려다가 잠깐 접고, 김 비서 상태부터 살폈다.
“그러지 말고 무슨 일 있었는지 얘기 좀 하지?”
“대표님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니라고…….”
“그렇겠지. 평범한 상황이면 신경도 안 썼을 거야. 그런데 그거 알아? 평소라면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될 김 비서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건 왜일까?”
“그건 이제 도련님께서 구단 대표 이사가 되셨으니 자연스럽게 호칭 변경을…….”
“김 비서. 내가 김 비서를 봐온 시간만 해도 20년이 넘어.”
“…….”
나는 머릿속으로 김 비서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추측해 보았다.
분명 여러 상황들이 있을 것이다.
집안에 일이 있는 걸까?
아니면 김 비서 개인의 일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아버지가 불렀어?”
“예?”
“놀라는 거 보니까 맞구만.”
“그러니까 그건…….”
평소와 달리 상당히 당황하는 김 비서의 태도에 나는 어렴풋이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회귀 전에도 여러 번 겪었던 일이다.
아버지는 김 비서를 통해서 내 얘기를 들었다.
나한테서 직접 듣기보다 김 비서를 통해서 듣는 이야기가 훨씬 많을 것이다.
김 비서가 내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해주는 사람은 아버지였으니까.
“괜찮아, 이해해. 김 비서도 김 비서 사정이 있으니까.”
“도, 도련님.”
“그래도 말이야.”
나는 김 비서 앞으로 다가가 얼굴을 슥 들이밀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부터 김 비서는 내 사람이야. 아무리 아버지라도 내 사람 건드리면 가만 안 둘 거야.”
“……!”
망나니는 손에 쥔 거 함부로 놓지 않는다.
그게 망나니의 철칙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말했다.
그런데…….
“음?”
김 비서가 묘하게 나하고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김 비서, 왜 그래?”
“아니요. 그런 거 아닙니다.”
“뭐가 아니야?”
“아무튼! 그런 오해 섞인 말들은 함부로 하지 말아주세요!”
“오해?”
뭐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김 비서, 어젯밤에 연락이 왔어.”
“연락이요? 누가요?”
“누구긴. 애인한테서 연락 왔지.”
“예?”
김 비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농담 한 번 꺼냈을 뿐인데 갑자기 표정이 저러니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크흠! 농담이야. 농담. 그 있잖아. 곽찬구 감독.”
“아아. 그렇군요.”
“곽찬구 감독이 다시 만나자고 연락 왔어.”
“정말입니까?”
처음 만나서 감독직 제안했을 때 단호박처럼 거절하던 곽찬구 감독이다.
그런 그가 다시 만나자고 연락이 왔으니 놀랄 법도 하지.
“언제 만나잡니까?”
“지금.”
“네?”
김 비서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갑자기 대표이사실 문이 열렸다.
덜컥.
“어서 오세요. 감독님.”
후줄근한 차림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등장한 곽찬구 감독의 모습에 나는 반갑게 환영했다.
곽찬구 감독은 굳은 얼굴로 나와 김 비서를 번갈아 쳐다보고 말했다.
“전에 했던 얘기, 아직 유효한 거 맞습니까?”
“물론이죠.”
“그럼 그때 그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감독을 맡겠다는 곽찬구의 말에 내 뒤에 있던 김 비서가 화들짝 놀란 건 덤이다.
그리고 나는 기다렸던 대답을 듣고 환하게 웃었다.
“그럼 우리 좀 더 진지한 얘기들을 나눠볼까요?”
* * *
그동안 곽찬구 감독은 중국 갑급 리그에 속한 허난과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허난에서 무려 15억이라는 거액의 연봉을 제안했기에 곽찬구 감독도 상당히 마음이 기울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허난에서 곽찬구 감독 혼자만 올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미 팀에는 미리 세팅한 코칭스태프가 있으니, 곽찬구 감독 혼자 오라는 것이다.
그런데 곽찬구 감독에게는 자기 휘하 코칭스태프가 존재하던 상황이었다.
그들을 버리고 본인만 중국으로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코칭스태프 관련된 부분에서 협의에 난항을 겪었다.
결국 지지부지해진 가운데 곽찬구 감독은 때마침 나를 만난 것이다.
물론 뼛속까지 파주DNA가 있는 그가 라이벌 팀에서의 제안에 끌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어찌 된 일인지 이재신 단장이 우리가 만난 걸 알고 있었소.”
“그랬습니까?”
“이재신 그 새끼, 아니, 단장이 며칠 전에 날 찾아와서 협박했습니다.”
곽찬구는 이재신 단장과 사이가 극단적으로 안 좋아진 상황이다.
이재신 단장이 곽찬구 감독에 대해 험담을 한다는 것은 국내 축구 관계자들 사이에선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최근엔 그런 일이 줄어들었다. 곽찬구 감독이 허난과 협상 중이라는 기사가 난 이후였다.
아예 해외로 나가 눈에 보이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터.
그런데 고양 유나이티드와 접촉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는 곽찬구 감독이 지지부진해진 허난과의 협상 테이블을 접고 고양 유나이티드로 향하는 것 아니겠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이재신은 곽찬구 감독을 만나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만약 내가 고양 유나이티드로 간다면 두 번 다시 국내에서 축구 활동 못 하게 만들겠다고 하더군요.”
“음. 망나니인 제가 봐도 미쳤네요.”
“……그렇습니까?”
“예. 망나니한테 따봉 받는 일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
협박당한 곽찬구 감독은 분노했고 결국 고심 끝에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파주 대표이사도 알고 있지 않나요?”
“단장도, 대표도, 모두 한패입니다.”
나는 속으로 웃고 있었다.
사실 우리 쪽에서 곽찬구 감독과 접촉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파주 쪽에 뿌렸었기 때문이다.
파주 입장에서는 열 받을 만한 일이다.
비록 우리 쪽에서 기름을 뿌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파주는 화를 낼 자격이 없다.
정상적인 구단이라면 이렇게 팀 레전드에게 거지 같은 태도를 보이진 않는다.
“살다 보면, 어린아이들보다 못한 일들을 벌이는 어른들이 많죠.”
“…….”
“하지만 그런 어린아이보다 못한 어른들을 혼내주는 것도, 어른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
“체벌은 나쁘지만 훈육은 필요하다는 주의라서. 어때요? 같이 훈육하는 어른이 되어보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내 두 눈은 번뜩이고 있었다.
* * *
“홈페이지에 올릴 대표님 인사말은 어떻게 됐어?”
“아직 안 왔습니다.”
“뭐? 취임하신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안 왔다는 게 말이 돼?”
고양 유나이티드 마케팅팀 내 홈페이지 관리 직원은 고개를 숙였다.
그런 직원을 향해 천지원 과장은 뭐라 한 마디 더 하려다가 말았다.
대표가 안 보낸 걸로 직원한테 뭐라 하는 것도 웃겼기 때문이다.
“됐다. 대표님한테는 내가 말해볼게.”
원래 천지원 과장 위에는 김광수 부장이 있었다. 하지만 김광수 부장이 신임 대표와 함께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사직서를 내고 떠난 상태였다.
그래서 현재 다음으로 직급이 높은 천지원이 팀을 관리하고 있었다.
“대표님 계십니까?”
“네. 무슨 일이시죠?”
대표이사실 앞에는 김유리 비서가 있었다.
뭇 남성들을 설레게 만드는 청순한 외모를 가진 김 비서는 남자 직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유부남인 천지원에겐 별 관심없는 사항이었다.
다만, 그는 그녀가 가진 능력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김유리라고 했던가…… 지태훈 대표와 같은 서연대학교 출신에 학과도 똑같은 정치외교학과 출신이라던데.’
지태훈보다 2살 연상이라고 들었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다는 이야기도 알고 있다.
영신 그룹에서 상당히 기대하는 인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전에 대표님께 부탁했던 일이 있었는데,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요.”
“일이라면…… 아! 홈페이지에 올릴 인사말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이런. 도련, 아니, 대표님께서 기한 내에 보내준다고 얘기하셨는데 아직도 안 보냈나요?”
“예.”
“잠시만요. 대표님 안에 계시니까 제가 말씀드려볼게요.”
김 비서는 서둘러 대표이사실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대표님. 마케팅팀에 천 과장님 오셨습니다. 전에 부탁드렸던 홈페이지 인사말을 아직 안 보내주셨다고 해서요.”
“아! 깜빡했네.”
깜빡했다는 말에 듣고 있던 천지원의 얼굴은 굳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대표가 자신의 업무를 잊을 수가 있나?’
홈페이지 인사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처럼 보여도, 그래도 신임 대표가 어떤 포부를 갖고 업무를 하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인사말이다.
그걸 깜빡했다고 말하다니.
‘그냥 망나니였던 걸까?’
서연대학교 출신이라고 해서 흥미를 가지긴 했다.
이유가 있었다.
천지원 과장도 서연대학교 출신이었으니까.
서연대학교 경영학과 출신인 그는 학업을 수행하다가 스포츠산업 쪽에 흥미를 느꼈다.
고민 끝에 그는 그쪽으로 진로를 잡고 해외 유학을 선택했다.
이후 영국 리버풀대학교를 졸업하고 해외 축구클럽 쪽 인턴 생활을 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서 고양 유나이티드 정사원으로 입사했던 것이다.
“천 과장보고 들어오라고 해줘.”
“예. 알겠습니다.”
김 비서는 몸을 돌려 천지원에게 말했다.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네.”
문이 열리고 그 안에 있는 지태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입고 있는 와이셔츠 단추 윗부분을 일부 풀어 놓은 채 서류를 읽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천지원 과장.”
지태훈과 일대일 대면은 처음이었던 천지원은 조금은 긴장된 얼굴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마케팅팀 과장 천지원이라고 합니다.”
“네, 네. 알고 있어요. 일단 앉으시죠.”
대표이사실에 마련된 소파에 앉은 두 사람.
그사이 김 비서가 음료 두 잔을 들고 와서 각자 앞에 내려놓았다.
“미안합니다. 일이 좀 서툴러서 그만 늦어지고 말았네요.”
“……괜찮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얘기해주니까 고맙네요.”
몇 마디 얘기했을 뿐인데, 천지원은 생각보다 지태훈이 정상적이라고 느껴졌다.
‘처음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지태훈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천 과장님이 과거 서연대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입사 원서에도 일부러 서연대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적지 않았다. 입사 이후에도 다른 직원들한테도 서연대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구단 내에서 그가 서연대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지태훈이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보니 알게 됐습니다. 다른 이들한테는 비밀을 지킬 거니까 안심하세요.”
“아, 넵.”
“사실 저도 서연대학교 출신이거든요. 비록 자퇴했지만.”
“…….”
“자퇴한 이유가 궁금하시죠?”
“……!”
이어지는 지태훈의 말에 천지원은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천 과장님이 신 대리를 시켜서 제 뒷조사를 진행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
“뭐, 괜찮습니다. 제가 천 과장님이 서연대학교 출신이라고 아는 것처럼, 천 과장님도 충분히 그러실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 그게 그러니까…….”
천지원은 후환이 두려웠다.
뒷조사는 몰래 해야 뒷조사다.
이렇게 걸려버린 이상, 뒷감당은 순전히 자신의 몫이다.
“죄송합니다. 만약 처벌하시겠다면 저만 해주십시오. 신 대리는 그저…….”
“누가 처벌한데요?”
“……예?”
“왜 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먼저 꺼내세요.”
“…….”
천지원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를 향해 지태훈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천 과장님.”
“예.”
“궁금한 부분이 있었으면 직접 찾아와서 물어보지 그러셨어요. 저는 언제나 열려 있는 사람인데.”
아무리 대표가 열려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대표의 사적인 이야기를 물어볼 수 있는 간 큰 직원은 없다.
“들려드리죠. 제가 왜 자퇴를 하게 됐는지.”
“……!”
“그 대신, 제 이야기를 듣는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 조건이요?”
“예. 내 이야기를 듣고 나면 당신은 앞으로 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조건을 승낙하면 제 과거를 알려드리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순간, 천지원은 볼 수 있었다.
지태훈 대표 뒤로 보이는 사악한 악마의 모습을.